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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고통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치과를 가자고 하면 난리가 납니다. 아이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할 것이고 엄마는 나중에 아이에게 다가올 고통을 생각해서 미리 가서 치료를 받자고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세지가 평화가 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아픈 곳을 치유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말은 우리가 현재 올바로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즉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어디가 아픈 걸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픈 곳을 알려면 진단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에겐 스스로 진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마다 모두 박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상당히 아픈데 아픈 곳을 점검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셈이지요.

육적인 아픔은 우리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몸의 통증 시스템이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정신적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트레스가 쌓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고치려는 것은 ‘영적인 아픔’입니다. 그리고 이는 쉽게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영적으로 자신을 파괴 시키지만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쾌락을 누리는 활동이 있습니다. 술을 진탕 마시면서 헛된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의 육신은 취기로 기분이 좋아지고 우리의 정신은 마치 즐거움에 가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이는 자신의 거룩한 영을 파괴시키는 피폐한 활동에 불과합니다.

고급 상점가를 돌면서 물건들을 구경하면 눈은 화려한 물건들로 즐거워지고 마음은 욕구의 간접 충족으로 기뻐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여가활동은 나의 마음 속에 은연 중에 ‘사치’와 ‘탐욕’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활동 중에는 이러한 성격의 활동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에 모든 것을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분별하고 받아들이기 일쑤인 것이지요. 그렇게 갈수록 더욱 영혼이 피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이는 내면에 분별력이 생기기 시작하고 영혼에 어둠을 조장하는 것들을 피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살아있는 동안 같은 장소를 공유할 수는 있어도 서로 내면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단지 같은 피를 공유했다는 것이 각자의 내면이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음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이지요.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마태 10,35)

물론 하느님의 자녀들은 마음이 갈라선 같은 집안 식구들을 다시 하느님에게 돌이키려고 노력에 노력을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각자는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결국 하느님에게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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