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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평화'를 찾으세요?


연중 25주 주일 강론

제1독서: 의인에 대한 악인의 생각(평화를 헤치는 악인들의 생각)

시편: 의인들의 진정한 안식처(진정한 평화의 근원)

제2독서: 평화에의 추구(평화에 대한 조언)

복음: 낮은 자 되고, 낮은 자를 받아들이기(평화를 이루는 근원적인 방법)

오늘 복음은 이 '평화'라는 한 주제로 묶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단순히 고요해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료한 상태가 아닌(지금 남북의 휴전관계처럼...)
하느님을 의지하는 이에게서 나오는 '진정한 평화'말입니다.

뭐든 신경에 거슬려하고 반대하려드는 족속들이 있습니다.
평화를 모르는 이들이고
평화로운 이들의 평화를 시기해서 시험하고 빼앗으려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지요.
그들의 평화를 혼탁하게 할 수는 있어도
그 평화가 자신들에게 흘러들어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빈정대기'입니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고
그렇다고 자신의 영적인 안정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바라는 게 너무 많은데도 아닌척 하고
원치도 않으면서 필요한 척을 합니다.
마치 어린애가 친구가 배도 고프지 않으면서
친구가 먹는 걸 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듯이
이런 이들도 주변의 것들에 너무나 쉽게 좌우되고
정작 자신의 내면이 진정 갈구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의 문제는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노래가사로 대변됩니다.
(신해철 노래이죠 ㅎㅎ)

평화를 구하는 이는,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에수님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아이'는 장난꾸러기입니다.
천진함으로 자꾸 사고를 치고 다니지요.
길가에 나가지 말래도 자꾸 나가고,
몸에 해로운 것을 먹지 말래도 자꾸 먹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지요.
평화를 구하는 이는,
주변에 이런 사랑을 내어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고
달라는 사람에게 주는 사람이지요,
우리가 허공에 주먹을 날릴 수는 없는 것처럼
이런 이들에게 맞서는 자는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자입니다.
뭔가를 때리려면 맞을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깔보면 스스로 더 낮은 자리에 가 버리니
싸움이 일어날 시초가 없습니다.

이즈음 해서 '정의로운' 분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어디까지 줘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가진 불필요한 것들은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지만,
누가 작정하고 내 모든 걸 앗으려 들면 그래도 줘야 하는가?
흠...
제 대답은 준비되어 있지만
그걸 아직 발설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면 아직 저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고
함부로 남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건 이런 인터넷 상의 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실제적인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보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가장 완전한 보물로 우리의 영혼 속에 지니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우리 모든 걸 앗아간다고 해도 이것만은 절대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죽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은 우리에게 짊어지기 힘든 짐을 지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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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