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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


연중 23주 화요일 강론
세상의 바보

오늘 복음의 제1독서에 나오는 말이다.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주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지지 않으려' 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쓰러져도 쓰러지지 않으며
죽어도 죽지 않는다.

헌데 상대가 밟으려는데 왜 기어코 받아치려 하는 것인가?
우리가 낮은자 되면 낮은 자 될수록
용수철이 눌리면 눌릴수록
더 높이 튀어오른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걸까?

'지는 걸 두려워하는 마음'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나 역시도 만만찮게 두려워했고,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은 존재한다.
하지만 더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면,
마땅히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 순간에 덜 소중한 것을 쥐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덜 소중하다고 말만 하고 실제로는 더 소중히 여기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중요하고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주머니의 돈이 중요하고, 현세적인 가치들을 하느님에 앞세운다.

바나나를 까서 껍질을 먹고 알맹이를 버리면 '바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를 당시의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꾼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도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 놀랍기만 하도다.

그저 주일미사나 나가는 것으로
저절로 우리의 구원의 열매가 덜렁덜렁 익으리라고 착각하지는 말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십시오.'라고 한 사도의 말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

구원은 믿음으로 얻어지지만,
그 믿음은 일순간의 마음의 전향으로 이루어지지만,
그런 마음의 전향이 아무런 준비없이도 누구에게나 선물로 주어진다고 착각하진 말자.

하느님을 향해 돌아설 순 있지만,
쉽게 하느님을 향해 돌아선 그만큼 어둠을 향해서도 돌아서기 쉽다.
하지만 하느님을 향해 열심히 열심히 달리는 사람은,
그 뛰어가는 관성 때문에라도 뒤로 돌아서기 힘들게 된다.
돌아서더라도 이미 뛰어온 거리가 있어서 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치닫기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며,
언제라도 하느님에게 다시 돌아서면 전보다 더한 열정으로 새로이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주제가 너무 광범위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원래 문제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무슨 문제로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합당한 분별로 싸움이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고,
상대의 악의가 분명히 보인다면
차라리 져 주도록 노력하자.
우리는 현세의 것들을 모두 잃게 되겠지만,
그는 구원을 잃을 운명에 처해 있는 가련한 영혼이다.
그는 웃겠지만 울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울겠지만 웃게 될 것이다.
이 상호교환의 신비를 언제쯤이면 마음속 깊이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는 세상에서 바보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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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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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