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이야기는 예견된 재앙과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 가운데 선택된 노아의 고초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그 ‘노아의 방주’가 실존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과학적인 근거를 찾아 다니곤 하였지요. 그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한 게 아니라 그 일이 물리적으로 정말 있었는지를 따지고 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이야기는 개 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품에 자를 들고 길이를 재는 격이지요. 예술품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인데 그것에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오류가 많다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성경을 그렇게 대합니다. 그리고 ‘맹신’에 빠지거나 ‘불신’에 남게 되지요. 즉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여 피를 먹지 않는다고 하거나 또는 성경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고 그 전체를 부정하는 식입니다.
다시 이야기의 중심으로 돌아와서 인류는 그 자신의 타락상으로 창조주로부터 마련된 재앙을 겪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은 ‘희망’을 남겨 두시고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종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선별해서 골라 담아 그 재앙에서 살아남게 하십니다.
인간의 타락 - 재앙의 시작 - 희망의 준비 - 재앙의 실행
노아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는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은 타락한 존재들을 모두 청소하는 계획을 마련하시고 그 와중에 작은 희망을 남겨 두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면 살아남게 되고 그 밖에 머무르면 재앙에 휩쓸려 죽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방주 안에는 정결한 것만이 아니라 부정한 것도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결한 것은 충분히, 그리고 부정한 것은 최소한 만이 허락 되었지요.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희망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과 교회라는 것을 단순히 그 외적인 범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즉, 주일미사에 나오느냐 아니냐로 갈라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세례의 외적 행위를 실천했느냐 아니냐로 단순화 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노아의 방주로 드러나는 교회는 지상, 천상, 연옥까지 아우르는 아주 방대한 규모입니다. 그 안에서 믿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믿음을 쥐고 있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이 마련하신 방주 안에 들어선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재앙이 닥칠 그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예고된 재앙은 재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크게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기에 그들에게는 마치 재앙이 갑자기 닥쳐오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준비된 이들에게는 그저 때가 되어 치뤄야 할 시험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인지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타락 자체에 둔감한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상당한 중증이지요. 하릴없이 쾌락을 찾아 돌아다니면서도 스스로의 타락상을 인지하지 못하니 중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다가오는 노아라는 존재는 조롱의 대상에 불과하게 되지요. 이렇게나 즐길 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방주나 준비하고 있다니요. 정말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노아의 입장은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신뢰하기 때문이지요. 노아는 신실한 사람이었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맡은 책임을 이행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방주 안에 들일 이들을 선별하기 시작합니다. 노아는 바로 우리 주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구원받는 길을 알려 주었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무시하고 죽여 버렸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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