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말씀과 하느님
이 두 분의 상관관계를 어떻게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상에 머무는 우리들로서는 이 둘의 상관관계를 올바르게 풀어낼 마땅한 수단이 없어 보입니다. 서로 분리되어 보이지만 하나인 관계, 아마 다음의 비유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의롭고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말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고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말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가 한번 말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한 진실한 사람과 그의 말은 온전히 하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하느님도 온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발설되지 않은 상태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로 계셨던 셈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늘 이 말씀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표현하시는 순간 세상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것은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빛
우리 두 눈에 밝은 빛이 비치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빛은 우리의 두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으로 감지되는 빛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어둠’도 존재하지요. 우리 영혼에 빛과 어둠은 과연 무엇일까요?
진실과 정의, 사랑과 희망, 신앙과 같은 것들은 모두 영적인 ‘빛’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로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모든 창조물은 원래 그 자체로 이런 빛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빛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 뿐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이 영혼의 빛을 올바로 드러낼 수 있지요. 이 빛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근원적인 빛이요 생명을 전혀 받아들이거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한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의 정직성이나 성실성, 그가 지닌 내면의 충만함을 바라보기 이전에 먼저 그의 외모를 바라보지요. 그의 얼굴, 그가 지닌 학력, 재력, 명예와 같은 것을 먼저 따지고 드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고 말지요.
요한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지요.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다가가게 도와주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과 교리교사들은 이러해야 합니다. 절대로 자신이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이게, 생명을 얻게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들이 모두 진지하게 묵상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빛을 거부하는 이들
빛이 왔고 모든 것이 그 빛을 통해서 생겨났음에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고찰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다가온 빛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이기성’과 ‘교만’에서 빛을 거부하는 ‘어둠’, 즉 ‘죄악’이 탄생하는 순간을 몇마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이었지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권한’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권한을 시작점으로 우리가 채워 나가야 하는 것이지 이 권한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새로운 탄생’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혈통’, ‘육욕’, ‘남자의 욕망’을 통해서 육신을 얻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하느님에게서 새로이 나는 이들이 있으니 이는 바로 신앙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혈통이 남아 있는 동안은 그 혈통 안에서 우리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이 혈통이 끝나는 순간에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로 귀속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해하실 분만 이해하십시오.)
사람이 되신 말씀
이 생명이요 빛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물리적인 육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본 이들입니다.
요한의 외침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그분의 육신의 시공간적 순서를 말합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라는 표현은 그분의 내면적 의의,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에 대한 참된 언급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동시에 여러가지를 보는 셈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원래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앞으로도 영원할 분이십니다.
율법과 은총
그분에게서 우리는 ‘은총’을 받습니다. 이제 과거 ‘율법’의 힘은 이 새로운 ‘은총’의 힘으로 대치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규정들과 조약은 이 새로운 생명과 빛 안에서 그 힘을 옭죄이던 힘을 상실하고 우리는 전혀 새로운 계약을 통해서 새로운 율법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보신 분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느님을 보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두 눈으로 드러나는 빛과 그림자로 하느님을 그리려는 시도는 우스운 일입니다. 이는 마치 소리를 그리라는 것과 비슷한 식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시면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위엄을 드러내실 수 있지만 우리가 보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은 아닙니다. 만일 정말 하느님의 털끝이라도 보고 싶다면 창조물에 시선을 돌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창조물들의 위엄을 보고도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신 분이십니다.
이상의 굉장히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설명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고 맙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가나다를 배우는 아이에게 시를 읽고 이해하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니까요.
‘당신은 누구요?’
‘그리스도, 엘리야, 그 예언자’라는 호칭들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온갖 ‘욕구’들이 집합된 표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모든 표현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 또한 뚜렷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때로 우리는 허황된 자기소개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지요. 내가 뭘 잘하고 뭐에 자신이 있고 하는 등등의 헛된 소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더 큰 존재로 인식되고 싶어합니다. 요한 복음의 시작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다가오실 분 앞에 선 우리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우리의 위치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행여 우리 자신이 오실 그분보다 위에 위치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즉,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겸손
요한의 겸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 세례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까지 표현을 합니다. 이런 지극한 겸손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모종의 감화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다가올 주님의 올바른 위치를 각인시켜 주었을 테지요. 우리는 과연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할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제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제사가 단 한 번에 이루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을 매 미사 때마다 제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진정으로 다가서는 이들은 누구나 그 은총의 덕을 입게 됩니다.
그 밖에도 요한의 증언은 반복적으로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이미 자신의 이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자신의 위치는 그저 그분을 알리는 것일 뿐이며, 그분에게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비둘기와 성령
하느님의 은총은 때로 시각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신다는 것이지 비둘기가 곧 성령이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의 형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형상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성령’ 그 자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우리가 행하는 전례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의 핵심적인 내용은 실제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 형상들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루려는 목적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전례를 격식에 맞춰 준비하기 위해서 봉사자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신앙생활을 하려는 가난한 이들을 천시하고 봉헌금을 많이 내면서 현세적인 축복을 기원하는 부자들을 두둔하는 교회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증언자와 실체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즉, ‘증언자’의 말을 듣고 두 제자들은 그 실체를 찾아 나섭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증언자의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증언자는 올바른 증언을 해서 사람들을 실체로 이끌어야 하고, 그리고 길을 찾는 이들은 증언자의 말에만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결국에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을 찾느냐?
이번에는 예수님이 돌아서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을 따라오는 이들이니 당연히 예수님을 찾을 것인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는 과연 진정 무엇을 찾느냐는 것에 대한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무엇을 찾으십니까? 그저 한순간의 마음의 안정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술이나 심리학자를 찾아 가셔야 할 것입니다. 보다 즉각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현세 생활의 개선입니까? 서점에서 처세술 서적을 찾아 보십시오.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진 그러한 책들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본인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찾는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아라
우리는 가지도 않고 아는 듯이 말하기가 일쑤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가 접하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일러 주십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면 신앙생활이 일어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편안하게 제자리에 머물러서 그저 누가 신앙을 던져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은 엄청난 도전이고 투신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의 역량을 쏟아내는 행위이지요. 이는 해보지 않은 이들이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신앙 맛을 보려면 신앙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도전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상처받는 걸 마다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삶의 자리는 현장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탁상공론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여전히 ‘서류’ 논쟁을 하고 있는 교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와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와서 본 이들의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확실한 것입니다. 흔히 ‘선교’를 이야기하면서 ‘메뉴얼’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사람을 공략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하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설득하는 최고의 방법은 본인부터 완벽하게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좋아 죽겠는데 그걸 남에게 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너무 좋으면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고 함께 살고 배우고는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화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필립보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고 초대를 하십니다. 소위 ‘성소’를 직접적으로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부르심이 전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고, 그래서 나타나엘을 만나 앞서의 마찬가지 표현을 하게 됩니다. ‘와서 보시오.’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성소자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소’를 시작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모든 성소자들, 사제 지망생들과 수도자 지망생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은 재원들을 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연 신학교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살게 해 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교회 행정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있는 걸까요?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인도자가 아쉬운 때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만나자 당신이 절대 알 수 없었어야 하는 사실을 이야기해서 나타나엘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즉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던 나타나엘을 보았다고 증언한 것이지요. 때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인간의 정상적인 활동 범위 안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하느님의 전능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그보다 더 위대한 일들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1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순간이 언제일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충분히 지금으로서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2장
여자
예수님은 이 순간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야’라고 낮추어 부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질문에서부터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자녀로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가난한 아들인 예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아들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고운 심성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가진 이 순박한 신앙심과 겸손이 결국 예수님에게서 첫 번째 기적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시간(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간의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가로로 놓고 보지 않고 세로로 놓고 보십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연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알차게 쓸 수 있었다면서 말이지요. 물론 세상 안에는 모든 것을 효율성으로 따집니다. 적은 것을 써서 얼마나 더 많은 소득을 얻느냐가 관건이지요. 하지만 시간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개념의 효율성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충만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충만함의 기준은 세상의 효율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시간을 보내는가 아닌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더러 상품을 생산하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다만 우리 자신이 되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은 당신의 때, 즉 구세주의 때가 아닌 시간을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인이 청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어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단단히 분부를 해 놓지요. 이러한 어머니의 믿음은 분명히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청하면서 의심부터 시작을 합니다. 마치 안 될 걸 알고 청하듯이 청하지요. 하지만 성모님은 반드시 된다고 믿고 청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전능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으며 성모님은 아들을 통해 전해지는 전구가 이루어질 것을 이미 믿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존재가치를 더욱 드높이는 것입니다.
물독
우리는 세례 때에 물을 씁니다. 오늘날 세례때의 물의 의미는 ‘죽음, 정화, 영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당시 물독의 의미는 ‘정화’가 주된 의미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물독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 시키신 것이지요.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죄악의 공포에 얽매인 것들을 상징하는 물독을 이제는 성령의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 항아리로 뒤바꾸신 것이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두려움의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이 화를 내고 저렇게 하면 하느님이 노하신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의미가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입니다.
더 나은 포도주
예수님이 물을 변화시켜 만드신 포도주는 더 나은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을 깨는 더 나은 것,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이렇게 처음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전까지 우리가 알아오고 행해오던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누가 그 가치를 알아줄까요?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삶에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취해 있으면 맛을 알 수 없고, 아무리 새로운 것이 와도 알아채기 힘든 법입니다.
성전 정화
3일만에 짓는 새로운 성전은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육신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오늘날 우리가 미사를 통해서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육신을 확대해서 이해하자면 곧 그분의 몸, 교회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것은 ‘교회’이지 단순한 건축물 내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교회의 각 부분을 차지합니다. 문제는 우리 공동체 내부에, 그리고 우리 개개인 내부에 ‘장사’를 하러 들어온 이들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득입니다. 이들은 하느님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각자 개개인의 이득 때문에 모인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공동체를 결국은 분열시키고 조금씩 무너뜨립니다. 같은 일이 개개인의 내면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영혼이 자리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하느님을 모시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탐욕과 이기심이 자리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과 봉사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런 이들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서 장사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정화 하셨습니다.
비둘기 장수
다른 동물들은 쫓아 내고 환전상의 판은 뒤엎으면서도 비둘기를 파는 이들에게는 말씀만 하십니다. 예수님이 극도의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그 와중에도 비둘기를 파는 이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이 들고와서 가난한 이들에게 판매되던 동물이었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값비싼 동물들을 사서 번제물로 바쳤기 때문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부모도 가난했던지라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에 비둘기를 바쳤습니다.
내면을 읽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람들의 내면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지만 그들을 신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이의 속에 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사람의 겉에 둘러싸인 것을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성당 안에서 껌을 씹는 사람은 성전이나 거룩한 것에 대한 그 어떤 존경심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간단한 예처럼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점점 그 사람의 내면에 든 것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3장
밤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어둠의 시간입니다.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고 이미 바리사이들 사이에서는 예수에 대한 의견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니코데모는 그 공동체에 속한 이들 중의 하나로서 그에게 다가가고는 싶었지만 공개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 공동체가 두려웠던 것이지요.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행하는 것들을 통해서 그분의 진실됨을 알았고 다가서서 진리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전히 외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공공연히 이행하지 못하는 이를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외적인 위신과 명예, 경제적 기반을 신앙 때문에 잃을까 조바심을 내는 사람이지요.
위에서 나지 않으면
사람은 두번 태어난다고 보면 됩니다. 한 번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있는 육신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새로운 탄생입니다. 이 탄생은 위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이 말은 아래로부터도 뭔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간단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잔을 만드는 것을 첫 번째 탄생에 비긴다면 잔에 무엇을 채우는가 하는 것은 두 번째 탄생에 비길 수 있지요.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사는 이상 무언가 담길 잔은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여 담는 셈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위에서 내려오는 것, 즉 성령을 담아내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정확하게는 통치)를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마치 컴퓨터에 마이크와 웹캠을 달아야 시각정보와 음성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이 없어서 뭔가 정보를 받아들일 방법이 없어지는 것과 같지요. 사람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육과 영
우리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육신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 육신을 통해 세상을 체험하게 되지요. 이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기원인 ‘영’에 대해서는 말은 하지만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심지어 일부 무신론적인 과학계는 모든 정신활동은 단지 두뇌의 전기적 활동으로만 치부해 버리고 말지요. 영혼 따위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존재를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영혼이 지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이를 확고히 다지는 셈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입니다.
