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 9장 10장
"관점의 전환"
마르코 복음 9장과 10장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가파른 상승의 단계로서
통칭해서 "관점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두 장을 걸쳐서 드러나는 삶을 통해 제자들의 사고를 바꾸고자 노력하신다.
그 첫 시작점은 거룩한 변모로 유명한 장면.
높은 산에 올라가 일단 한 번 제대로 보여주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격적인 가르침을 시작하기에 앞서
실제로 보여주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이다.
진정한 영광을 보이는 모습으로 목격하였지만,
목격한다고 해서 그것이 마음으로, 삶으로 내려온다고 한다면 큰 착각이다.
엘리야는 이미 다시금 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도무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엘리야는 이 시대에도 온다.
예언자는 온다.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늘 우리 주변에 있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다루고 싶은 대로 그들을 다루어 왔다.
예수님의 변모, 엘리야의 다가옴은
추상적인 어떤 사건, 과거의 어떤 사건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어 예수님은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면서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깨우쳐준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다.
믿는 사람은 기도하게 된다.
이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외쳐봐야 소용없고,
믿지 않으면서 기도하려 애써봐야 헛물 켜는 거다.(그 기도는 곧 그치게 된다.)
이는 마치 사랑한다면서 그와 절대 연락은 안하려는 것과 같다.
그와 어쩔 수 없이 연락은 하면서 내면으로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사랑하면 만나고 싶어지게 되고,
자꾸 만나면 더욱 사랑하게 되는 법이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하지 말 것이며,
믿지도 않으면서 믿음에 따르는 일들을 하려 들지 말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 두번째로 예고된다.
고통을 받는다고 하는데
죽어야 한다 하는데
그러고서야 부활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알아 들었을까?
다음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제자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누가 더 첫째인가를 두고 서로 싸우고 앉았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려면 말째가,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차원을 보다 강한 비유로 가르치신다.
죄를 짓느니 차라리 몸의 지체를 떼어 버리란다.
그 정도로 죄에 대한 경각심, 영적인 차원을 염려하라고 가르치신다.
그 영적인 차원을 유지하는 비결은 '소금'이고,
서로간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그 '소금'은
다름아닌 진정한 사랑이다.
혼인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예수님의 관점의 핵심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혼인을 생각하메 서로가 맺은 계약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계약 이전에 하느님과의 계약을 상기시킨다.
두 사람의 영원의 약속은
두 사람만의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과의 약속이다.
그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수용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이들은 '하느님'을 안다.
그냥 받아들인다.
우리는 확인해야 한다.
두 눈으로 곱씹어보고 증명을 받아내야 한다.
'믿을 건덕지가 있어야' 믿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느님'을 그저 받아들인다.
이어 부자 청년이 나오고,
현세적인 모든 절도를 다 지켰지만,
예수님은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인도하신다.
신앙은 '규율의 준수'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실천'에 있는 법이다.
이 예수님의 사랑은
반드시 자신의 '희생'을 요구한다.
(물론 그것이 늘 재물을 다 환원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부자청년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그 일이
하느님의 은총으로는 모두 가능해진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현세적으로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모두 얻어만나게 된다.
(다만 이 가운데 '돈'이라는 항목은 없다는 걸 주목하자.)
예수님은 3번째로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이어서 바로 예수님의 영광에 왼쪽 오른쪽 자리를 달라며 나서고
그 두 제자들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기분나빠한다.
이 순간까지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
끝으로 예리고의 소경의 구원의 단계이다.
사람들의 질책을 두려워하지 않음 = 믿음
겉옷을 내던져버림, 세상 재물을 두려워하지 않음 = 믿음
이 두 가지 믿음을 드러내고 그는 빛을 받고는
예수님을 따른다.
사람과 재물에서의 자유...
그리고 하느님을 따름.
9장과 10장을 멋지게 마무리하는 좋은 예시이다.
당신에게 '관점의 전환'은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아직도...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남들 위에 서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