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고해성사



고해성사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죄’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죄, 잘못, 탓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뭔가 올바로 해야 하는 것을 잘못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통상적인 잘못은 법적 잘못, 윤리적 잘못, 도덕적 잘못 등등이 있습니다. 즉 무언가를 기준점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잘못이지요. 그 기준점이 법이면 법적 잘못이 되고, 윤리나 도덕이면 윤리적 잘못과 도덕적 잘못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기준점,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시지요. 사실 하느님이라는 분이 세상 안에 모든 질서를 만드셨기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기준점들과 아예 다른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와 정의와 선에 어긋나는 것은 당연히 하느님에게 어긋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중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 안에 고유한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바로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죄’와 ‘사랑’이 성립되게 됩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한 부속품일 뿐이고 죄도 사랑도 없게 됩니다. 우리의 생 자체가 그닥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고유한 자유가 있고 그리고 그 자유를 부여하신 분의 기준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죄’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가장 넓은 범위의 기준점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폭력은 죄가 될까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럼 폭력을 쓰지 않은 내적 증오는 어떨까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내적 증오에서 외적 행동이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 안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부정적인 방향성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몸이 병이 나면 약이 필요하고 약국에 가거나 병원에 가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병들면 그에 합당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자기 스스로의 어긋남, 자유의 그릇된 사용으로 인해서 병들게 되고 그 병은 당연히 치유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그때에 필요한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머무르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상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이유 자체가 바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당신이 대신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분의 제자들, 사제들은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의 성사(聖事라는 말은 ‘거룩한 일’이라는 뜻입니다)’인 고해성사인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떤 제도가 없이도 인간의 진실한 뉘우침을 보신다면 그를 기꺼이 용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사제도 교회도 없는 곳에 머무르는데 큰 사고를 당해서 죽음의 위험에 있는 중에 정말로 진실되이 뉘우칠 수 있다면 하느님은 기꺼이 그를 용서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상황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뉘우침에 대한 특별한 용서의 드러나는 표지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때에는 사실상 영혼을 통해서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영혼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며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해서 드러나는 외적인 표지가 필요하지요. 이는 마치 친구가 서로를 신뢰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에는 계약서라는 물리적 수단을 작성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세례 때에도 물을 사용하고, 죽은 이를 위한 제사도 눈에 보이는 격식을 통해서 바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도 눈에 드러나는 필요한 표지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사제의 ‘사죄의 말’, 즉 ‘사죄경’인 것이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자신이 솔직하게 고백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분명한 확신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해성사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성사가 됩니다. 미사(성체성사) 다음으로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중한 성사가 되는 것이지요.

댓글 쓰기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인간적 약점을 최우선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그가 지닌 '사제직'이 더럽혀…

[중요] 하느님을 알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말하지요. 첫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

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사제의 여성과의 만남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피치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하다면 여성분들은 가장 적합한 ‘여성 지도자’를 찾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덕망 있는 수녀님이나 본당의 신뢰할 만한 여성 평신도를 추천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피치 못하는 경우라면 열린 공간을 확보하고 가능한 모든 추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면담은 거의 한 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는 ‘바쁨’이 일상화 된 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한 두 번이 끝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예수님을 마주한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과 색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고해소 이외의 환경에서 장기적인 면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케이스는 한 번의 개인 면담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고 장기적으로 한 사제에게 영적인 지도를 받기를 원하는 경우는 늘 이용할 수 있는 고해의 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또는 본당처럼 서로 같은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 찾아온 내담자가 ‘장기면담’을 요청할 때에는 그가 사는 곳 주변에서 합당한 인물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사제는 스스로 ‘분별’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한 분별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고해소 외에 따로 다른 면담을 시도하는 것에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해소 밖을 벗어나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