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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섭한 하느님



어제 모임에서 한 할머니가 자신은 성경을 한 달 만에 다 읽었다고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느님은 참 너무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은 동물들을 희생하고 죽이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할머니는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경을 한 달 만에 읽었다는 표현 속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 할머니가 아니라 다른 분들을 위해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하느님은 절대로 너무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섭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의 생각이 하느님보다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즉, 내가 하느님을 보니 그 꼬락서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지요. 그분의 지혜는 완전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부족할 따름이지요.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자신이 죄가 많고 그것을 뉘우치고 싶고 그 확인을 받고 싶은데 방법을 찾다보니 동물을 비싼 값으로 사서 그 피를 흘려 그들을 죽게 하면서 그것을 지켜보고 스스로의 죄가 없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참된 뉘우침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용서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행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피흘림 없는 제사를 지니게 되었지요. 그것이 바로 미사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제사는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희생됨으로써 그분이 우리 대신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다만 그 피흘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당하고 계십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반드시 피를 흘려야지만 당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르신들도 자녀들이 엇나가면 고통스러우시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가 엇나가는 것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의 고통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자격을 얻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는 저와 함께 성경을 배우세요. 성경을 통독하신 것은 잘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곡해하고 하느님에게 섭섭한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면 문자 그대로 성경을 받아들이려고 하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이비 이단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성경을 이용해서 수많은 이들을 현혹하지요. 그리고 제 나름으로 식견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 자신의 교만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길인지,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 배워야 하지요. 그러니 저와 같이 성경 공부를 시작하세요.”

약간은 엄한 표정으로 위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할머니는 끊임없이 ‘짐짓 자신이 옳은 것을 드러내고자’ 노력하셨지만 그럴 수 없도록 제가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겸손함이 없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성이 하느님의 지성보다 드높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돌같은 심장을 지니게 됩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겸손은 우리를 진정한 지혜로 이끌어주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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