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누룩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무엇을 말입니까, 주님? 알려 주십시오.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우리의 닫힌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저 당신에게 빵을 챙겨 드리려 한 것 뿐인데, 당신이 누룩 이야기를 하셨으니 당연히 우리로서는 빵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각 아닙니까? 헌데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무엇을 걱정해야 합니까?

당신이 하신 기적들은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그 일들을 떠올리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하마터면 굶주려 죽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이들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헌데 그 일에 다른 어떤 의미가 있었던가요? 남은 빵의 수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 였던가요?

주님 알려 주십시오. 저희는 도무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제자들이 한탄할 만한 말을 대신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 역시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생기고 나면 그것을 들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한탄을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왜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그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지 애원 하면서 기도를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묵묵부답입니다. 아니, 묵묵부답인 것 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 외아드님의 모습만을 보여주지요. 우리는 아무리 눈을 깜빡여 보아도 보이는 거라고는 그분의 십자가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다가오신 그분, 즉 성경이 있지요.

부모의 훈육은 그 뜻을 헤아리지 않으면 그저 나에게 ‘통증’으로 만 다가올 뿐입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고 멀리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올바로 인지할 때에 그 훈육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이야기하신 것은 그 ‘누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누룩처럼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한 경고 였습니다. 그들의 허영과 교만, 그들의 탐욕과 증오와 이기심과 시기심과 같은 것들에 대한 경고 였지요. 그들이 그것을 가진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누룩의 작은 가루가 빵 전체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런 영적 누룩이 깃들이면 우리는 엉뚱한 존재로 부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누룩에만 집중하여 스승의 식사를 걱정하는 순진하고 어리석은 오류를 범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 들으라고 당신이 하신 기적 사화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불러 일으키십니다. 수천명을 먹인 기적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이들을 절대로 굶기지 않는 당신의 자비를 상기시키신 것이지요. 세상 안에 먹을 것은 넘쳐 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넘쳐나는 먹을 것을 서로 나누게 하는 ‘사랑’이지요. 헌데 제자들은 그런 내면의 공부를 걱정하고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몸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공부가 전혀 발전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두려움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는 나머지 영원한 것을 향한 걸음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잠시 날갯짓을 하다가 매번 다시 현세의 걱정으로 돌아오고 말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한숨을 내쉬며 묻습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