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르 7,35)
그렇다면 그 열린 귀와 풀린 혀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는 우선적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혼란해 할 것입니다.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수많은 사건 사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귀머거리이던 중에 쓰잘데기 없는 정보의 차단으로 조용하던 내면이 마구 들쑤셔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은 그가 절대로 원하지 않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저 듣지 못해서 오는 불편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을테지요.
그의 풀린 혀는 말들을 쏟아낼 것입니다. 이전에는 말하지 못해서 참고 견디던 것이 이제는 풀린 혀를 통해서 쏟아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과 관계를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상처받고 오해를 사고 비난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차라리 말을 하지 못했더라면 잠잠하였을 내면이 말을 통해서 수많은 관계 안에서 어지러움과 혼돈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는 다만 전에 표현하지 못하던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싶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귀는 올바로 잘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의 입은 소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막혀 있던 것을 뚫게 된 그는 자신이 새로이 얻은 귀와 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는 데에 열중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문이 퍼져 나갑니다. 예수님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그리고 다물고 있어야 할 입을 열고 맙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이 차질을 빚게 됩니다. 예수님은 선의로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도와 주셨는데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엉뚱한 일을 하고 맙니다.
우리의 귀와 입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이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귀와 입을 자신의 온갖 교만을 드러내고 죄를 짓는 데에 쓸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소통의 도구를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써야 하고, 또한 이웃과의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에 그것은 대부분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내면에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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