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 (묵시 14,15)
열매는 익어야 딸 수 있고 사람의 영혼도 익어야 추수가 됩니다. 또한 추수할 때에 썩은 열매는 버려지고 이는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 성경은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이용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지요. 하늘 나라 자체를 손에 쥐고 보여줄 수 없으니 이런 저런 비유로써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추수’의 모습은 바로 마지막 종말의 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수확할 때’가 되면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헌데 그 수확은 ‘곡식이 무르익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생각을 가다듬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언제 익을까요? 한 인간이 성숙했다는 표현을 우리는 언제 사용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그의 몸이 성인이 되어 드러나면 그는 성숙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철없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그가 겉으로는 멀쩡하게 제 구실을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면이 전혀 성숙하지 않은 탓이지요.
인간은 다양한 면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영혼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해야 그 영혼이 성장하는 것일까요? 과연 영혼이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몸은 음식을 원하고, 정신은 지식을 원합니다. 영혼은 다름아닌 ‘사랑’을 원하지요. 우리는 사랑에 관해서 민감해져야 하고 사랑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거저 얻어지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얻기 위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지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시련’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은 시련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시련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사랑이 성장할 여지도 없는 셈이지요. 운동을 해야 근육이 자라는 것처럼 사랑도 시련을 통해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나의 자유의지를 단련해서 그것을 표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배우기를 주저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련을 기피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사랑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 둘이 서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저런 시련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고통스럽고 괴로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고 사랑을 키우라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더 끌어 안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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