바람과 같은 영
영, 그 가운데에서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표징들이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는 바람을 그 표징으로 사용합니다. 바람은 부는 그 순간에는 느낄 수 있지만 형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그 바람 안에 나뭇잎이 함께 휘날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성령이 활동하는 사람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지요. 성령은 갖가지 은사로 자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성령의 은사에는 여러가지가 있지요.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악령도 비슷한 일을 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분별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지요.
육적인 이들의 불이해
니코데모로서는 이를 이해조차 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니코데모는 자신의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관찰해 왔지만 보다 심층적인 면을 설명하는 예수님 앞에서는 장님과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상황이지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자가 이런 것조차 알지 못하니 백성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육에서 난 이들은 영의 사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의 사정은 오직 영적인 이들이 이해할 수 있지요.
위에서 난 이들
위에서 난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보고 알게 된 것을 증언합니다. 그것은 확실한 증언이지요. 하지만 육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셈이 됩니다. 간단한 예로 ‘너 자~알 났다’라고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 안에 숨겨진 비꼬는 의미를 이해하지만 컴퓨터에게 그대로 받아쓰기를 시키면 그냥 ‘넌 잘 생긴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되어 버리는 식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면으로 주변의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저 그 껍데기만 보는 셈입니다. 그래서 고급 승용차를 바라고 세상적인 인기를 구하지만 영적인 사람의 눈에는 그 가치의 실제적인 의미가 보이는 셈이지요. 그것은 탐욕과 명예욕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이들에게 그것들은 기쁨의 근원이 되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이
지상의 그 누구도 천상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오직 천상에서 오신 분만이 알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 만으로 천국을 쟁취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힘을 입고 예수님의 길을 걸을 때만이 가능하지요. 이를 모르는 이들이 온갖 규정과 법규로 천국에 가는 길을 정해놓은 뒤에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셈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이들은 그 천상에서 오신 분이 높이 들리워지게 될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시며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을 가르치신 분이지요. 그분이 가리키는 길, 곧 그분 자신이 길인 분을 따라가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사랑하셨다!
하느님은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셔서 우리들이 그 길을 따르게 하셨지요. 당신의 구원 계획은 실로 엄청나고 원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육적인 이들은 그 가치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우리 유한한 존재들을 영원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의 기쁨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눈이 가리워진 우리들은 계속해서 ‘유한한’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빛과 어둠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게 아니라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우리가 하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만 하고 이 힘든 세상을 왜 만드셨는가 싶기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래 계획하신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이 세상은 우리 모두가 계획한 세상이지요. 빛이 왔으나 아무도 빛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둠을 선호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안에는 빛이 없습니다. 온통 어둠 뿐이지요. 빛의 일을 하는 이들을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어지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무언가를 받은 사람은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받습니다. 누군가가 선한 삶을 결심한다면 그 동기가 주어졌기 때문에 받는 셈입니다. 나쁜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을 수 없고, 좋은 것으로부터 나쁜 것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근원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들은 열매를 맺고 있었고 그 열매를 통해서 요한은 그 열매를 전해주는 분을 알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전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분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충만히 부어졌다는 것을 요한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화내거나 시기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합니다. 자신의 사명 자체가 그분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진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들으면 마치 하느님이 아주 나쁜 존재, 즉 심판하고 처벌하는 존재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하느님은 너무 좋은 분이시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에 반할 때에는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에게는 진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빛이 있어야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굴에 수십년을 갖혀 있다가 나오는 사람에게 빛은 눈을 태우는 듯한 최악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원래는 우리의 축복이 되어야 할 것들이 우리에게 진노가 되는 셈이지요. 의로운 사람에게 정의로운 법은 자랑스러움이지만, 악한 사람에게 정의로운 법은 성가심일 뿐입니다.
4장
비교
바리사이들은 누가 더 많은 활동을 하는가에 주목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지요. 그들은 진정 백성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제약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지요. 지극히 계산적이고 지독히 이기적인 시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었다면 누군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더 많이 하느님께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들으면 도리어 기뻐했을 것입니다.
물을 다오
예수님도 목말라 하십니다. 당신의 육신 때문에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영신 때문에도 목말라 하십니다. 하지만 이 대화를 참으로 미묘한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것이 육신적 바램 때문이었는지 영신적 바램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바로 물을 건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안에 품고 있던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캐캐묵은 적대관계였지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리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에서부터 예수님과 여인은 서로 다른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들어 높이려고 하고 여인은 계속 세상의 생각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수’라는 표현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고 계시고 여인은 계속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화는 복음서 내에서 한동안 이어집니다. 사실 이러한 대화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는 식이지요. 우리가 배우는 모든 신앙적인 것들은 언제나 ‘영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줄기차게 그 안에서 ‘현세’를 추구하는 식입니다. 시선을 조금 들어 높이다가 다시 현세를 바라보고, 또 들어 높이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기를 수도없이 반복하지요.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은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십니다. 여인의 남편이라는 카드였습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의 비범함을 깨닫게 하고 생각을 들어높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여인은 예수님의 요구에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실은 엄청난 과거가 숨겨져 있었고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지요. 이에 여인이 놀라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꾸준한 도움을 받아도 개선의 여지가 없을 때에 하느님은 당신이 지니신 비장의 카드를 쓰십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런 저런 큰 사건(큰 병환, 사고, 근친의 죽음 등등)을 계기로 다시 하느님과 영원에로 시선을 돌리고는 하지요.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사실 아직도 교회는 이런 저런 장소들을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요.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뭔가 색다른 기분을 느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숱한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갔다 왔음에도 성인이 되지는 않듯이 그러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작은 활력소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장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과 진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여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신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이지요.
제자들의 당혹
빵을 사러간 제자들이 이제 돌아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여인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리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아무리 자신의 스승님이지만 그런 여인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셈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단절과 선입견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종교의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누군가 그러고 있으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장벽도 없는 셈입니다.
여인의 신앙고백
여인은 아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벌써 신앙을 전하고 다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뭐든 확실해야 그 다음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느껴지는 작은 신뢰감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인의 복음 선포에 사람들은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
음식은 빈 속을 채우고 육신에 활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육신을 위한 빵을 들고 왔음에도 예수님은 그걸 마다한 채로 다른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양식이란 단순히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만이 아닌 셈이지요. 예수님은 신앙이 없는 여인, 하느님을 모르는 이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쳤고 그걸로 충분히 내면의 충만함을 느끼는 셈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걸 이해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곡식과 수확의 비유
곡식은 다 익었고 이제 수확하기만 하면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씨를 뿌려놓은 것도 아니고 이미 앞서 지나간 이들이 모두 씨를 뿌려 놓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추수’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일조차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수확은 커녕 수확 되기조차 거부하는 이들이 있지요. 여전히 세상 것들이 좋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에게 돌아가야 할 자신의 영혼을 온통 세상에 내어맡기고 있는 이들이지요.
여인의 역할
여인은 마을 사람들을 데려오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여인을 통해 에수님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더 불러 들여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직접적인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여인은 그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 뿐입니다. 나머지 일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책임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사람들을 초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고향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미 알던 조건’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언자라도 지혜가 자라는 중인 시절이 있고 사람들은 그 시절에 갇혀 살아가기에 현재를 읽어내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는 많은 부모님에게서 같은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자녀들의 인격은 꾸준히 성장함에도 수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아직 ‘미숙하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이는 또다른 종류의 교만에 불과합니다.
표징과 이적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함에도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 들인 것도, 그리고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모두 ‘표징과 이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서 뭔가 확실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표징과 이적을 통해서 생겨나는 믿음은 훨씬 수준낮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참된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할 만한 이들이 이 세상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인 토마스조차도 같은 상황이었으니까요.
5장
낫고 싶으냐?
38년간 마비되어 있던 남자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고 말이지요. 달리 보면 모욕인 것도 같습니다. 38년이나 그렇게 살아왔는데 세상에 낫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이 질문은 보다 내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 역시도 수십년간 지니고 있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낫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병
진정한 병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육신이 아닙니다. 육신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돌보아야 하는 것이고 때가 되면 자연스레 떠나 보내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은 우리 안에 뿌리깊은 악습입니다. 누군가는 자신 안에 ‘탐욕’을 수십년간 지니고 살고 있고, 또다른 누군가는 자신 안에 ‘증오’를 수십년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낫고 싶어하지 않지요.’ 무엇보다도 그 안에 ‘하느님을 바라는 마음’이 마비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으시는 것입니다. ‘낫고 싶으냐?’고 말이지요.
도와줄 사람
그 병자는 예수님에게 한탄을 합니다. 정말 낫고 싶고 그래서 그 유일한 방법인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려 내려가고 싶은데 아무도 도와 주는 이가 없다고 말이지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있지만 누구 하나 하느님을 올바르게 드러내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으려고 기를 씁니다. 정말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소개해주지 않지요. 심지어는 교회 안의 사람들도 그 방법을 모르고 소개할 줄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일어나 걸어가거라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분은 권능이 있었고 그 권능은 육신에도 작용을 해서 38년을 누워있던 병자를 일으켰습니다. 지금 이 권능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교회에 내려와 있습니다. 사제들은 고해소 안에서 이 권능을 발휘하지요. 사제들은 죄악이라는 오랜 영적 병중에 있던 사람을 단숨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오
38년동안 병중에 있다가 이제사 일어나려는 사람에게 유다인들은 ‘율법’을 들이댑니다. 이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기본적인 사랑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간혹 드러나곤 합니다. 진정한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가서 ‘규정’을 들이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스스로도 기쁨이 없기에 남들의 기쁨도 견뎌내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타인의 즐거움과 행복 앞에서 자신도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병든 이들은 타인의 기쁨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단순히 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던 유다인들에게도 큰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나쁜 일
한 번 영적 병중에 있다가 나은 사람이 다시 죄악에 빠져드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과도한 주일의 강요와 판공성사로 인해서 고해성사를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뉘우침 없이 그저 주일 빠진것을 선고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속을 받으려고 고해소를 찾을 뿐,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 안에 흐르고 있는 방향을 바꿀 의지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질적인 의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그저 외적인 ‘정화예식’을 위해서 고해소를 찾는 셈입니다. 이는 진정한 고해도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예식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때로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용서가 부어지지요.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유혹의 손길은 뻗쳐오게 되고 그들은 마음을 잘 단도리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다시 무너지는 날에는 전보다 더 나쁜 일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박해
예수님이 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38년동안 앓던 이를 살리는 일이었지요. 헌데 그것을 단지 ‘안식일’에 했다는 이유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모습들이 주변에 때로 보입니다. 특히나 전례의 세세한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하려고 한 사람에게 사정없이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는 수많은 ‘어르신’들의 모습은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
예수님에게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느님도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유다인들의 맹렬한 반응 앞에 예수님은 태연하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단순한 말마디 같아 보이지만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셈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모든 일은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
예수님은 아드님이신 당신이 하시는 일은 모조리 아버지에게서 비롯한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바라보시는 것을 그대로 따라 실천할 뿐이지요.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보시고 무엇을 따라하고 계신 것일까요?
아마 반대의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 없이 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생각대로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저마다의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는 사과를 좋아하고 누구는 귤을 좋아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힘있는 자가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통합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긋나는 걸 힘으로 배척해 버리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 누구도 ‘영원’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하지요. 이집트 시절의 복장을 하는 사람이 없고, 로마 제국 시절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을 내다보시고 하느님과 긴밀히 하나되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성적이 얼마인지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남편의 월급이 얼마인지보다 남편이 있고 남편이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각 사람의 보다 내밀한 곳에 있는 ‘영원’을 바라보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일을 하셨지요.
