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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당하는 박해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루카 6,21-23)

행복과 우는 것, 그리고 웃게 될 것이라는 약속… 어찌보면 서로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이어서 그런 이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들이고 쫓아냄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중상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하지요.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행복 추구의 방향은 크게 두가지로 나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는 이기적인 욕구입니다. 즉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저마다의 욕구를 신으로 섬기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겉으로는 선해 보이는 행동도 실제로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거짓 신심을 찾고, 복지활동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돕거나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익이 되니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회사에서 1년에 일정량 책정된 복지기금을 어떻게든 써야 하니 쓸 뿐이지 정작 누군가가 진정으로 무언가가 필요해서 자신이 써야 할 것을 내어주며 돕는 것이 아닌 셈이지요.

다른 하나는 참된 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즉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것을 이루어 나가면서 느끼는 행복입니다. 앞서 복음에서 말하는 행복이지요. 이들은 선하고 진실되고 의로운 이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지요. 헌데 문제는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런 선과 진실과 의로움은 필요치 않다는 데에 있지요.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 거짓도 불사하는 이들 앞에서 누군가가 ‘진실’을 들고 나선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그를 곱게 보아줄 리가 만무합니다. 자신들이 꽁꽁 숨긴 거짓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를 박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 선과 진리와 의로움의 자녀들은 자연스레 세상 사람들의 박해를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고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보면 아주 당연한 결과이지요. 컴컴한 동굴 속에서 축축하고 더럽게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누군가 빛을 들고 찾아와서 세수를 하고 자신의 옷을 세탁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빛을 받아들이고 세수를 하고 옷을 세탁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저분한 삶에 익숙해진 이들은 그러한 일들이 필요없다고 그냥 예전처럼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겠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빛을 들고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눈을 아프게 한다고 대뜸 화를 낼지도 모르지요.

빛의 자녀에게 박해는 예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세상 곳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의 어둠을 성가시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허락을 할 뿐, 언제라도 자신을 성가시게 하면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시련에도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신앙이라는 것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곤 하지요. 그리고 신앙을 ‘쉰다’고 표현합니다. 착각입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참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면 육신이 쉬거나 정신이 쉴 수는 있어도 신앙을 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런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은 ‘희망’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이 지상에서부터 채워 버린다면 앞으로 다가오게 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지상에서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것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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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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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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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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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하느님을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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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말하지요. 첫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