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악에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존재였지요.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요.
마태오 복음 안에는 수많은 자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제물은 고상한 것이고 거룩한 이들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미사때에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준비되고 거룩하고 소위 ‘교회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바라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우리끼리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비가 필요한 것이지요.
자비는 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죄를 지을 때에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 스스로 온전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이 찾는 것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만 두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느님이 찾는 것은 죄인들입니다. 그들을 불러 다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끼리 모여 고상한 미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죄없는 사람들끼리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초대하는 공동체’이며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감사드리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인들에게 열린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이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사랑’이 최고입니다. 거룩한 자비가 가득한 사랑이 최고입니다.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은 예수님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는 너무나 고상한 척을 떠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거룩한 예물을 바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잊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도 죄인이고 우리 주변에 모인 이들도 죄인입니다. 완벽한 공동체가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용서 받아야 하고 나아가 그 용서를 주변에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아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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