지금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일으킨 것으로 놀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은 그보다 더 막강하고 사람들은 앞으로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죽은 이를 되살릴 권능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을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럼 과연 남은 심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과 용서를 보면서도 그분들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결국 심판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입술로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 생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리고 믿는 만큼 약속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확고히 하는 이에게는 ‘영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날 때
수많은 이들의 영은 어두움에 빠져 있고 기실 죽어 있습니다. 그런 영 가운데 예수님의 진리의 목소리를 듣고 되살아나는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복음화’라는 것, ‘선교’라는 것은 바로 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빠져 있는 영들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단순히 교회 껍데기를 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남미를 보십시오. 남미는 껍데기가 온통 가톨릭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신음과 고통들이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종교가 껍질로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복음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죽은 영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스스로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우리의 ‘의지’를 예수님 앞에, 하느님 앞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같은 의지, 즉 하느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느님의 통치권’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당신에게 뜻을 맡기는 모든 이에게 펼쳐집니다. 그 안에는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왜 다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과 탐욕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은 뗄 수 없는 두 가지입니다. 자기만의 세상 안에 살려고 하니 ‘자신의 것’이 필요해서 자연스레 탐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내면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맡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고 우리의 것을 애써 지킬 이유가 없게 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 맡기는 것일 뿐이고,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기 때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선’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나오는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하느님의 것입니다.
증언
스스로의 증언은 유효하지 못합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나를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 그 자체로 ‘말씀’이시고 ‘진리’이신 분이기에 따로 증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머무는 우리들로서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을만한 누군가의 ‘증언’이 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내세웁니다. 이 땅에서 살아있었던 이들 중에 가장 열정적이었고 헌신적이었던 그를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에게는 더 큰 은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이 직접 하시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사랑의 위업’들이 예수님의 진실성을 증명합니다.
나아가 아버지께서도 직접 증언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그분을 알아볼 능력이 없을 뿐입니다. 마치 고운 가루가 눈이 굵은 체를 그냥 통과해 버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의 증언은 우리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그분의 일,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과 교회가 하는 일도 믿지 못하기에 당연히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 자체도 믿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보지만 성경에서도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그 안에서 증언되는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그분과 연결된 하느님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예수님은 이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을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범위를 충분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고 단지 ‘어리석음’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 셈이지요. 예수님은 죽임당할 준비를 하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이기심은 그 희생제물을 집어 삼키고 말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십니다.
우리를 고소하는 이
예수님은 모세가 우리를 고소하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소위 성경을 기록하고 율법을 전해준 이로 상징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법칙’들을 내세웁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주일 미사를 거르지 말아야 하고, 이런 규칙과 저런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수도없이 말을 하지요. 하지만 도리어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고소하는 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들은 규정과 규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장님이 너무 많은 셈이지요.
6장
군중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군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영원을 찾는 신앙인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무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그 이유나 목적은 예수님이 바라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표징들’을 보아서 따라 다닙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군중’이 많습니다. 이들은 신기한 징표를 보면 호들갑을 떱니다. 그리고는 곧잘 그릇된 가르침에도 빠져들고는 하지요. 우리는 이런 군중을 한편으로 복음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반면, 절대로 그들에게 말려 들어서 그 중의 한 멤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빵’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리고 필립보가 어떻게 대답할지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필립보는 분명 부족한 실재 빵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고 예수님은 그로서 당신이 하실 일의 준비를 갖추실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준비를 하시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추리소설’을 적곤 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숨기고 있던 빵을 꺼내서 나누었다는 식이지요. 예수님을 역사비평학적으로 바라보아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일을 찾으려는 이들이 하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셨고 그분의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우리들의 믿음이지요.
원대한 이상, 초라한 현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헌데 실제로 가진 것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요구되는 것과 우리가 지닌 현실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먼저 보여주고는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제자들에게 군중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셨지요.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서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사항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재확인은 시킨 셈이지요.
자리잡기
먼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리 잡지 않은 이에게는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리 저리 움직여 다니는 이, 즉 최소한의 신뢰도 보여주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리 은총이 넘쳐 흘러도 건네어줄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누구의 말을 믿고 따를 것인지 분명히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감사
예수님께서 하시는 유일한 행위는 감사입니다. 빵을 손에 들고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감사’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경우 우리의 ‘감사’는 이미 가진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새로이 얻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 비록 초라하고 작지만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도 감사할 줄 알 때에 하느님의 은총, 넘쳐 흐르는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감사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도 힘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는 ‘넘쳐흐르게’ 도와줍니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
사람들은 저마다 배불리 먹고도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감사의 소중함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감사를 드리는 이들에게는 넘치도록 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임금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세적 영향력을 분석하고 그분을 세상의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산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아마 산으로 들어가시면서 당신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군중이 얼마나 야속했을는지는 예수님 당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사건
이를 단순히 실제로 일어난 일로만 해석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그닥 얻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기하게도’ 물 위를 걸었을 뿐이고 다른 이들은 그걸 목격하였을 뿐이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먼저 길을 떠나는 제자들
먼저 제자들이 호수로 내려가서 건너편으로 배를 저어 갑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리로 갔는지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먼저 떠났고 예수님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것만을 서술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는 어떻게든 이런 저런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예수님의 현존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생을 지속해 나가고 그 안에서 일을 해 나갑니다. 비록 예수님이 없어 보이더라도 우리는 할 일을 하지요.
큰 바람과 물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게 일기 시작합니다. 큰 바람과 물결이 상징하는 것은 ‘시련과 위기’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마찬가지의 일을 당합니다. 시련과 위기가 닥쳐오지요. 어떤 일이든 그러합니다. 교회의 일 가운데 처음부터 조용히 시작해서 끝까지 조용히 가는 적은 없습니다. 적든 크든 시련이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가옴
그때에 예수님이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물 위를 걸어 오시지요. 만일 예수님이 따로 작은 배를 홀로 저어 왔다면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오십니다. 우리 교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에 예수님은 마찬가지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다가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한 모습에 도리어 두려워하지요. 우리 역시도 위기 가운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반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두려워하곤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 채로 도리어 그분의 기괴한 모습에 겁에 질리는 것이지요. 차라리 바람과 물결만이면 그런 두려움까지는 겪지 않겠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가운데에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더욱 큰 위기로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납니다.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친근하게 제자들을 안심시키지요. 우리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안심을 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요. 헌데 바로 그 때에 배는 이미 가려던 곳에 가 닿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장 큰 위기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위기의 실체가 예수님임을 깨닫고 그분을 감싸 안으려고 하면 우리는 원하던 곳에 이미 가 닿아 있는 교회의 모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
이제 그 유명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난해하겠지만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군중
군중은 바삐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겨우 얻어만난 예수님은 언뜻 속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군중은 아직 소경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 특히 빵의 기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수많은 빵에 감탄했을 뿐이지요.
지금의 교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교회를 외적인 요소들로 찾습니다. 웅장한 건물과 교계제도, 그리고 2000년이라는 뿌리깊은 역사와 같은 것들로 교회를 받아들이지요. 그들은 그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거나 ‘신앙’의 본질을 찾아서 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속상한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이제 예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해 힘쓸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양식은 예수님이 건네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바로 이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요한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이 주시려는 생명의 양식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요.
믿음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어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거침없이 답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이론을 제시합니다. 즉 ‘표징’을 제시하라는 것이지요. 믿을 증거를 내어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구름을 만들던가 산을 옮기던가 우리가 믿을 만한 증거를 내어 보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대로 ‘만나’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과거 조상들이 그들의 먹은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주면 믿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반발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특정 위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바로 세워 주시지요. 사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치유를 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달려가고 어느 성모님이 효험히 있다고 하면 그 성모성지로 달려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루는 분은 그런 성인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의 빵
진정한 표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하늘에서 생명을 주는 빵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먹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이들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결코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계속 다른 표징, 다른 위인을 내세우라고 하면서 그분에게 증명을 요구하지요. 이는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를 보려 하고, 신앙 자체보다는 부수적인 요소들, 성당 사람들, 신심 단체 등등을 보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지요.
운명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마치 그런 사람이 ‘정해져’ 있는 듯한 말투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운명인 셈이지요. 이는 마치 여러갈래 고속도로 가운데 우리가 어디에 차를 얹을 것인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는 고속도로는 그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과 같지요. 믿음은 믿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의지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이들은 아드님이 받아들일 것이고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수근댐
사실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말씀의 본질에 파고들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의 ‘외적인 권위’를 두고 말을 합니다. 그분의 출신 성분을 분석하고 그 가족을 분석하면서 그분의 ‘내적인 권위’를 전혀 존중하거나 이해하지 못하지요.
나는 생명의 빵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수근댐 앞에 다시 한 번 앞서의 설명을 반복하신 다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지금 당신의 권위부터 의심스러운 유다인들에게 이러한 표현은 정말 엉뚱한 것인 셈이었지요. 지금의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표현들과 ‘성체성사’를 견주어보면서 이해를 시도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발언이 주는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아프리카에서 온 어느 꼬마가 ‘우리 부족 사람들은 사람 고기를 먹어요.’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도리어 서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성체성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우리의 소중한 보물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지요. 그리고 가톨릭 신자 내부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받아 모실 뿐 진정한 성체성사의 의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는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셈입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
과연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네, 오늘날 우리는 실제 성체 성사를 통해서 믿음으로 그분의 살과 피를 모십니다. 바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그분의 실체를 모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건 단순히 이렇게 표현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분의 형상만을 모실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지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 추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한 사람을 신뢰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을 내가 필요로 할 때에 얼마든지 요청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그가 목수라면 나는 가구를 만들 때에는 그에게 부탁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가 목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도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 일이 하느님과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한 세상의 창조주로 믿을 때에 우리는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전능과 영원성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보내신 아드님을 믿고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에 우리는 영원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받아모신다’는 것의 의미를 올바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거슬리는 말씀
이번에 논란이 되는 대상은 ‘군중’이나 ‘유대인’이 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선한 업적과 여러가지 일들은 받아 들이지만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먹으라는 표현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그들과 가톨릭의 본질적인 차이는 바로 ‘성체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체성사는 하나의 의식이고 행사일 뿐이고 우리에게 성체성사는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전례이지요.
영과 육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은 육과 영의 가치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육’은 단순히 우리의 ‘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연계된 지상의 사정들을 통틀어 말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쥐고 하는 것들과 그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안락과 쾌락 같은 것을 말하지요. 물론 이러한 것들이 ‘영’을 위해서 봉사한다면 그 본래적인 가치를 회복하지만 영을 제외한 채로 그러한 육적인 것에만 헌신하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은 가치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믿지 않는 자들
예수님은 말하는 대상 가운데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 안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 때문에 여전히 교회에 붙어 있거나 아니면 여전히 많은 다른 이유로 교회에 들어와 있는 이들이지요. 간단한 예로 모든 교리교사들이 하느님에 대한 열정으로 일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제’와 맺는 인연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나누는 친교 때문에, 누군가는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으로 명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교리교사에게 보장되어 있는 여러가지 피정이나 연수의 특권들 때문에 교리교사를 하지요. 그러다가 그 가운데 몇몇은 진정한 신앙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의 기반을 신앙으로 철저히 다지는가 하면 적지 않은 다른 교사들은 외인들보다 더한 냉담자가 되곤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
예수님의 본래적인 가치를 들은 이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 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빵’으로 상징되는 현세적인 가치를 기다렸고 결국 예수님에게서는 그러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우리 이득에 맞는 무언가가 유지될 동안에는 교회에 붙어 있다가 그것이 끝나는 날에는 언제라도 떠나곤 합니다. 신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떠나고, 구역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떠나고, 교회 구성원과 불화가 있다고 떠나고… 이유도 참으로 다양하지요. 하지만 근본 원인은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하느님은 그런 부족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배반을 했지만 다시 뉘우치고 돌아왔고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삐걱거리기가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교회가 그렇게 상처를 지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성질이 난 셈이지요. 자신들의 기준에 도저히 맞지 않는 셈입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굳은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열두 제자 가운데에 유다가 있음을, 그리고 그는 이미 다른 마음을 지니고 있음에도 떠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다는 자신의 악을 더욱 완성해 가는 셈이지요.
