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마르코 복음 11장

마르코 복음 11장
(마찬가지로 복음서 펴 놓고 같이 보세요.)

이 장과 뒤이은 12장은 예수님의 여정 중에 '위선자들의 간계'가 가장 돋보이는 장이다.

예수님은 이때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표징적인 사건들을 드러낸다.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성전 상인들을 보란듯이 쫓아내는 듯의 일련의 행위들로써
당신의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신다.
헌데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의 대상 선택의 기준이다.
예수님은 튼튼하게 훈련된 외양이 멋진 종마가 아니라,
그저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볼품없지만 순수한 존재를 찾으신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재주가 너무나도 많고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순하고 때묻지 않은 사람이다.
영적으로 순수한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그토록 애를 쓰는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세상에 쓰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하느님에게는 과한 재주가 필요가 없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건, 아무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이다.

무화과 나무를 향한 저주에 관한 장은 의외로 좀 놀랍다.
하지만 친절하게도 뒤이은 구절에 그 해설이 나오긴 한다.
그럼에도 때가 이르지 않은 무화과 나무를 향해 저주를 내린다는 건
여전히 이해하기 힘이 든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닥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면 추수를 할 준비가 될까?
언제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셔도 된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할까?
사실 그런 때는 없다.
우리의 추수 시기는 미래의 어느 한 점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예수님이 날 찾으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우리의 준비가 '늘' 필요함을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그 때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성전 정화 사건은 성경 안에서 가장 격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이 본격적으로 모의된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때에 우리는 '성전'에 대한 개념을 잘 잡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전 건물에서 상인들을 쫓아냄으로써 예언직을 수행하신 것이다.
실제로 성전은 무엇이고 쫓아내어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성전'은 다름아닌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이고
쫓아내어져야 할 상인들은 우리의 불순한 생각들이다.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것을 기억하는가?
'성전'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아 두어야 할 우리 자신들의 몸인 것이다.
헌데 우리는 이 안에 세상의 온갖 고뇌와 격정을 담아두고 있다.

불과 얼마 전 어느분과 대화를 하면서 이런 말을 들었다.
'신부님은 세상 물정을 모르셔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다, 난 세상 물정을 모른다.
그래서 크게 세상 걱정을 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세상 걱정에 빠져 있었더라면 신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테지.
세상 걱정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이 부분은 이 글을 읽는 '평신도' 여러분이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 '관리'를 하는 것과 그 관리의 문제를 싸안고 '걱정'을 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의 성전의 근본에는 '하느님'을 모셔야 하지,
'돈걱정'을 모시면 안된다.
나에게는 명백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나의 이상인 모양이라서 조금은 안타깝다.
ㅎㅎㅎ

무화과나무는 말랐다.
믿음의 파워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노라고 예수님께서 설명하신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 여기서 나온다.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라고 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루어진단다.
그래서 적지않은 이들이 산을 옮기려고 시도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여러분들...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바라시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감춰둔 어둠의 산은 옮길 수 있다.
분노, 슬픔, 원한, 질투... 이런 마음 속의 히말라야 산들은
당장에라도 옮길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그러길 원치 않을 뿐이다.
예수님은 계속 영적인 여정의 말씀을 하시는데,
철없는 우리들은 '산이나 한 번 옮겨볼까' 생각하며
하느님을 시험할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어 예수님의 권한이 문제가 된다.
'수석 사제', '율법 학자', '원로들'이 와서 묻는다.
이런 단어들은 좀 어렵다.
지금 우리가 자주 접하는 쉬운 분위기로 바꾸면 이런거다.
한 청년이 하느님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당신 사랑의 일을 시작한다.
그때에 '대리구장 신부님들', '신학자 신부님들', '몬시뇰'들이 와서 묻는다.
'무슨 권한으로 이런일을 하는거냐?'라고...

분위기가 느껴지는가?

여기에서 문제는 그들이 정말 이게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이게 궁금한 게 아니라,
그 청년을 거부하고 무너뜨리고 싶은거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답변을 거부하고 도로 '요한의 세례'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다.
그리고 그들은 개개인으로 저마다 답변할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끼리 의논하고는 '모른다'고 일축한다.
이 '요한의 세례'에 대한 질문은 당시 군중들의 최대 관심사로서
권력의 특징을 잘 파악한 예수님은
그들이 군중이 두려운 나머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계셨다.
ㅎㅎㅎ
통쾌하다.
세상의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지혜의 승리이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