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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일


그리스도인과 일

일이 생기면 하면 되고
못할 상황이면 안하면 된다. 아니 못하는 거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면 노력하면 되고,
그래도 안되면 안되는거다.

세상 일이라는 건 이런거지,
걱정한다고 해서 일이 더 잘되거나 하진 않는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나머지는 어쩌겠는가...

설령 일이 잘못되었다고 치자,
내가 잃을 것이 무엇인가?
내 위신, 직분, 명성...
이게 허황하다는 건 우리가 늘 가르치는 바가 아닌가?

밥줄? 생명?
나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밥을 굶을 리가 없다는 걸 믿는 바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사실 죽는다는 건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
닥치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내게 닥쳐올 죽음의 고통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있잖은가?

반면 우리가 헌신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구원이다.

사람은 중요도에 따라서 일을 하게 마련인데,
언제나 세상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들을 들이대며 아우성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숨겨져 있다.

수많은 영혼들이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락에 떨어지는데
세상 일이나 걱정하며 있는 책임있는 자들이 있다.
우리가 나가서 한 마디 말을 해 주었더라면
적어도 한 번은 더 생각해 보았을텐데,
그 기회를 갖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나는 영혼들이다.

먼저 나 자신의 내면을 추스리고
세상을 향해 나서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될 것이다.
"아직 못합니다."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다음의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예레미야 1장 7절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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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