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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겟세마니 대성당에서의 강론

겟세마니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것이지요. 그 누구라도 고통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은 몇가지 측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많이 걸어 다리가 아픈 것도 고통이기에 우리는 쉴 곳을 찾고, 더워서 땀이 나는 것도 고통이기에 우리는 시원한 곳을 찾습니다. 선교지에서 벌레가 많은 것도 육체적 고통이고 음식이 맞지 않는 것도 육체적 고통입니다.

육체적 고통 외에 정신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여러가지 신경 쓸 게 많으면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이 또한 고통의 일종이지요. 아마 대부분의 우리 동기 신부님들은 이 두번째 고통을 겪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사제로 살면서 육신이 크게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조금 더 깊이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으셨을까요? 물론 육체적으로 겪을 수난도 힘드셨을 것이고 사람들의 이런 저런 무시와 냉대로 겪을 수난도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차원의 고통이었습니다.

영적인 차원의 고통은 두 가지로 나뉘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사랑한 이들이 엇나간 길을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고통을 겪어볼 수 있었습니다. 제 사랑하는 사람이 참으로 힘든 시간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중략)

우리 주님은 수난의 시간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수차례 경고하셨지요.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씹히고 먹히고 뜯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제가 된 이유입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언제나 사제가 될 때의 첫 마음, 그 헌신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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