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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선교사 이야기

어느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게 되었습니다. 헌데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하는 방법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저것 좋은 것을 줍니다. 시내에 데리고 가서 영화도 보여주고, 단체 티셔츠도 맞추어 주고, 여헹도 데리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먹여 줍니다. 매번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니 외적으로 그는 엄청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실제로 그는 바쁘기도 합니다. 이것 저것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유지하려다보니 사람들의 요구를 다 채워 주어야 하고 신경써야 할일은 산더미처럼 불어가고 그는 그 모든 요구를 수용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스스로를 참으로 분주하게 할 일이 많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어느날 이상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날은 본당에서 회식을 마련했는데 먹을 때는 바글바글하던 사람들이 청소를 할 때에는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영화를 보자고 할 때에는 자신의 사회생활도 희생해가며 와글거리며 모여들던 교리교사들이 성시간을 할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선교사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양성’을 시작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때까지 그를 최고의 선교사라고 칭하던 이들이 뒤에서 수근대기 시작합니다. 그가 변했다고 하면서 ‘나쁜 신부’라고 욕을 하는 소리가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본인에게까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잘 해 주다가 이제 와서 독한 사람이 되었다고 빈정댑니다. 본인이 전혀 하지 않은 일도 만들어서 수근대기도 합니다. 예전같지 않다며 사람들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주일 미사도 나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그렇게나 헌신적인 것 같아 보이던 사람들이 가장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제서야 그 선교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던 일을 더욱 열심히 계속합니다. 끊임없이 신앙의 본질을 전하고 무엇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인지를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사람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선교사는 씨를 뿌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추수는 다른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제 할 일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활동을 선교활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사람들의 인기라는 것은 참으로 보잘것 없다는 것을 말이지요. 선교사는 하느님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인기는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리는 냄비와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이는 비록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알아 주십니다. 씨앗은 금방 자라지 않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추수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씨를 뿌릴 뿐이지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진정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으면 좋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일을 하게 됩니다. 8년차 해외 선교사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글입니다. 그리고 이는 선교지만이 아니라 일선 사목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교사들과 청년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마시는 술은 일시적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모두를 죽이는 독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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