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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는 이들

미사 후 첫 상담이 끝나고는 이어 두 번째 상담이 있었지요.

- 신부님, 우리집 식구들이 변하지를 않아요. 저는 정말 우리집 식구들이 하느님을 알고 받아들여서 서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그 작업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하고 좌절해요.

저는 웃으면서 그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해 주었습니다.

- 내가 재미난 사실 하나 알려줄까?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미사때 열심히 강론을 하지만 사람들이 전혀 변화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적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곤 하지. 하지만 다시 용기를 낸단다. 나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기는 거야. 그러면 조금은 용기가 나.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아. 적어도 네가 하는 일 안에서 긍정적인 부분은 지금 네가 ‘남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고 있다는 거잖아. 안그래? 그러면 너는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하느님은 네가 하는 일을 기억하실거야.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나가렴.

- 9살 11살의 어린 동생들이 부모님에게 대들고 하면 제가 따로 불러서 그렇게 하면 안되고 하느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부모님에게 공손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 녀석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좀 무리하게 가르치려고 하기도 해요.

- 그래, 이해해. 사실 나도 신자들이 미사 중에 내 말 잘 안 들으면 가서 한대 쥐어박고 싶어. 하지만 잘 들어봐,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란다. 우리가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서 누군가를 하느님 앞에 끌어들일 순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사람들은 절대로 하느님을 배우지 못한단다. 하느님은 억지로 강요한다고 배워지는 게 아니니까 말이지. 오히려 네가 변해야 해. 네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내면으로 변해 나가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눈치를 채게 될거야. 마치 네가 정말 좋은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저절로 찾아오듯이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가면 사람들이 저절로 너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할거야. ‘저 녀석이 예전에는 저렇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더욱 겸손하고 진실한 것 같아. 그 이유가 뭘까?’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 너에게 다가올거야. 그러니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무리한 생각보다는 먼저 너 자신을 올바로 가꾼다는 생각을 하거라. 그러면 저절로 주변 사람들도 변해 나가기 시작할거야. 무엇보다도 네 동생들을 떠올려봐. 그리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 네 동생들은 어떤 형이 필요할까? 이런 저런 것들을 하라며 잔소리를 하는 형? 아니야. 네 동생들은 힘들때 자기 곁에 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형을 필요로 해. 그러니 그런 형이 되어줘. 그러면 동생들이 너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저절로 따라오게 될 거야. 지금 말을 듣지 않는다고 쥐어 박으면 네가 가진 힘 때문에 복종하겠지만 내면에 앙심을 품게 된단다. 그러니 좋은 형이 되어줘. 그래, 이것 말고 다른 것도 있니?

- 신부님,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신부님 강론 말씀은 좋은데 듣다 보면 제 마음이 무거워져서 밖에 나가 공기를 들이마셔야 해요. 왜 그런 걸까요?

- 하하하. 그건 자연스러운거야. 이렇게 한 번 상상을 해 보자꾸나. 공기가 가득한 풍선을 물 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억지로 억지로 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무리하면 터져버리기도 하겠지? 그리고 언제라도 그 힘이 사라지면 풍선은 다시 물 밖으로 튀어나가 버릴거야. 하지만 그 풍선에서 아주 조금씩 공기를 빼어 나가면 결국 그 풍선은 그 자체의 무게로 물 속으로 깊이 잠겨들 수 있게 되는 거란다. 너는 아직 세상에 많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강론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야.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재촉하지 말거라. 가슴이 답답해져서 공기를 쐬고 싶으면 나가서 잠시 쉬어도 좋아. 천천히 조금씩 다가오면 돼. 그러면 언젠가는 내 강론을 즐기는 날이 올테니까. 아주 천천히 조금씩 걸어 가자꾸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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