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 8,33)
사탄에게 하느님은 괴로움입니다. 이는 마치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에게 꽃을 선물하는 것과도 같지요. 그는 혐오감에 떨면서 꽃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일이 사탄에게 일어나는 것이지요.
한 인간이 하느님을 전혀 생각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게 될 때에, 그의 업적은 아무리 인간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사탄스러운’ 것이 됩니다. 어쩌면 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성경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봅시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그에 반박을 합니다. 왜 반박을 할까요?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스승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싫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랑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제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왜 말씀하고 계신지에 대한 베드로의 인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의 사랑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휴머니즘’이 아니라 하느님을 배제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표현을 듣는 셈이지요. 바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예수님이 자신을 사탄이라고 부르고 나에게서 물러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표현은 제자들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한 충격 요법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따끔한 훈계 안에 가르침을 담아 주십니다. 즉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때로 우리에게 빛의 천사를 가장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2코린 11,13-15)
그러나 그의 외적 선은 ‘인간적 선’에 그치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하느님을 드높이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내적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인간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인간적인 사랑에 빠진 나머지 하느님의 사랑을 배제시켜 버리고 맙니다. 이런 오류들은 얼마든지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의 눈을 가리워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잘못을 더욱 완전하게 이루도록 하지요. 즉,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하는 일이 ‘정당하다,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하느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세상의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가치를 통해서라도 한 인간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당신보다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이는 당신을 따르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
이 말은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방향성을 올바로 점검하라는 의미이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족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하고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그런 베드로 역시도 다시 본래의 자리에 돌려 놓아 전보다 더한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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