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자신의 특성과 그에 상응하는 자리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원하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싫어하는 이는 다른 걸 먹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독극물’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요. 그리고 값비싼 음식을 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먹겠다고 집착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모든 음식이 좋은 것은 아니며 음식을 찾는 모든 방식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허용된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간단한 원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이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못한데도 그것을 방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옳지 못하기에 방어를 하려고 듭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면, 그것이 빛이라면 얼마든지 드러내어도 상관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하는 어둠의 행실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 앞에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옆에 교황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욕설을 퍼붓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하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곁에 계신다면 그분의 거룩함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갖추고 살아갈 것입니다. 곁에 머무는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곁에 머무는 사람도 문제이고 그렇게 분류를 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돈 많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는 짐짓 거룩하고 교양있는 체 하고 살아가다가 자신의 부류로 돌아오면 천박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빛의 삶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원하는 음식은 무엇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을 싫어하는 이는 다른 걸 먹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독극물’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이지요. 그리고 값비싼 음식을 구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을 먹겠다고 집착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만 모든 음식이 좋은 것은 아니며 음식을 찾는 모든 방식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허용된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간단한 원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이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지 못한데도 그것을 방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니, 옳지 못하기에 방어를 하려고 듭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면, 그것이 빛이라면 얼마든지 드러내어도 상관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하는 어둠의 행실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느님 앞에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옆에 교황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욕설을 퍼붓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하는 이들은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곁에 계신다면 그분의 거룩함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갖추고 살아갈 것입니다. 곁에 머무는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도덕적으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곁에 머무는 사람도 문제이고 그렇게 분류를 하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돈 많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 앞에서는 짐짓 거룩하고 교양있는 체 하고 살아가다가 자신의 부류로 돌아오면 천박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빛의 삶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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