악마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을 하십니다. 당신이 뽑은 열둘 가운데 하나는 악마라고 말이지요. 악한 존재를 표현하는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탄, 악마, 어둠의 영 등등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이 표현으로 ‘악마’라는 것은 악을 내면에 가득 품은 인간을 두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바로 이 악마였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예수님과의 시간을 더해 갈수록 이 악을 완성시켜가고 있는 셈이지요. 물론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말입니다. 즉 한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악을 형성하고 완성시켜 나갈 때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그것을 강제해서 선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7장
예수의 형제들
예수님은 유다 지방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당장의 눈앞에 적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의 ‘형제들’이 다가와 예수님에게 유다 지방에 가서 위대하 일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님의 가족, 친척과 고향 이웃들을 통틀어 칭하던 명칭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대지요. 즉 예수님의 일을 세상이 널리 알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조언을 해 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언뜻 우리를 살리려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우리를 향한 애정이 없기에 무엇이 우리를 위해서 정말 좋은 것인지 생각지 않고 그저 추상적인 이유를 생각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귀가 얇은 우리들은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여 시행하게 되고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충고를 청하고 받을 때에는 단순히 그 사람의 경력이나 학식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한 마음과 신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우리에게 충고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귀에 달콤한 말을 찾지만 때로 그런 말들은 우리를 도리어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때
예수님은 ‘때’에 관한 설명을 다시 하십니다. 즉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2장에서 ‘시간’ 항목 참조) 반면 너희에게는 아무 때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너희의 때도 마찬가지로 충만의 때를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는 마땅히 무언가를 해야 할 시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 때가 아직 예수님에게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 ‘너희들’이라고 표현한 이들에게는 그 어느 때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는 것이 거의 완성이 되는 시기이며, ‘너희’로 표현되는 그들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아 무엇을 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시간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안에 어떤 열매를 키우고 있고 어느 시점에 있을까요? 우리는 오로지 세상의 것만을 마음에 품고 키워 나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과연 우리의 내면에는 ‘영원’을 향한 여정의 씨앗이 뿌려져 있고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을까요? 시간을 두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예수님
여기서 ‘세상’은 예수님이 악하다고 비난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 특히 요한 복음에서 세상은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저버린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너희’라는 그룹을 미워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바로 ‘너희’,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바탕으로 그 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남몰래
예수님은 ‘남몰래’ 무언가를 하십니다. 예수의 믿지 않는 형제들이 알지 못하게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신 것이지요. 만일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며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때가 있었고 가장 적절한 때에 그것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성전에 올라갈 때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보란 듯이 무언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의 좋은 것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남몰래’ 해야 하는 경우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고 떳떳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내가 한 것들이 다른 이들의 필요 이상의 주의를 끌어 하느님에게 반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면 차라리 그것을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대외적으로 무조건 좋아 보이는 일이라고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모든 이들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루살렘에 방문하는 것이 모든 유다인들의 정당하고 합당한 행위임에도 예수님은 이를 ‘남몰래’ 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일상 안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때로는 ‘남몰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 있나?
아니나다를까 예수님은 그들이 이렇게 당신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믿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서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더욱 분노를 일으켜 그를 죽여 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의견이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두고 선하다고 하는 사람과 그가 남을 속이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조용히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올라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지식은 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영은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이었지요. 마치 서로 다른 바이올린의 같은 줄 하나를 울리면 다른 바이올린이 ‘공명’하는 것처럼 그분의 가르침은 같은 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의 영혼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려 할 때에 수많은 가르침의 홍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우리의 분별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공명하는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의 영광, 보내신 분의 영광
우리가 전하는 가르침은 반드시 두 가지 방향 가운데 하나를 품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영광’이라는 방향과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이라는 방향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마치 하느님을 전하는 듯이 자신의 영광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이내 식상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들은 진정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유지 시키려고 하기에 가르침에서 점점 세속적인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즉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찾고 그분의 뜻을 전하려는 사람의 말은 메마르지 않습니다. 그는 샘솟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모세의 율법은 옛 것이지만 거기에도 엄연히 생명은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은 그마저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법을 교묘히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듭니다. 이러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을 사랑하게 돕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인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이용해서 도리어 우리의 목적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서 사회복지 법을 만들고서 가난한 이들에게 산더미 같은 문서를 요구해서는 그들을 돕지 않으려는 상태와 같지요.
죽이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에 항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살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죽이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모든 살인,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모든 형태의 살인은 타인을 향한 증오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을 죽일 ‘의도’가 한 사람에게 깃들어 결국 그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지요. 예수님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의도’ 즉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적대심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대심을 가득히 품고도 자신들이 지금껏 실제적으로 행한 것이 없으니 자신들은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올바른 판단
예수님은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예를 통해서 당시의 유대 사람들에게 설명을 시도합니다. 즉, 할례라는 인간이 세운 규정은 얼마든지 주님의 규정인 안식일에 이행하면서 정작 주님이 세운 가장 근본적인 규정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라는 것을 예수님이 안식일에 행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오늘날 말씀을 하셨더라면 오늘날 주일의 규정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한 말씀 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날인데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의무’ 규정에 너무나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주일날 미사를 가지 않고 그 날에 병원에 가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더라면 오늘날 분명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래도 미사를 가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그런 외적인 규정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셈입니다.
어디에서 온 자인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근본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즉 예수님의 출생지와 출신 성분을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는 마치 오늘날 한국에서 누군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려는데 ‘저 사람은 경상도 촌뜨기가 아닌가? 그리고 내놓을만한 학위도 하나 없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자신들보다 뛰어나고 드높은 존재를 찾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영광에 둘러싸인 인물을 찾지요. ‘유명’이나 ‘스타’라는 글자가 앞에 붙은 ‘수도자’나 ‘사제직’을 지닌 분을 선호합니다. ‘주교님’이나 ‘추기경님’ 또는 ‘교황님’이면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러한 모든 일련의 행동 속에는 사람들의 무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내면의 근원과 크기를 향한 무지라고 할 수 있지요. 즉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분별하는 기준들은 모두 세상의 기준들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것을 분별해 낼 능력이 없지요. 아무리 하느님의 사람이라도 해도 겉으로 초라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오늘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귀에 솔깃한 소리를 조금만 하고 세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들어높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이를 가장 필요한 곳에 두실 줄 아는 분입니다. 그리고 설령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분을 당신의 삶으로 드러내어 보이셨고 증명을 하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에게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수많은 이들이 그 예수님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는 이들이 전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구원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야 할 이들은 분명히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외국을 나가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설교를 해야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예수님을 목말라하는 수많은 이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할 일을 미루고 있지요.
머물다가 떠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영원’을 보낼 작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서 보낼 수 있도록 허락된 짧은 시간을 이미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기를 쓰고 세상 것들을 추구합니다. 모으고 쌓고 해서 이 땅에서의 기반을 구축하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의 내면이 공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쌓고 저장해도 그 텅 빈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걸 늘 느끼게 되지요. 그렇지만 이미 눈이 가리워진 우리들은 그러한 공허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세상을 더욱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사도 그 순간의 쾌락 뿐이거늘 그렇게 산 옷을 입고 길에 나섰다가 집에 돌아오면 다음날에는 더 큰 공허로 다시 쇼핑에 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지 못한다.
눈이 없으면 시각적인 정보를 지닌 사물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소리로만 분별하거나 만져서 촉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요. 장님 앞에다가 색맹 검사지를 놓고 그 안에 적힌 숫자를 알아 맞히라고 하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나면 ‘승천’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만 거기에 예수님은 없지요. 승천이라는 의미 자체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떠나고 나면 그분의 신비는 더욱 가중될 것이 분명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논리이지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교리교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교사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프로그램, 교사 연수, 교사 피정에 참여하고 다른 또래의 교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기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교사는 예수님이 전하려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교리교사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로 원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그 교사에게 원하는 이유로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듯이 헛되이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전혀 예수님을 진정으로 목말라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그분이 주시려는 진정한 생명의 샘, 즉 성령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려는 시도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30절, 32절, 44절, 45절) 몇 차례나 잡으려고 하지요. 심지어는 성전 경비병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지요. 과연 단순히 그들이 예수님에게 설득당해서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던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 의문 부호만을 남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의 항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오기는 커녕 도리어 돌아와서 그분이 한 말이 전혀 새롭고 권위있는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핑계로 그들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게 이루지는 못합니다. 율법에 대해 알고 있는 니코데모가 율법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변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길은 지독히도 외로운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예수님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힘없는 이들’이었지요. 하지만 그 사랑은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니코데모의 이 항변도 무색할 뿐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다시 ‘출신지’를 바탕으로 그를 비난합니다. 이러한 식의 비난은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무언가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성분 분석이 들어가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제쳐두고 그의 여러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를 쏟아붓는 일이 빈번하지요.
8장
올리브산
올리브산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피정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제자들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친 영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올리브 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단순히 영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간음한 여자
예수님께서 내려오자마자 마치 준비한 듯이 판이 짜여져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합심해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율법의 준엄한 명령을 핑계로 여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전에 없던 엉뚱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즉, 몸을 굽혀서 땅에 뭔가를 쓰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했지요.
흥분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엉뚱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빨리빨리 진행할 때에 우리는 곧잘 중심 생각을 잃어버리고 눈 앞의 현실에 급급해지게 됩니다. 운전에 열중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을 묵상할 리가 없습니다. 그는 눈 앞에 빠르게 오가는 자동차들을 주시하느라 자신의 열정을 다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 영원한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적’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미사 사이사이에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살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늘 바쁘다고 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 있다고 외쳐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흥분한 군중을 진정 시킵니다. 군중들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자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소위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가져온 자신들의 추악한 의도를 다시 그들에게 돌려 주십니다. 즉 그들은 이 추악한 선택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들어가기를 바랬으나 예수님은 ‘조건’ 하나를 붙여서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신 셈이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갖게 같은 행동을 취하십니다. 즉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언가를 쓰시지요. (알 도리는 없지만 저는 ‘서로 사랑해라.’를 여러번 반복해서 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이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납니다. ‘나이 많은 자들’, 즉 그나마 삶의 지혜가 있는 이들부터 자리를 뜨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군중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군중의 특성은 그러합니다. 흥분해서 소리치고 뭔가 힘을 일으키지만 결국 흩어 놓으면 제각각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들이지요. 허망하고 먼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군중’ 속에 있을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뭔가를 전복하기 위해 애쓰지만 때로는 ‘왜?’라는 의문도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저 단순히 지금 우리가 달리는 것이 ‘옳다’고 다른 이들이 달리는 걸 보고 믿을 뿐이지요. 광장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비둘기떼 가운데에서 날아야 할 이유를 아는 놈은 제일 먼저 나는 놈 뿐입니다. 나머지는 덩달아 따라 날아오르지요. 그리고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여인 만이 남습니다. 그 여인을 단죄하던 자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오직 ‘죄 없는 분’이신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세상의 빛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지요. 태양에서 나와 만물을 비추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여 멀쩡히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드는 빛입니다. 우리의 주님 또한 빛이십니다. 하지만 이 빛은 단순히 우리의 눈을 밝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영을 밝혀주어 우리가 다른 차원의 어둠, 즉 죄악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고 영적 사정을 분간하여 위험 없이, 즉 유혹에 빠지는 일 없이 걸어다니게 만들어 줍니다.
