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 그들은 더 이상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 오히려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죽고,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은 모두 제 이만 실 것이다.
(예레미야 31,29-30)
하느님의 뜻은 명백합니다. 부모의 죄가 대를 이어 내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죄를 상속받지는 않지만 죄의 결과는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쓰레기를 버린 건 버린 사람의 탓이지만 버려진 쓰레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지요. 부모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모의 탓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한 거짓말로 인해서 가산을 탕진하고 나면 자녀들이 고스란히 그 고통을 나누어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그 죄를 자녀에게 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자녀로서는 부모의 짐을 묵묵히 나누어 지고 가는 그 모습에 하느님은 상을 준비하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역적이면 자녀도 역적의 자녀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의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처단하려니 그 자녀들의 복수가 두려운 것이지요. 그래서 삼족을 멸해서 아주 씨를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 탓에 죄 없는 어린 영혼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고 당연히 그 무죄한 영혼에 대한 책임은 부모의 죄를 전가시켜버린 당사자에게 돌아가는 것이지요.
타인의 죄가 나에게 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죄는 각자 개인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는 분명히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를 이어받아 다른 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예 어두움을 몰랐다면 어두움에 다가간다는 것도 몰랐을 터이나, 어두움을 알고 난 뒤에는 어두움에 다가가는 유혹도 덩달아 생겨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원죄’의 개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첫 조상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뛰어난 존재가 되겠다는 교만을 지니고 반역하였을 때, 바로 그 때 그 죄의 결과는 ‘원죄’라는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전수된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하느님을 모르는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고백함으로써 원죄를 치유받는 것입니다. 이를 ‘세례’라고 하지요.
다시 초반의 주제로 돌아와서, 각자의 죄는 각자의 몫입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는 이어져 내려오게 마련이고, 첫 조상의 죄의 결과로 우리는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원죄는 치유 가능한 죄입니다. 사실 모든 죄는 치유 가능한 죄이지요. 단 하나 ‘성령을 거부하는 죄’만 빼고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그분께 다가오는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은총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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