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을 찾기
우리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가늠하고자 애를 쓴다.
그리고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다가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하느님은 말도 안되는 걸 요구하신다고 하면서
지레 포기해버리고 만다.
예를 들면 참 좋은 사람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고생만 죽어라 하다가 죽음도 비참하게 끝나버렸다.
우리의 두뇌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야
여기에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의로움을 위해서 기를 쓰고 일을 했는데
얻는 건 도무지 비난과 조롱과 반대 뿐이었다.
왜 그런 거냐고 아무리 계산을 때려봐야
답은 없다.
문제는 그 범위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반드시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충분히 하느님의 생각을 짚어볼 여유가 된다고 착각한다.
복잡한 시계 안의 한 톱니바퀴가
그 시계를 만든 장인의 생각을 짚어 보려는 노력이랄까?
피조물에게 당신의 계획을 읽히면 이미 창조주가 아니다.
그건 우리가 만든 또다른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실 그런 하느님을 믿는 많은 엇나간 신앙인들이 있다.
'하느님은 이러하시다'고 당신의 계획에도 없는 정의를 내리며
하느님의 마음은 넘겨짚으려 하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예수님 역시도 당신이 이 땅에 인간으로 사명을 수행하고 계실 때에
도무지 계산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잠시나마 하느님에게 당신의 계산 결과를 아뢴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달라고" 말이다.
그럼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가장 좋은 처신은 무엇일까?
이 역시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니, 그 이전에 성모님이 모범을 보여주셨다.
아니다, 아주 오래 전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리고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보여주셨다.
그것은 바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이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하기까지 이르게 된 신앙인은 그나마 다행이다.
왜냐면 평소에는 하느님의 뜻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기 자신의 뜻을 이룬다고 정신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그제사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마는,
이미 그런 사람은 애시당초 하느님의 뜻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디부터 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신흥종교에나 빠지곤 한다.
이렇게 추상적으로 말하니 잘 모르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거다.
한 아줌마가 온통 자기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족들도 자신의 위신을 위한 수단이었다.
남편을 닥달해서 승진하게 하고
자녀들을 닥달해서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만 보내려고 했다.
그렇게 돈은 벌어 겉은 번지르르한데,
어느 순간 남편은 암에 걸리고,
자녀들은 엇나가기 시작한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들이 닥치니 도무지 자신의 계산으로는 답이 없는거다.
그래서 그 동안 취미생활처럼 다니던 종교에 관심을 가져봤는데,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라고는 '서로 사랑하세요' 따위의
뜬구름 잡는 소리만 들리게 된다.
그래서 찾은 것이,
'돈 많이 내면 지금의 고통을 없이해 주겠다.'는 신흥종교였다.
결국 이 아줌마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며
다시금 더 확고히 제 뜻을 찾아 다니는 꼴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적어놓고 나니,
어둠의 세력이 얼마나 영악한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인간 의지의 조악한 방향성 속에서
어둠의 영이 활동하기는 너무나도 좋은 환경인 셈이다.
한시바삐 귀를 열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는 너무 젊잔을 빼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영은 그 힘을 뻗쳐
'돌들이 소리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