자신에 관한 증언
우리가 늘 증언을 할 때에 제3자를 찾는 이유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은 통상적으로 진실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증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큼 진실하신 분은 다시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말이나 사건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인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다른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들이지요. 예수님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던 분이셨기에 그분의 증언은 유효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이런 저런 일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려 듭니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원하는 것을 취하려니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맡기셨고 당신의 개인적인 욕구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심판
심판은 심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이가 어른 재산분쟁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그런 사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다른 형제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의 내면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만이 그리고 그분이 합당하게 자격을 맡기시는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이 올바로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은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 있느냐?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외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출신의 동네 사람으로만 그를 인식할 뿐 그의 내면에 쏟아부어진 성령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내면에 ‘증오’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나는 간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한동안 하늘만 쳐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간다’는 것으로 통해서 바로 ‘공간’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간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신 셈입니다. 마치 개미들이 종이 위에서 오손도손 모여 있는데 위에서 손가락을 갖다대면 이 손가락이 마치 전에 결코 없던 것이 자신들의 세상에 나타난 것인양 놀라 허겁지겁 도망가는 것처럼 예수님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올 수 없다
자신의 죄 속에서 죽을 운명을 지닌 자들, 즉,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멀기를 선택한 자들은 이미 그분이 진정으로 의도하시는 것, 진정으로 우리들을 이끌고 가실 곳에 대한 일말의 개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증오’를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랑’의 하느님에게 속한 분이시지요. 증오하는 자들은 모두 살인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지금 당장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저 ‘증오’를 마음에 품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증오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면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사랑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서 이를 읽어내셨고 그들의 운명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정해진 운명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합당하게 따르려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증오를 종식시키고 사랑을 열기 시작하게 되어 우리의 삶을 180도 뒤바꿔 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를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믿는 바를 선포하고 전하게 되지요. 그렇게 스스로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리워진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홀로만 품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이름이 널리 퍼지는 진정한 믿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그분과 함께 머무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자녀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 걸음을 모두 지켜보시고 바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보살핌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선인에게는 더 똑바로 힘있게 걸어가게 가르치시고 악인에게는 그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도록 가르치실 뿐이지요.
진리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자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 다리에 줄을 묶어 놓으면 그 말은 자신이 달리지 못하는 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말에게 자신이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키고 나면 원래대로 달리게 되겠지요.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죄에 묶여 있던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풀어헤쳐 영원을 향해 달리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죄의 종
죄를 짓는 자들은 죄의 종이 됩니다. 어둠을 범하는 자들은 그 어둠에 종속되게 됩니다. 반면 진리를 실천하는 자들은 그 진리로 인해 더욱 자유롭게 되지요. 죄를 짓는 자들은 사랑하기를 힘들어합니다. 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지요. 과연 자유라는 것이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죄인들도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스스로는 더욱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요. 마음껏 욕설하고 비방하고 증오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는 동안 더욱 더 참된 행복에서 멀어져 가는 셈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그러한 어두움들이 다시 자신들에게 되돌아와서 공격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요. 참된 자유는 본인의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이고 선을 행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우리는 악을 저지르기 위해서 태어난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종과 아들
결정적으로 종과 아들을 구분짓는 것은 집에서의 행태입니다. 종은 임시적이고 계약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반면 아들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지요. 악인들에게 허락되는 모든 것들은 임시적으로 계약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일해서 벌어서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지탱해 나가야 하지요. 하지만 아들들의 기쁨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내면에서 샘솟는 기쁨을 만끽하고 그 기쁨의 원천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종의 아들은 좋은 주인에 의해 보살핌을 받지만 ‘유산’을 받지는 못합니다. 반면 아들들은 가득한 사랑을 받고 더불어 유산도 받지요. 하느님의 유산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들
여기서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 하느님의 자녀들의 상대편에 맞서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바로 악마를 아버지로 둔 악마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알아들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의 본성이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아무리 엄마가 좋은 뜻으로 다가가도 엄마를 두려워하듯이 거짓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은 진리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보면 증오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짓의 자식이고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계속되는 언쟁
그들은 예수님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의 편에 서 있고 그들은 거짓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허망하게 계속 언쟁을 시도하지만 예수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행여 한 명이라도 진리를 깨닫고 돌아올 자를 위해서 끊임없이 그들의 피곤한 언쟁에 답변을 해 주시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9장
태생 소경
인간의 질병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질병은 우리의 죄의 결과인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너무 과하게 욕심내서 먹지 않았더라면, 잘 절제하고 필요한 것을 취하고 적절히 몸을 돌볼 줄 알았더라면 많은 아픔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비축해 보겠다는 일념 하에 우리의 몸을 함부로 굴리다가 병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벌인 것들을 고스란히 다 써버리고 빚마저 지고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의 결과가 아닌 병들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성인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질병의 일종으로 드러나곤 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류의 고통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중이었지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아픔들도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서의 예시처럼 ‘태생 소경’의 경우이지요. 이러한 경우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병’은 당연히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이 소경에 대해서도 누구의 죄인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못박으십니다.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물론 세상에는 복음의 경우처럼 기적적으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지 않는 태생 소경도 많습니다. 그들은 소경으로 살아가지요. 하지만 그들의 생존 자체가 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지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가 분명히 하느님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실로암(파견된 이)
이 소경은 전에 없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복음 선포자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복음의 이 태생소경의 예시를 통해서 우리의 ‘소경됨’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부터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장 5절)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통해서 상징적인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제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힐 수 밖에 없는 일을 하셔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장님들입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눈을 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간단한 치유(침으로 만든 진흙)를 하신 후에 우리를 ‘파견’ 하십니다. ‘가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태생 소경은 가서 씻고 난 뒤에 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 장님의 상태에 당신의 치유를 하신 다음 우리를 ‘파견’ 하십니다. 미사의 모든 마지막은 ‘파견’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파견을 받아 나가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치유 이후에 잠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일을 할 줄 모릅니다. 파견을 받은 것을 이행할 줄 모르지요.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안식일 논쟁
예수님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가 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 소경을 닥달하고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물었던 것을 다시 묻고 또 묻고 그 어떤 오류가 있는지, 그 어떤 작은 실수라도 있는지 찾아내어 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 일어난 일에 그러한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태생 소경은 일어난 일을 솔직하게 대답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진정한 예언자이심을 고백하지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모에게 가서 묻고 또다시 소경에게 묻고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태생 소경은 마침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 30-33)
하지만 이 진정한 영적인 장님들은 단지 육신의 눈이 멀었을 뿐이던 태생 소경, 지금은 육과 영의 눈이 모두 뜨인 진정한 의인인 태생 소경을 죄인 취급하고 쫓아내어 버립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태생 소경의 신앙고백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태생 소경은 시련을 당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진실성을 변호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무렵 다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을 숨김 없이 드러내시고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로써 우리는 심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되고 보는 이들(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이들, 탐욕스럽고, 명예와 학식을 자랑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교만한 이들은 사실 소경들입니다. 그들은 원래부터의 영적 눈멀음을 더욱 짙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이들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은 눈을 뜨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10장
목자와 양
예수님은 그 지역의 문화 속에 실존하셨던 분이고 자연 그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대표적인 비유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오늘날에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목자를 따르는 순박한 양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단 양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을 떠올려 보아도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목자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진실되고 속임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문으로 드나듭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언제나 곁길로 들어섭니다.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빈 틈을 바라보고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같은 것들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식으로 공공연하게 가르침을 받는 것들은 바로 목자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곁으로 슬쩍 다가와서 이상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따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들을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리고 교회에 대한 불만에 이런 다른 길을 찾아 나서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양
하지만 다른 한 편, 양들은 목자가 누군지를 아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자의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부르면 금새 그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피해 달아납니다. 하지만 양들이 아닌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목자 아닌 이들을 쉽사리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픈 양들이 있습니다. 올바로 듣지 못하고 올바로 걷지 못하는 양들, 엇나가기 시작하는 양들이고 길을 잃는 양들이지요. 우리는 이런 양 무리를 올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양이 아니고, 모두가 건강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들 사이에 침투한 도둑과 강도, 즉 늑대를 쫓을 줄도 알아야 하고, 아픈 양들을 돌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도둑과 강도, 즉 늑대는 쫓아내야 하고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분별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둑과 강도
이어 예수님은 도둑과 강도, 즉 늑대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특징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입니다. 즉 정문을 두고 언제나 다른 문을 이용하여 들어와서 양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서 소곤대며 접근하는 이들,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합니다.
착한 목자
반면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다니는 곳이 곧 문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언제나 크고 바른 문으로 들어오십니다. ‘진리, 정의, 선’의 문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분별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바로 착한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인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삯꾼
여기에서 또다른 무리가 등장합니다. ‘삯꾼’이라 불리는 그들은 삯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삯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평소에는 양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위협이 다가오면 그 앞에서 양들을 지키려 하기는 커녕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에 있지 않은 양
이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강도와 도둑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 밖에 양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만 아무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서 밖에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찾아오게 될 이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양들은 한 목자 아래 한 무리의 양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분명한 약속입니다.
다시 얻는 목숨
스스로 내어놓는 봉헌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렇게 선물 받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남는 것을 하느님 앞에 돌립니다. 그래서 기쁘게 봉헌할 줄 모릅니다. 진정한 봉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목숨은 오직 예수님의 것이고 아무도 함부로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목숨을 스스로 내어 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독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당신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맡겼고 그래서 당신의 이 행위, 즉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는 행위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몰이해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앞에 두고 반으로 갈라집니다. 하지만 둘 다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측은 예수님을 마귀가 들린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다른 한 편은 예수님의 외적 업적만을 두고 그분을 평가하지만 둘 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배척
예수님이 그렇게나 스스로의 신원에 대해서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양의 비유를 말해 줍니다. 목자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 즉 예수님의 양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반면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양떼가 되는 좋은 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뜻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화가 나서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왜 돌을 던지느냐?
누군가가 다른 이를 해치려는 것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나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무언가 예수님에게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난 것인지 말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 자체로 그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그릇된 행동,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도 하지 않았고 모든 좋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그들 마음이 뒤틀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름으로 변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예수님의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마저도 대답해 주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고 불리우기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혀 그릇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애시당초 예수님을 그릇된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분이 하시는 선한 행위나 그분이 하시는 진리의 말이나 올바로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시지요.
요르단 강 건너편
요르단 강 건너편, 그곳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기억이 생생한 곳이지요. 예수님은 옛 친구가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관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도 알아가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요한이 한 말을 떠올리며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11장
라자로
예수님과 아주 절친 사이였던 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였지요. 특히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몸을 팔아 돈을 벌어 생활했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릴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이었지요. 헌데 그 오빠인 라자로가 병을 앓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전해 받고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시지요. 그 병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병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하시지요.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게 되지요.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두고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 자기 앞에 마련된 수난과 죽음이 다가올 때에는 전혀 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시간을 끕니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고 그리고 나서야 돌아갈 준비를 갖추십니다. 사실 라자로의 병이 죽을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라자로의 죽음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낮에 다니는 자
제자들은 유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걱정을 시작합니다. 최근에 겨우 거기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빠져 나왔는데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마치 가솔린을 등에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모양새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고 하시지요. 이는 단순히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빛이 있으면 장애물이 있어도 피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유혹이나 영적 위험이 다가와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빛이 없는 자들, 빛을 잃은 자들, 영적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그들은 오히려 득세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부자이고 학식이 가득하고 유명하고 권력을 쥐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걸어 다니는 자들이고 그래서 곧잘 넘어지고 아파하고 서로 다투는 자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빛을 지닌 자들이고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라자로의 죽음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예수님의 표현을 ‘잠들었다’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죽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죽음 때문에 도리어 기뻐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라자로의 죽음보다도 당신이 하게 될 일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 더 중요하고 기쁜 일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은 기쁨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점의 중심이 되는 자리로 다시 돌아가시고자 하십니다. 즉, 죽을 뻔한 곳으로 다시 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토마스가 동료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말씀과 하느님
이 두 분의 상관관계를 어떻게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상에 머무는 우리들로서는 이 둘의 상관관계를 올바르게 풀어낼 마땅한 수단이 없어 보입니다. 서로 분리되어 보이지만 하나인 관계, 아마 다음의 비유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의롭고 성실하고 진실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말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고 실천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말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가 한번 말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한 진실한 사람과 그의 말은 온전히 하나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하느님도 온전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발설되지 않은 상태로, 표현되지 않은 상태로 계셨던 셈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늘 이 말씀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표현하시는 순간 세상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것은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빛
우리 두 눈에 밝은 빛이 비치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빛은 우리의 두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으로 감지되는 빛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어둠’도 존재하지요. 우리 영혼에 빛과 어둠은 과연 무엇일까요?
