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볼 때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그의 복장의 화려함을 보십니까? 그의 용모의 준수함을 보시나요? 그의 말에서 지식을 보고 교육의 수준을 헤아리십니까?
인간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첫인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그의 외적인 용모에 따른 것입니다. 그가 멋진 수트를 입고 있는지 아니면 허름한 평상복을 입고 있는지, 혹은 넝마를 걸치고 있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한 사람을 순간적으로 분별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의 지식의 정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현란한 말을 꺼내고 또 얼마나 많은 지식을 꺼내는지를 살피곤 하지요. 그리고 자신과 수준이 맞는가 아닌가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의도’와 관계되는 부분입니다. 그가 가장 깊은 곳에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그가 선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는 우리가 좀처럼 쉽게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많은 위선자들은 이 부분을 능숙하게 속이기도 하지요.
사기를 치는 사람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을 속여야 합니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사기치는 사람의 의도를 알아 버린다면 속일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기를 치는 사람은 겉으로 꾸밀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꾸며서 내어 놓습니다. 물론 시나리오도 준비하지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의도를 아주 교묘하게 숨겨놓고 가려놓는 것입니다. 속는 사람이 속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선자의 가식을 올바로 분별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위선자 본인도 자신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 진면모를 알았다면 벌써 스스로 구역질을 느끼고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은 장님들입니다. 그들은 선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악을 허용하는 이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이 선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 좋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선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인들이 선하게 될 생각은 결코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람을 그 내면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으니 ‘심판’은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분별하는 것과 그를 심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행위입니다. 그를 분별하는 것은 그의 현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고, 그를 심판하는 것은 그에게 모든 희망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올바로 분별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별은 외적 조건이나 지식적 요건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참된 영혼의 방향성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댓글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