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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알아보는 이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 6,54-55)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마을의 유지나 권위있는 누군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뚜렸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병든 이들을 그분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그들을 낫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에서 ‘선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뭔가가 진짜배기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주변에 알립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다가오게 하지요. 바로 이것이 ‘선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서 알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당신이 해야 하는 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셨지요. 그것을 전한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행여 거짓말쟁이였다면 이런 움직임은 얼마 가지 않아서 당장에 그쳐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더는 그것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역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고 보다 본질적인 일,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기 시작할 때에는 제자들이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 유지들이나 고관들은 예수님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신들의 인기가 사그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이 기분나빴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적인 치유, 혹은 신기한 일에 집중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충족될 때에는 열심히 따라 다니지만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다들 흩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나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정작 예수님의 수난의 시간에는 예수님을 두고 도망가 버립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탐욕과 명예와 권력을 뒤따르는 이들은 그것의 뒤를 쫓는다고 예수님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행여나 종교적 틀 안에서 그러한 것이 충족될 때에나 겨우 따라오는 시늉을 할 뿐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위선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신자들은 ‘호기심’에, 또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앙을 찾습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관계를 맺으려고 다만 세상의 관계의 성당 버전을 찾을 뿐이지요. 그 밖에도 성당 안에서 얼마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언제라도 떠나는 이들이지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나마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을 따라 다니지만 정작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면 용기를 잃는 이들이지요. 그러나 그분의 본질을 이해한 그들은 수난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모여들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에게 다가오고 있을까요? 다가온다면 무엇을 위해서 다가오는 것일까요?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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