진실과 정의, 사랑과 희망, 신앙과 같은 것들은 모두 영적인 ‘빛’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로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모든 창조물은 원래 그 자체로 이런 빛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런 빛들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 뿐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그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이 영혼의 빛을 올바로 드러낼 수 있지요. 이 빛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의 근원적인 빛이요 생명을 전혀 받아들이거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한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의 정직성이나 성실성, 그가 지닌 내면의 충만함을 바라보기 이전에 먼저 그의 외모를 바라보지요. 그의 얼굴, 그가 지닌 학력, 재력, 명예와 같은 것을 먼저 따지고 드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고 말지요.
요한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지요.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다가가게 도와주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과 교리교사들은 이러해야 합니다. 절대로 자신이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증언을 통해서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이게, 생명을 얻게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들이 모두 진지하게 묵상해 보아야 할 주제입니다.
빛을 거부하는 이들
빛이 왔고 모든 것이 그 빛을 통해서 생겨났음에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근원에 대한 올바른 고찰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다가온 빛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이기성’과 ‘교만’에서 빛을 거부하는 ‘어둠’, 즉 ‘죄악’이 탄생하는 순간을 몇마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이었지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권한’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능성’의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권한을 시작점으로 우리가 채워 나가야 하는 것이지 이 권한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
빛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새로운 탄생’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혈통’, ‘육욕’, ‘남자의 욕망’을 통해서 육신을 얻습니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하느님에게서 새로이 나는 이들이 있으니 이는 바로 신앙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혈통이 남아 있는 동안은 그 혈통 안에서 우리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지만 이 혈통이 끝나는 순간에는 오로지 하느님의 자녀로 귀속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해하실 분만 이해하십시오.)
사람이 되신 말씀
이 생명이요 빛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물리적인 육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본 이들입니다.
요한의 외침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그분의 육신의 시공간적 순서를 말합니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라는 표현은 그분의 내면적 의의,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에 대한 참된 언급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동시에 여러가지를 보는 셈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원래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앞으로도 영원할 분이십니다.
율법과 은총
그분에게서 우리는 ‘은총’을 받습니다. 이제 과거 ‘율법’의 힘은 이 새로운 ‘은총’의 힘으로 대치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규정들과 조약은 이 새로운 생명과 빛 안에서 그 힘을 옭죄이던 힘을 상실하고 우리는 전혀 새로운 계약을 통해서 새로운 율법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보신 분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느님을 보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우리의 두 눈으로 드러나는 빛과 그림자로 하느님을 그리려는 시도는 우스운 일입니다. 이는 마치 소리를 그리라는 것과 비슷한 식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시면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위엄을 드러내실 수 있지만 우리가 보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은 아닙니다. 만일 정말 하느님의 털끝이라도 보고 싶다면 창조물에 시선을 돌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창조물들의 위엄을 보고도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신 분이십니다.
이상의 굉장히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설명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고 맙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가나다를 배우는 아이에게 시를 읽고 이해하라는 것과 비슷한 일이니까요.
‘당신은 누구요?’
‘그리스도, 엘리야, 그 예언자’라는 호칭들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온갖 ‘욕구’들이 집합된 표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모든 표현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 또한 뚜렷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때로 우리는 허황된 자기소개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지요. 내가 뭘 잘하고 뭐에 자신이 있고 하는 등등의 헛된 소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더 큰 존재로 인식되고 싶어합니다. 요한 복음의 시작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다가오실 분 앞에 선 우리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우리의 위치를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행여 우리 자신이 오실 그분보다 위에 위치하지 않도록 말이지요. 즉,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겸손
요한의 겸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 세례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까지 표현을 합니다. 이런 지극한 겸손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모종의 감화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다가올 주님의 올바른 위치를 각인시켜 주었을 테지요. 우리는 과연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할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율법에 따라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제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제사가 단 한 번에 이루어졌고 우리는 예수님을 매 미사 때마다 제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진정으로 다가서는 이들은 누구나 그 은총의 덕을 입게 됩니다.
그 밖에도 요한의 증언은 반복적으로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이미 자신의 이전부터 계셨던 분이시고 자신의 위치는 그저 그분을 알리는 것일 뿐이며, 그분에게 성령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비둘기와 성령
하느님의 은총은 때로 시각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신다는 것이지 비둘기가 곧 성령이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의 형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형상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성령’ 그 자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는 우리가 행하는 전례와 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도 똑같이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의 핵심적인 내용은 실제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 형상들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루려는 목적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전례를 격식에 맞춰 준비하기 위해서 봉사자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신앙생활을 하려는 가난한 이들을 천시하고 봉헌금을 많이 내면서 현세적인 축복을 기원하는 부자들을 두둔하는 교회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입니다.
증언자와 실체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하고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즉, ‘증언자’의 말을 듣고 두 제자들은 그 실체를 찾아 나섭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증언자의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실체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증언자는 올바른 증언을 해서 사람들을 실체로 이끌어야 하고, 그리고 길을 찾는 이들은 증언자의 말에만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결국에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지요.
무엇을 찾느냐?
이번에는 예수님이 돌아서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예수님을 따라오는 이들이니 당연히 예수님을 찾을 것인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는 과연 진정 무엇을 찾느냐는 것에 대한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통해서 무엇을 찾으십니까? 그저 한순간의 마음의 안정입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술이나 심리학자를 찾아 가셔야 할 것입니다. 보다 즉각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현세 생활의 개선입니까? 서점에서 처세술 서적을 찾아 보십시오.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진 그러한 책들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본인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찾는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아라
우리는 가지도 않고 아는 듯이 말하기가 일쑤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가 접하지도 않은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일러 주십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면 신앙생활이 일어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편안하게 제자리에 머물러서 그저 누가 신앙을 던져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신앙은 엄청난 도전이고 투신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향해 나의 역량을 쏟아내는 행위이지요. 이는 해보지 않은 이들이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부분입니다. 신앙 맛을 보려면 신앙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도전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상처받는 걸 마다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삶의 자리는 현장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탁상공론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영적인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여전히 ‘서류’ 논쟁을 하고 있는 교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와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와서 본 이들의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오는 확실한 것입니다. 흔히 ‘선교’를 이야기하면서 ‘메뉴얼’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사람을 공략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하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설득하는 최고의 방법은 본인부터 완벽하게 설득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좋아 죽겠는데 그걸 남에게 전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너무 좋으면 가는 곳마다 그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고 함께 살고 배우고는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화이고 그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필립보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고 초대를 하십니다. 소위 ‘성소’를 직접적으로 받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부르심이 전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고, 그래서 나타나엘을 만나 앞서의 마찬가지 표현을 하게 됩니다. ‘와서 보시오.’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성소자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소’를 시작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모든 성소자들, 사제 지망생들과 수도자 지망생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은 재원들을 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연 신학교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살게 해 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교회 행정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있는 걸까요?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인도자가 아쉬운 때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만나자 당신이 절대 알 수 없었어야 하는 사실을 이야기해서 나타나엘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즉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던 나타나엘을 보았다고 증언한 것이지요. 때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인간의 정상적인 활동 범위 안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하느님의 전능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그보다 더 위대한 일들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1장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순간이 언제일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충분히 지금으로서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2장
여자
예수님은 이 순간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자야’라고 낮추어 부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질문에서부터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자녀로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가난한 아들인 예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의 어머니는 일찍부터 아들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고운 심성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가진 이 순박한 신앙심과 겸손이 결국 예수님에게서 첫 번째 기적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시간(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 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간의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가로로 놓고 보지 않고 세로로 놓고 보십니다.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연히 시간을 보내고 나서는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알차게 쓸 수 있었다면서 말이지요. 물론 세상 안에는 모든 것을 효율성으로 따집니다. 적은 것을 써서 얼마나 더 많은 소득을 얻느냐가 관건이지요. 하지만 시간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개념의 효율성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충만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 충만함의 기준은 세상의 효율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시간을 보내는가 아닌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더러 상품을 생산하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다만 우리 자신이 되라고 하셨지요. 예수님의 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은 당신의 때, 즉 구세주의 때가 아닌 시간을 어머니라는 이름의 여인이 청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만 어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단단히 분부를 해 놓지요. 이러한 어머니의 믿음은 분명히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청하면서 의심부터 시작을 합니다. 마치 안 될 걸 알고 청하듯이 청하지요. 하지만 성모님은 반드시 된다고 믿고 청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분이시고 그분의 전능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으며 성모님은 아들을 통해 전해지는 전구가 이루어질 것을 이미 믿음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의 존재가치를 더욱 드높이는 것입니다.
물독
우리는 세례 때에 물을 씁니다. 오늘날 세례때의 물의 의미는 ‘죽음, 정화, 영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당시 물독의 의미는 ‘정화’가 주된 의미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물독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 시키신 것이지요. 포도주는 성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죄악의 공포에 얽매인 것들을 상징하는 물독을 이제는 성령의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 항아리로 뒤바꾸신 것이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에 두려움의 신앙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느님이 화를 내고 저렇게 하면 하느님이 노하신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의미가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입니다.
더 나은 포도주
예수님이 물을 변화시켜 만드신 포도주는 더 나은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모든 것들을 깨는 더 나은 것,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이렇게 처음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전까지 우리가 알아오고 행해오던 그 모든 것보다 더 나은 가치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누가 그 가치를 알아줄까요?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삶에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취해 있으면 맛을 알 수 없고, 아무리 새로운 것이 와도 알아채기 힘든 법입니다.
성전 정화
3일만에 짓는 새로운 성전은 건축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한 육신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오늘날 우리가 미사를 통해서 받아 모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육신을 확대해서 이해하자면 곧 그분의 몸, 교회가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것은 ‘교회’이지 단순한 건축물 내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교회의 각 부분을 차지합니다. 문제는 우리 공동체 내부에, 그리고 우리 개개인 내부에 ‘장사’를 하러 들어온 이들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득입니다. 이들은 하느님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각자 개개인의 이득 때문에 모인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공동체를 결국은 분열시키고 조금씩 무너뜨립니다. 같은 일이 개개인의 내면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영혼이 자리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하느님을 모시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탐욕과 이기심이 자리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사랑과 봉사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이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런 이들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서 장사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를 정화 하셨습니다.
비둘기 장수
다른 동물들은 쫓아 내고 환전상의 판은 뒤엎으면서도 비둘기를 파는 이들에게는 말씀만 하십니다. 예수님이 극도의 분노로 이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그 와중에도 비둘기를 파는 이들을 보살피셨습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이 들고와서 가난한 이들에게 판매되던 동물이었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값비싼 동물들을 사서 번제물로 바쳤기 때문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부모도 가난했던지라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에 비둘기를 바쳤습니다.
내면을 읽는 예수님
예수님은 사람들의 내면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 들었지만 그들을 신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이의 속에 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사람의 겉에 둘러싸인 것을 눈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성당 안에서 껌을 씹는 사람은 성전이나 거룩한 것에 대한 그 어떤 존경심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간단한 예처럼 우리는 여러가지 면에서 점점 그 사람의 내면에 든 것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3장
밤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어둠의 시간입니다.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였고 이미 바리사이들 사이에서는 예수에 대한 의견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니코데모는 그 공동체에 속한 이들 중의 하나로서 그에게 다가가고는 싶었지만 공개적으로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 공동체가 두려웠던 것이지요.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행하는 것들을 통해서 그분의 진실됨을 알았고 다가서서 진리를 배우고 싶었지만 여전히 외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공공연히 이행하지 못하는 이를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외적인 위신과 명예, 경제적 기반을 신앙 때문에 잃을까 조바심을 내는 사람이지요.
