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가톨릭 사제들은 대표적인 ‘컨텐츠 생산자’ 였습니다. 가톨릭 사제들로 인해서 이루어진 지적 업적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생각할’ 여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글을 쏟아낼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만일 절더러 일반 신자분들과 같은 시간의 노동 환경을 제공하고 이런 저런 글을 쓰라고 한다면 아마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볼리비아에서 선교 사제로 아무리 바빴다고 하지만 그래도 저는 방으로 돌아와 침묵하고 말씀을 성찰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육신을 움직여서 해야 하는 노동은 고되었지만 마음 만은 편안했던 셈이지요.
사제들은 자신들의 그런 보장된 환경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로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얻게 된 그런 좋은 묵상의 여건을 그야말로 묵상을 하는데 써야 하지요. 사제는 끊임없이 묵상하고 성찰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또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일에 바쁘진 않지만 다른 의미로 바빠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에 바빠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단순히 지적인 연구로 다가가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머무르는 이유는 바로 인간에게도 다가서기 위함 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물들면 안되지만 세상과 동떨어져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목적지를 올바로 상기해야 하며 반대로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머물러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균형감각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다가서다가는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버리기 십상이 되고, 또 너무 떨어져 있으면 우리의 본질적인 복음 선포 사명과 상관없이 살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 거리감을 잘 유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리도 부딪혀 보고 저리도 부딪혀 보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하느님에게 올바로 붙어 있는 사람은 이 거리감을 올바로 유지하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니까요. 사제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근본은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에게 관심이 없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모든 문제는 시작이 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