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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

귀한 것을 사려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의 ‘대속’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내어 바칩니다. 그 이유는 당신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구하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영혼의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가치입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영혼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지상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헌데 우리는 유혹에 넘어갔고 우리의 영혼을 기꺼이 세상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얻기 위해서 영혼을 내어바친 것이지요. 이러한 상태를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언가를 위해서 나의 영혼을 내어바친 상태, 그래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죄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어둠이 당신의 아들을 삼키고 우리 영혼을 풀어주도록 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의 사건이라고 곧잘 구속 사건을 무시하고는 합니다.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그 오랜 옛날 옛적의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지금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지고 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엄청난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내어바쳐진 제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경우에 내버려집니다. 이는 마치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신비의 약이 존재하는데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몰라서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과 비슷합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한 보석을 뒷마당의 돌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계 예수님은 버려지고 내팽개쳐졌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은 그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분의 수난의 가치, 그분의 성혈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머나먼 여행을 마다하지 않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결국 그분을 얻어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영혼의 가치를 모르고 주님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핸드백의 가치는 알고, 신상 옷의 가치는 잘 압니다. 건강 식품의 가치는 알고 처세술을 가르치는 사람의 이름값은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자기 자신과 주님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엉뚱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일이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신 하느님은 다시 기회를 주시고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보는 양들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영혼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들고 결국 영원한 구원의 잔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지상에서 미사를 드리지만 훗날 우리 모두는 영원의 잔치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과 함께 기쁨의 만찬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슬픔도 아픔도 비탄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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