위에서 나지 않으면
사람은 두번 태어난다고 보면 됩니다. 한 번은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있는 육신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새로운 탄생입니다. 이 탄생은 위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이 말은 아래로부터도 뭔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간단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잔을 만드는 것을 첫 번째 탄생에 비긴다면 잔에 무엇을 채우는가 하는 것은 두 번째 탄생에 비길 수 있지요.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사는 이상 무언가 담길 잔은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여 담는 셈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위에서 내려오는 것, 즉 성령을 담아내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정확하게는 통치)를 볼 수가 없게 됩니다. 마치 컴퓨터에 마이크와 웹캠을 달아야 시각정보와 음성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그런 것이 없어서 뭔가 정보를 받아들일 방법이 없어지는 것과 같지요. 사람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육과 영
우리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육신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 육신을 통해 세상을 체험하게 되지요. 이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기원인 ‘영’에 대해서는 말은 하지만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심지어 일부 무신론적인 과학계는 모든 정신활동은 단지 두뇌의 전기적 활동으로만 치부해 버리고 말지요. 영혼 따위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존재를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 영혼이 지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이를 확고히 다지는 셈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난 것은 영입니다.
바람과 같은 영
영, 그 가운데에서 ‘성령’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표징들이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는 바람을 그 표징으로 사용합니다. 바람은 부는 그 순간에는 느낄 수 있지만 형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그 바람 안에 나뭇잎이 함께 휘날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성령이 활동하는 사람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지요. 성령은 갖가지 은사로 자신을 드러내곤 합니다. 성령의 은사에는 여러가지가 있지요.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악령도 비슷한 일을 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분별하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지요.
육적인 이들의 불이해
니코데모로서는 이를 이해조차 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니코데모는 자신의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은 관찰해 왔지만 보다 심층적인 면을 설명하는 예수님 앞에서는 장님과 귀머거리가 되어버린 상황이지요. 이스라엘의 스승이라는 자가 이런 것조차 알지 못하니 백성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육에서 난 이들은 영의 사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의 사정은 오직 영적인 이들이 이해할 수 있지요.
위에서 난 이들
위에서 난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보고 알게 된 것을 증언합니다. 그것은 확실한 증언이지요. 하지만 육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셈이 됩니다. 간단한 예로 ‘너 자~알 났다’라고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 안에 숨겨진 비꼬는 의미를 이해하지만 컴퓨터에게 그대로 받아쓰기를 시키면 그냥 ‘넌 잘 생긴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되어 버리는 식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면으로 주변의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저 그 껍데기만 보는 셈입니다. 그래서 고급 승용차를 바라고 세상적인 인기를 구하지만 영적인 사람의 눈에는 그 가치의 실제적인 의미가 보이는 셈이지요. 그것은 탐욕과 명예욕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이들에게 그것들은 기쁨의 근원이 되지요.
하늘에서 내려온 이
지상의 그 누구도 천상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오직 천상에서 오신 분만이 알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 만으로 천국을 쟁취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의 힘을 입고 예수님의 길을 걸을 때만이 가능하지요. 이를 모르는 이들이 온갖 규정과 법규로 천국에 가는 길을 정해놓은 뒤에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셈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모든 이들은 그 천상에서 오신 분이 높이 들리워지게 될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이시며 우리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사랑을 가르치신 분이지요. 그분이 가리키는 길, 곧 그분 자신이 길인 분을 따라가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사랑하셨다!
하느님은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셔서 우리들이 그 길을 따르게 하셨지요. 당신의 구원 계획은 실로 엄청나고 원대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육적인 이들은 그 가치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우리 유한한 존재들을 영원으로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의 기쁨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눈이 가리워진 우리들은 계속해서 ‘유한한’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빛과 어둠
하느님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게 아니라 살리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우리가 하는 행위들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만 하고 이 힘든 세상을 왜 만드셨는가 싶기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래 계획하신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이 세상은 우리 모두가 계획한 세상이지요. 빛이 왔으나 아무도 빛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어둠을 선호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안에는 빛이 없습니다. 온통 어둠 뿐이지요. 빛의 일을 하는 이들을 빛을 향해 나아갑니다.
주어지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무언가를 받은 사람은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받습니다. 누군가가 선한 삶을 결심한다면 그 동기가 주어졌기 때문에 받는 셈입니다. 나쁜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받을 수 없고, 좋은 것으로부터 나쁜 것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근원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들은 열매를 맺고 있었고 그 열매를 통해서 요한은 그 열매를 전해주는 분을 알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전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분에게는 하느님의 영이 충만히 부어졌다는 것을 요한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화내거나 시기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합니다. 자신의 사명 자체가 그분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진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들으면 마치 하느님이 아주 나쁜 존재, 즉 심판하고 처벌하는 존재로 들립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하느님은 너무 좋은 분이시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에 반할 때에는 그분의 선하심이 우리에게는 진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빛이 있어야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굴에 수십년을 갖혀 있다가 나오는 사람에게 빛은 눈을 태우는 듯한 최악의 고통이 될 것입니다. 원래는 우리의 축복이 되어야 할 것들이 우리에게 진노가 되는 셈이지요. 의로운 사람에게 정의로운 법은 자랑스러움이지만, 악한 사람에게 정의로운 법은 성가심일 뿐입니다.
4장
비교
바리사이들은 누가 더 많은 활동을 하는가에 주목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지요. 그들은 진정 백성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제약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지요. 지극히 계산적이고 지독히 이기적인 시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었다면 누군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더 많이 하느님께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들으면 도리어 기뻐했을 것입니다.
물을 다오
예수님도 목말라 하십니다. 당신의 육신 때문에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영신 때문에도 목말라 하십니다. 하지만 이 대화를 참으로 미묘한 변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것이 육신적 바램 때문이었는지 영신적 바램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바로 물을 건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안에 품고 있던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캐캐묵은 적대관계였지요.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리
이어지는 예수님의 대답에서부터 예수님과 여인은 서로 다른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들어 높이려고 하고 여인은 계속 세상의 생각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수’라는 표현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고 계시고 여인은 계속 실제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분리된 대화는 복음서 내에서 한동안 이어집니다. 사실 이러한 대화들이 오늘날에도 존재합니다. 마치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는 식이지요. 우리가 배우는 모든 신앙적인 것들은 언제나 ‘영원’을 가리키는데 우리는 줄기차게 그 안에서 ‘현세’를 추구하는 식입니다. 시선을 조금 들어 높이다가 다시 현세를 바라보고, 또 들어 높이다가 다시 돌아오고 하기를 수도없이 반복하지요.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은 결국 비장의 카드를 꺼내십니다. 여인의 남편이라는 카드였습니다. 여인으로 하여금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의 비범함을 깨닫게 하고 생각을 들어높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여인은 예수님의 요구에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실은 엄청난 과거가 숨겨져 있었고 예수님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지요. 이에 여인이 놀라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꾸준한 도움을 받아도 개선의 여지가 없을 때에 하느님은 당신이 지니신 비장의 카드를 쓰십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런 저런 큰 사건(큰 병환, 사고, 근친의 죽음 등등)을 계기로 다시 하느님과 영원에로 시선을 돌리고는 하지요.
영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
사실 아직도 교회는 이런 저런 장소들을 중요시 여깁니다. 우리가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요.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에 가서 뭔가 색다른 기분을 느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숱한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갔다 왔음에도 성인이 되지는 않듯이 그러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작은 활력소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장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과 진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여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신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이지요.
제자들의 당혹
빵을 사러간 제자들이 이제 돌아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여인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리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아무리 자신의 스승님이지만 그런 여인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셈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단절과 선입견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 종교의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누군가 그러고 있으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장벽도 없는 셈입니다.
여인의 신앙고백
여인은 아직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벌써 신앙을 전하고 다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뭐든 확실해야 그 다음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느껴지는 작은 신뢰감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여인의 복음 선포에 사람들은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
음식은 빈 속을 채우고 육신에 활력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육신을 위한 빵을 들고 왔음에도 예수님은 그걸 마다한 채로 다른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양식이란 단순히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만이 아닌 셈이지요. 예수님은 신앙이 없는 여인, 하느님을 모르는 이에게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쳤고 그걸로 충분히 내면의 충만함을 느끼는 셈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걸 이해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곡식과 수확의 비유
곡식은 다 익었고 이제 수확하기만 하면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씨를 뿌려놓은 것도 아니고 이미 앞서 지나간 이들이 모두 씨를 뿌려 놓았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추수’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일조차 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수확은 커녕 수확 되기조차 거부하는 이들이 있지요. 여전히 세상 것들이 좋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에게 돌아가야 할 자신의 영혼을 온통 세상에 내어맡기고 있는 이들이지요.
여인의 역할
여인은 마을 사람들을 데려오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여인을 통해 에수님에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다른 이들을 더 불러 들여 더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직접적인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여인은 그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 뿐입니다. 나머지 일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책임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사람들을 초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예수님께서 알아서 다 하십니다.
고향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이미 알던 조건’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언자라도 지혜가 자라는 중인 시절이 있고 사람들은 그 시절에 갇혀 살아가기에 현재를 읽어내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는 많은 부모님에게서 같은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자신의 자녀들의 인격은 꾸준히 성장함에도 수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아직 ‘미숙하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이는 또다른 종류의 교만에 불과합니다.
표징과 이적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함에도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 들인 것도, 그리고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모두 ‘표징과 이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서 뭔가 확실한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표징과 이적을 통해서 생겨나는 믿음은 훨씬 수준낮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참된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할 만한 이들이 이 세상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인 토마스조차도 같은 상황이었으니까요.
5장
낫고 싶으냐?
38년간 마비되어 있던 남자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고 말이지요. 달리 보면 모욕인 것도 같습니다. 38년이나 그렇게 살아왔는데 세상에 낫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이 질문은 보다 내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 역시도 수십년간 지니고 있는 고질적인 질병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낫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병
진정한 병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육신이 아닙니다. 육신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돌보아야 하는 것이고 때가 되면 자연스레 떠나 보내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은 우리 안에 뿌리깊은 악습입니다. 누군가는 자신 안에 ‘탐욕’을 수십년간 지니고 살고 있고, 또다른 누군가는 자신 안에 ‘증오’를 수십년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낫고 싶어하지 않지요.’ 무엇보다도 그 안에 ‘하느님을 바라는 마음’이 마비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으시는 것입니다. ‘낫고 싶으냐?’고 말이지요.
도와줄 사람
그 병자는 예수님에게 한탄을 합니다. 정말 낫고 싶고 그래서 그 유일한 방법인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려 내려가고 싶은데 아무도 도와 주는 이가 없다고 말이지요. 사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찾고 있지만 누구 하나 하느님을 올바르게 드러내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으려고 기를 씁니다. 정말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소개해주지 않지요. 심지어는 교회 안의 사람들도 그 방법을 모르고 소개할 줄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일어나 걸어가거라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분은 권능이 있었고 그 권능은 육신에도 작용을 해서 38년을 누워있던 병자를 일으켰습니다. 지금 이 권능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교회에 내려와 있습니다. 사제들은 고해소 안에서 이 권능을 발휘하지요. 사제들은 죄악이라는 오랜 영적 병중에 있던 사람을 단숨에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오
38년동안 병중에 있다가 이제사 일어나려는 사람에게 유다인들은 ‘율법’을 들이댑니다. 이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기본적인 사랑도 없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서 간혹 드러나곤 합니다. 진정한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가서 ‘규정’을 들이대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스스로도 기쁨이 없기에 남들의 기쁨도 견뎌내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타인의 즐거움과 행복 앞에서 자신도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병든 이들은 타인의 기쁨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예수님은 사실 단순히 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기 있던 유다인들에게도 큰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 나쁜 일
한 번 영적 병중에 있다가 나은 사람이 다시 죄악에 빠져드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과도한 주일의 강요와 판공성사로 인해서 고해성사를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뉘우침 없이 그저 주일 빠진것을 선고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속을 받으려고 고해소를 찾을 뿐,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 안에 흐르고 있는 방향을 바꿀 의지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질적인 의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그저 외적인 ‘정화예식’을 위해서 고해소를 찾는 셈입니다. 이는 진정한 고해도 아니고 사람을 살리는 예식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때로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용서가 부어지지요.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유혹의 손길은 뻗쳐오게 되고 그들은 마음을 잘 단도리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다시 무너지는 날에는 전보다 더 나쁜 일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박해
예수님이 한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38년동안 앓던 이를 살리는 일이었지요. 헌데 그것을 단지 ‘안식일’에 했다는 이유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모습들이 주변에 때로 보입니다. 특히나 전례의 세세한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하려고 한 사람에게 사정없이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는 수많은 ‘어르신’들의 모습은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
예수님에게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느님도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유다인들의 맹렬한 반응 앞에 예수님은 태연하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단순한 말마디 같아 보이지만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셈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 모든 일은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
예수님은 아드님이신 당신이 하시는 일은 모조리 아버지에게서 비롯한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바라보시는 것을 그대로 따라 실천할 뿐이지요. 우리는 이 부분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보시고 무엇을 따라하고 계신 것일까요?
