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주시려는 것
우리는 그분의 선물을 짐작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매번 깨닫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늘상 뛰어 넘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예전엔 이런 저런 바램들이 많았다.
좀 더 좋은 환경에 좀 더 좋은 물건들로 내 삶을 도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만족은 존재하지 않았고,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불안감만 더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오히려 반대로 때가 되면 필요한 것들이 늘 존재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얼마까지를 '필요'로 느끼는가 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하루를 빵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의 모든 진미를 먹고도 여전히 다른 음식을 생각하며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세상의 사물들, 세상의 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한계는,
우리의 '필요'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며,
길 가다가 마주치는 걸인에게 하는 적선은 언제나 권유할 만 하다.
물질적인 건 그렇다 치고,
하느님의 진정한 관심사는 '영적인 차원'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려고 준비 중이시다.
피조물의 수준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을 준비중에 있다.
이 말인즉슨, 입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 입양의 수단은 무엇인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고 교적에 등재되어 있으면 '입양'이 종료되는가?
오호호... 천만에.
하느님은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 하늘 나라의 백성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돕는 사람이다.
헌데 그분의 뜻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의 뜻을 '황제의 것을 분배하는 데'에 짜맞추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특정 정당의 정책'에 끼우려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지극히 딱딱한 법률', 즉 죽은 문자에 집어 넣으려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타인의 잘못을 들춰내고 그것을 고발하는 데' 쓰려는 사람,
...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이런 이들을 예수님은 잘 예언해 두셨으니,
'보라 주님이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단순히 교회 이단의 수장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내의 숨겨진 근엄한 세력들을 꾸짖는 말이었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톨릭 교회'를 다니신 것이 아니라,
'유다인'으로서 유다교의 회당에 다니시며 설교를 하셨다.
당시만 해도 바리사이는 교회 '내부의' 스승이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지금 예수님은 오늘날의 하느님의 교회인 '그리스도 교회'에 머무르시며
'성당'과 '교회'를 두루 다니시며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계신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하신다.
성경을 좀 읽었다는 분은 그 '누룩'이 무엇인지 당장에 알 것이다.
당시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는 '빵'걱정을 했다.
제자들도 그때만 해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빵걱정이 우선이었다.
'누룩'을 조심하라.
겉 꾸민 위선과 거짓 경건을 조심하고,
하느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를 갈구하라.
그분의 뜻은 '사랑'이다.
그럼 '사랑'이 뭐하는 건지 찾아야지. ㅎㅎ
이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당신이 주시려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