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루카 복음의 마지막 강의이다.
'부활'
이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이다.
하지만 이 부활을 객관적으로 조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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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들 한다.
객관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목격자들의 증언' 뿐이다.
그저 빈 무덤이라느니, 시신이 사라졌다니,
하지만 누가 옮겨갔을 수도 있고,
또 그 목격자들의 증언 역시도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세상 사람들로서는 이 모든 게
어리석은 짓에 불과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 이런 의문투성이의 사건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니,
우리의 믿음의 근본은 어긋난 것인가?
이 부활의 신앙에서 핵심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오로지 말로서만 전해지고 있는 이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사물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초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들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맡고...
우리는 이 육체적인 감각으로 우리 주변의 세상을 우리 나름대로 구성해 나간다.
장님에게 이 세상은 시각이 있는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며,
귀머거리에게 느껴지는 세상은 청각이 있는 우리가 느끼는 것과 전혀 다를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감각'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영적 시각'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제6의 감각"이 있기에,
모든 것을 전혀 색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한 꼬마에게는 자기 앞에 놓인 200원이 전부이다.
그래서 그가 살 수 있는 건, 자기가 원하는 것들 가운데 200원이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불만이 가득하다.
하지만 다른 꼬마에게는 자기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아버지가 가진 엄청난 돈이 있다.
이 두 번째 꼬마는 자기가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시작하려 할 때에 아버지가 얼마든지 자신을 도와준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
이 꼬마는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원하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200원을 다른 친구에게 줄 수도 있다.
이 꼬마의 마음은 넉넉하며 평화롭다.
'부활'이라는 사건을 '신앙'이라는 영적 시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사람은,
이러한 어마어마한 바탕을 지니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현세적 '죽음'의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하신 일들을 믿으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현세 안에서 뭔가 좀 미쳐 보인다.
정상적인 루트를 따라가지 않는다.
저건 주면 안되는 건데 주기도 하고,
저건 할 필요가 없는 일인데 하기도 하며,
저건 꼭 해야 하는 일인데 하지 않기도 한다.
자칫 '광인'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게 예수님이 '미친 사람'으로 불렸던 이유다.
예수님에게 하느님 아버지는 현실이었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추구했기에,
그분은 당신이 구축한 지지세력들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십자가상의 죽음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아버지 하느님은,
그에게 '부활'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부활이 단순히 '되살아남'이라고 착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단순히 되살아난 사람은 다시 죽어 버리게 마련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럼 그게 뭐냐고 나에게 묻지도 말아라. 난 그저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 뿐, 그것이 무엇인지는 짐작도 못하고 있다.)
이것이 부활 사건이다.
그저 한 남자가 죽었다가 다시 잠시 깨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 바탕을 바꾸고,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예비하는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부활'을 받아들이고 살아 내어야 한다.
나머지는 다 덤이다.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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