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서 강론을 할 때에 이런 비유를 자주 쓰곤 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한 장님이 있습니다. 거기다 코도 막혀서 냄새도 맡지 못합니다. 그가 더듬더듬 손을 더듬어 물건을 찾다가 뭔가를 발견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그것이 너무나 좋아서 몸에 치덕 치덕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볼 수도 냄새도 맡을 수 없었지요. 헌데 그러다가 번쩍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코의 감각도 돌아오지요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니 자신이 스스로에게 바르고 있던 것이 바로 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 장님의 상태인 사람을 묘사하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리에는 비유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앉아 있었습니다. 술을 진탕 마시는 사람, 아내를 구타하는 사람, 돈 욕심을 내면서 가족들을 무시하는 사람 등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 비유를 들으면서도 올바로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한국에도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적 시선을 회복하지 못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하는 경우는 크게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마다 쉬쉬하고 있겠지요.
사람들은 수치스러움을 압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떠벌리지 않습니다. 만일 어린아이였다면 자신이 하는 일이 수치인지도 모르고 하겠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죄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알고서부터 우리가 하는 일들은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는 가능한 영적 어두움을 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쓰러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 죄를 지을 수 있지요. 하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쓰러지고도 뉘우침이 없다면 그것은 순전히 스스로의 탓이 됩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다시 쓰러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힘이 부족하다면 왜 청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하느님에게 청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께 도와 달라고 하십시오. 하느님은 그 즉시 뛰어와 우리를 안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청하지 않기 때문이며, 우리가 청하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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