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십자가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민수 21,4-9)

조금은 이례적으로 독서 말씀을 모두 인용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쯤 읽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도 똑같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가는 길은 그 자체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전력이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즉 구원의 체험을 간직한 백성이었지요. 수많은 재앙이 이집트 인들에게 펼쳐지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었고 홍해를 건너면서 하느님의 위대한 힘을 체험한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한 모든 것을 ‘잊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평을 쏟아 놓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헌데 그들은 ‘죽겠다’고 난리를 칩니다. 하느님은 광야 생활 동안 필요한 음식을 주었습니다. 헌데 그들은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양식이 ‘진저리’가 난다고 표현합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아니 오히려 성가신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지요.

이에 하느님은 당신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불 뱀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치게 하십니다. 그러자 힘없는 이들은 죽어버리고 그것을 본 이들은 겁에 질려 다시 모세에게 와서 간청을 합니다.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에게 자비를 요청합니다. 이에 모세는 다시 백성을 위해서 하느님에게 간청을 합니다.

이에 하느님은 예표를 만들어 사람들 앞에 보일 것을 지시합니다. 그것은 구리로 만든 불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보는 이는 설령 뱀에 물리더라도 살아났습니다. 즉 하느님은 뱀을 없애신 것이 아닙니다. 뱀에 사람들이 계속 물리게 두셨지만 하느님의 위대한 힘을 떠올리고 당신이 주신 예표를 믿고 바라보는 이는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이 누구이지를 아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세례의 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이들입니다. 어린 시절에 세례를 받은 이들은 그들의 의지를 대신해서 부모가 다짐을 했고 부모는 따라서 어린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투덜대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옛 삶이 그립다고 옛 쾌락들에 목마르다고 그리고 교회에서 제시하는 미사나 성사 따위는 물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를 돌보고 계신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옛날의 죄스런 삶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여러가지 사건으로 드러 내십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세상의 여러가지 재앙들 속에서 사람들은 무력감을 체험합니다. 지진이 났을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열심히 도망을 가 보지만 땅이 흔들리는데 우리가 도망갈 곳은 마땅히 없습니다.

나약함과 죽음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몰려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는 기도를 하고 하느님에게 간청을 드립니다. 재앙을 멈추고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불뱀’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즉 죽음의 독침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물렸을 때에 살아날 수 있는 표징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불뱀의 상징, 즉 죽음의 상징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았을 때에 살아날 수 있는 상징, 즉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힘을 상기하고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을 상기하고 다시 마음을 돌이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십자가가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믿는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이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그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불뱀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물리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물려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을 것입니다. 잠시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모든 것을 잊고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을 잊고 불평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라도 그들이 십자가를 떠올리면 살 수 있을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십자가 마저 잊어버릴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