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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찾는 그 답에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의지’가 전혀 섞여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뭔가 변하지 않은 채로 주변이 갑자기 뒤바뀌어 자신이 고민하는 부분을 해소하는 그런 식의 답을 찾고 있지요. 내 자녀의 행동이 이상하고 그것이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는데 어떻게 하면 내 자녀를 뒤바꿔 놓을 수 있을까 하면서 이런 저런 교육법, 심리상담 심지어는 약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녀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본인 스스로를 바라보지는 못하는 것이지요.

뭐든 인터넷으로 찾으면 메뉴얼과 레시피가 있는 시대인지라 사람들은 뭐든 ‘기술 정보’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을 빼는 방법은 그렇게나 많은데 정작 살을 빼는 사람은 없지요. 즉 방법은 넘쳐 흐르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이런 문제는 ‘내면의 자리’에 이르면 더욱 심각해집니다. 외적인 문제는 그야말로 다른 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 구성원을 바꾸어 버리면 되지요. 즉, 우리나라가 싫으면 이민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적인 ‘싫음’, 내적인 ‘기피’는 도망할 곳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은 ‘중독’이라는 것에 빠져들게 됩니다. 내적인 거부감과 공허함을 상쇄하기 위해서 술, 담배, 심지어는 마약, 그리고 미친듯한 여가생활, 과도한 인간관계, 세상 것에 대한 집착과 소유, 그리고 무분별한 정보의 습득과 같은 여러가지 것들에 중독되어 가는 것이지요.

한국이라는 사회, 즉 첨단 기술을 자랑하며 거의 모든 이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이 사회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듯 보이지만, 정반대로 오히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선가 빌려온 지혜로 자신의 SNS를 열심히 꾸미지만 결국 그것은 한 때의 유행에 불과한 문구가 되고 정작 본인은 다시 공허해지고 실제의 삶에서는 또다시 충돌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외부에서 주어져서 우리가 단숨에 뒤바뀔 수 있는 마법과 같은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길’은 존재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우리가 한걸음씩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걷지 않는 다음에는 길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길’을 알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걸어’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는 온갖 길이 저마다 자신을 걸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우겨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즉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걸어야 하지요. 그 길이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떠한 것을 드러내는가에 속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 길이 당장 ‘대학 = 세상적 성공’이라는 구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대학을 나와서 취업조차 하지 못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공식의 신조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지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그 길의 결과를 올바르게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입니다. 왜냐면 아주 어릴 때부터 ‘너는 이래야 한다’고 지침을 주는 다른 이들의 생각에 길들여져 왔으니까요.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 그리고 꾸준히 걸어 나가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지요. 대학을 목표로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 버리고 나면 목표를 상실하는 것은 진정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길은 끊임없이 걸어나갈 수 있는 길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허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참된 길인지 배워 알고 올바로 바라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진리와 선과 사랑과 정의와 온유와 친절과 인내와 겸손과 희망과 믿음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 길을 따라오라고 말이지요. 과연 그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공허를 진정으로 벗어나게 도와줄 그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비록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분별’은 존재합니다. 그 길은 꾸준히 이어지는 길, 즉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참된 가치들이 존재하는 길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들, 그리고 우리를 잠시 흥겹게 했다가 사라져버리는 가치들이 아니라 꾸준하고 영속적인 가치들이 가득한 길이어야 합니다. 그 길의 난이도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길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길이라면 조금 험하더라도 그 길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아무리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쉬운 길이라도 그 길의 마지막이 우리를 낭떠러지로 인도한다면 그 길은 절대로 걸어서는 안되는 길입니다.

이런 분별을 바탕으로 제가 찾은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었습니다. 당신이 먼저 걸어갔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길이지요. 그 길은 세상 안에서는 매력적이지 못한 길이 틀림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기피하는 길이지요. 하지만 그 길의 참된 매력은 길의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최종 목적지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에 합당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길의 매력 때문에 목적지가 뒤바뀌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선택이라는 것은 단순한 선택지에 도장을 찍고 나서는 잊어버리는 선택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선택이며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 나가야 하는 선택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선택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늘 공허한 것들을 추구하는데 입으로 아무리 참된 길을 선택하고 싶다고 우겨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몸은 피둥피둥 살이 쪄 가는데 입으로야 아무리 살을 빼고 싶다고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길을 이미 걷고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 길은 이미 드러나고 있으며, 내가 관심을 두고 신경을 쏟는 것 안에서 그 길은 이미 들러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된 길의 제자가 되던지, 아니면 세상이 내미는 헛된 길의 노예가 되던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이미 우리 삶 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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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헌데 신앙인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다른 관계를 구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상대와의 계약이 파기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다시 그 상대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점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리 필요가 없고 쓸모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력해야 합니다.

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관계, 혹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다가옵니다. 고해사제는 이 관계를 잘 점검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그로 인해서 또다시 그들에게 피로감을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냥 피곤한 관계는 …

속을 들여다보기

로봇에게 센서를 달아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80년대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좋은 센서를 달아준다고 해 보아야 그 수준에 맞는 센서를 다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날 칼라 텔레비전으로 보는 수준의 화면을 인지하는 센서를 가지게 되겠지요.

만일 오늘날 로봇에게 최신의 센서를 달아준다면 그 로봇은 수만가지의 색상을 분별하고 세밀한 모습을 분별하는 센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기술이 그때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분별력의 섬세함이 너무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지요. 예수님은 그가 이미 드러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바탕으로 그의 영혼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영혼을 당신의 영혼으로 바로 바라보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누가 따로 설명을 해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가 집중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사가 드러나게 되고 그의 내면이 분별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인지 선을 흉내내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기본적으로 선하긴 하지만 어떤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지혜를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꺼이 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서 내면이 변해가게 되고 영적인 정밀도도 더해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을 더 쉽게 피하게 되고 반대로 참되고 진실한 요소들은 그 …

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선한 사람은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한 사람은 기본 성정이 선하긴 하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모든 것을 수용하지만 아닌 것에는 과감하게 아니라고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하느님을 따라가면서 '십자가'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래서 그의 내적 영역이 확장되고 넓어지면서 사랑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악한 이도 받아들이는 여유를 지니게 됩니다. 그의 악한 성정과 악한 의도를 알면서도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이기 위해서 그 악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헌데 이 모습이 외부 사람들이 보면 정말 멍청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이 됩니다.

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