아마 반대의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 없이 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생각대로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저마다의 기준이 있습니다. 누구는 사과를 좋아하고 누구는 귤을 좋아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힘있는 자가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통합해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어긋나는 걸 힘으로 배척해 버리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 누구도 ‘영원’한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하지요. 이집트 시절의 복장을 하는 사람이 없고, 로마 제국 시절의 법도를 따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을 내다보시고 하느님과 긴밀히 하나되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영원’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성적이 얼마인지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남편의 월급이 얼마인지보다 남편이 있고 남편이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각 사람의 보다 내밀한 곳에 있는 ‘영원’을 바라보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일을 하셨지요.
지금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일으킨 것으로 놀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권능은 그보다 더 막강하고 사람들은 앞으로 놀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은 죽은 이를 되살릴 권능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누구도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권능을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은 ‘용서’하십니다. 그럼 과연 남은 심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 심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과 용서를 보면서도 그분들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결국 심판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받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입술로 그분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 생의 헌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리고 믿는 만큼 약속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확고히 하는 이에게는 ‘영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살아날 때
수많은 이들의 영은 어두움에 빠져 있고 기실 죽어 있습니다. 그런 영 가운데 예수님의 진리의 목소리를 듣고 되살아나는 영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복음화’라는 것, ‘선교’라는 것은 바로 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빠져 있는 영들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단순히 교회 껍데기를 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남미를 보십시오. 남미는 껍데기가 온통 가톨릭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신음과 고통들이 난무하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종교가 껍질로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복음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죽은 영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스스로 할 수 없다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우리의 ‘의지’를 예수님 앞에, 하느님 앞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같은 의지, 즉 하느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느님의 통치권’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당신에게 뜻을 맡기는 모든 이에게 펼쳐집니다. 그 안에는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왜 다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심과 탐욕 때문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은 뗄 수 없는 두 가지입니다. 자기만의 세상 안에 살려고 하니 ‘자신의 것’이 필요해서 자연스레 탐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내면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맡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고 우리의 것을 애써 지킬 이유가 없게 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 맡기는 것일 뿐이고,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치 않으시기 때문일 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선’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나오는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하느님의 것입니다.
증언
스스로의 증언은 유효하지 못합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나를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 그 자체로 ‘말씀’이시고 ‘진리’이신 분이기에 따로 증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머무는 우리들로서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을만한 누군가의 ‘증언’이 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내세웁니다. 이 땅에서 살아있었던 이들 중에 가장 열정적이었고 헌신적이었던 그를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님에게는 더 큰 은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이 직접 하시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사랑의 위업’들이 예수님의 진실성을 증명합니다.
나아가 아버지께서도 직접 증언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그분을 알아볼 능력이 없을 뿐입니다. 마치 고운 가루가 눈이 굵은 체를 그냥 통과해 버리듯이 하느님의 은총의 증언은 우리에게는 전혀 느껴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그분의 일,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과 교회가 하는 일도 믿지 못하기에 당연히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 자체도 믿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보지만 성경에서도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에 그 안에서 증언되는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그분과 연결된 하느님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예수님은 이 모든 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놓을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의 범위를 충분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고 단지 ‘어리석음’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 셈이지요. 예수님은 죽임당할 준비를 하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이기심은 그 희생제물을 집어 삼키고 말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십니다.
우리를 고소하는 이
예수님은 모세가 우리를 고소하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소위 성경을 기록하고 율법을 전해준 이로 상징되는 인물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법칙’들을 내세웁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주일 미사를 거르지 말아야 하고, 이런 규칙과 저런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수도없이 말을 하지요. 하지만 도리어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고소하는 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써야 할 것들은 규정과 규칙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장님이 너무 많은 셈이지요.
6장
군중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군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영원을 찾는 신앙인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세상 사람들의 무리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그 이유나 목적은 예수님이 바라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표징들’을 보아서 따라 다닙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군중’이 많습니다. 이들은 신기한 징표를 보면 호들갑을 떱니다. 그리고는 곧잘 그릇된 가르침에도 빠져들고는 하지요. 우리는 이런 군중을 한편으로 복음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반면, 절대로 그들에게 말려 들어서 그 중의 한 멤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빵’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리고 필립보가 어떻게 대답할지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필립보는 분명 부족한 실재 빵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고 예수님은 그로서 당신이 하실 일의 준비를 갖추실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준비를 하시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추리소설’을 적곤 합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숨기고 있던 빵을 꺼내서 나누었다는 식이지요. 예수님을 역사비평학적으로 바라보아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일을 찾으려는 이들이 하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셨고 그분의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우리들의 믿음이지요.
원대한 이상, 초라한 현실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은 실로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헌데 실제로 가진 것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요구되는 것과 우리가 지닌 현실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먼저 보여주고는 그것이 어떻게 처리되는가를 제자들에게 군중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셨지요.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예수님께서 미리부터 알고 있었던 사항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재확인은 시킨 셈이지요.
자리잡기
먼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리잡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리 잡지 않은 이에게는 나누어 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리 저리 움직여 다니는 이, 즉 최소한의 신뢰도 보여주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리 은총이 넘쳐 흘러도 건네어줄 것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누구의 말을 믿고 따를 것인지 분명히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감사
예수님께서 하시는 유일한 행위는 감사입니다. 빵을 손에 들고 물고기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감사’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감사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경우 우리의 ‘감사’는 이미 가진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새로이 얻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 비록 초라하고 작지만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도 감사할 줄 알 때에 하느님의 은총, 넘쳐 흐르는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감사라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도 힘있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감사는 ‘넘쳐흐르게’ 도와줍니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
사람들은 저마다 배불리 먹고도 남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감사의 소중함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감사를 드리는 이들에게는 넘치도록 내어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임금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그분의 현세적 영향력을 분석하고 그분을 세상의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산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아마 산으로 들어가시면서 당신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군중이 얼마나 야속했을는지는 예수님 당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사건
이를 단순히 실제로 일어난 일로만 해석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그닥 얻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기하게도’ 물 위를 걸었을 뿐이고 다른 이들은 그걸 목격하였을 뿐이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먼저 길을 떠나는 제자들
먼저 제자들이 호수로 내려가서 건너편으로 배를 저어 갑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리로 갔는지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먼저 떠났고 예수님은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것만을 서술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는 어떻게든 이런 저런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예수님의 현존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생을 지속해 나가고 그 안에서 일을 해 나갑니다. 비록 예수님이 없어 보이더라도 우리는 할 일을 하지요.
큰 바람과 물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게 일기 시작합니다. 큰 바람과 물결이 상징하는 것은 ‘시련과 위기’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마찬가지의 일을 당합니다. 시련과 위기가 닥쳐오지요. 어떤 일이든 그러합니다. 교회의 일 가운데 처음부터 조용히 시작해서 끝까지 조용히 가는 적은 없습니다. 적든 크든 시련이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다가옴
그때에 예수님이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물 위를 걸어 오시지요. 만일 예수님이 따로 작은 배를 홀로 저어 왔다면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오십니다. 우리 교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에 예수님은 마찬가지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다가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한 모습에 도리어 두려워하지요. 우리 역시도 위기 가운데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반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두려워하곤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한 채로 도리어 그분의 기괴한 모습에 겁에 질리는 것이지요. 차라리 바람과 물결만이면 그런 두려움까지는 겪지 않겠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가운데에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제자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더욱 큰 위기로 받아들여지는 셈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납니다.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은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친근하게 제자들을 안심시키지요. 우리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안심을 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요. 헌데 바로 그 때에 배는 이미 가려던 곳에 가 닿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장 큰 위기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 위기의 실체가 예수님임을 깨닫고 그분을 감싸 안으려고 하면 우리는 원하던 곳에 이미 가 닿아 있는 교회의 모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빵
이제 그 유명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난해하겠지만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군중
군중은 바삐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겨우 얻어만난 예수님은 언뜻 속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군중은 아직 소경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들, 특히 빵의 기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수많은 빵에 감탄했을 뿐이지요.
지금의 교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교회를 외적인 요소들로 찾습니다. 웅장한 건물과 교계제도, 그리고 2000년이라는 뿌리깊은 역사와 같은 것들로 교회를 받아들이지요. 그들은 그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거나 ‘신앙’의 본질을 찾아서 오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속상한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이제 예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썩을 양식을 위해 힘쓸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양식은 예수님이 건네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바로 이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요한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이 주시려는 생명의 양식을 얻어야 하는 것이지요.
믿음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어찌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거침없이 답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이론을 제시합니다. 즉 ‘표징’을 제시하라는 것이지요. 믿을 증거를 내어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구름을 만들던가 산을 옮기던가 우리가 믿을 만한 증거를 내어 보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대로 ‘만나’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과거 조상들이 그들의 먹은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주면 믿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반발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특정 위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을 바로 세워 주시지요. 사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치유를 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달려가고 어느 성모님이 효험히 있다고 하면 그 성모성지로 달려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루는 분은 그런 성인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의 빵
진정한 표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하늘에서 생명을 주는 빵을 내려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먹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가는 이들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결코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계속 다른 표징, 다른 위인을 내세우라고 하면서 그분에게 증명을 요구하지요. 이는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를 보려 하고, 신앙 자체보다는 부수적인 요소들, 성당 사람들, 신심 단체 등등을 보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지요.
운명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마치 그런 사람이 ‘정해져’ 있는 듯한 말투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운명인 셈이지요. 이는 마치 여러갈래 고속도로 가운데 우리가 어디에 차를 얹을 것인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는 고속도로는 그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과 같지요. 믿음은 믿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의지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이들은 아드님이 받아들일 것이고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영원한 생명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이들’의 운명입니다.
수근댐
사실 이런 가르침은 사람들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이들은 말씀의 본질에 파고들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의 ‘외적인 권위’를 두고 말을 합니다. 그분의 출신 성분을 분석하고 그 가족을 분석하면서 그분의 ‘내적인 권위’를 전혀 존중하거나 이해하지 못하지요.
나는 생명의 빵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수근댐 앞에 다시 한 번 앞서의 설명을 반복하신 다음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지금 당신의 권위부터 의심스러운 유다인들에게 이러한 표현은 정말 엉뚱한 것인 셈이었지요. 지금의 가톨릭 교회의 일원인 우리들에게는 이러한 표현들과 ‘성체성사’를 견주어보면서 이해를 시도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러한 발언이 주는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이는 마치 아프리카에서 온 어느 꼬마가 ‘우리 부족 사람들은 사람 고기를 먹어요.’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도리어 서로 다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성체성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우리의 소중한 보물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지요. 그리고 가톨릭 신자 내부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받아 모실 뿐 진정한 성체성사의 의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교회는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셈입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
과연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네, 오늘날 우리는 실제 성체 성사를 통해서 믿음으로 그분의 살과 피를 모십니다. 바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그분의 실체를 모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건 단순히 이렇게 표현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분의 형상만을 모실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지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계신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 추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한 사람을 신뢰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을 내가 필요로 할 때에 얼마든지 요청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그가 목수라면 나는 가구를 만들 때에는 그에게 부탁할 수 있게 되지요.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가 목수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도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 일이 하느님과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한 세상의 창조주로 믿을 때에 우리는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전능과 영원성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지요.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그분이 보내신 아드님을 믿고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때에 우리는 영원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받아모신다’는 것의 의미를 올바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거슬리는 말씀
이번에 논란이 되는 대상은 ‘군중’이나 ‘유대인’이 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선한 업적과 여러가지 일들은 받아 들이지만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먹으라는 표현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그들과 가톨릭의 본질적인 차이는 바로 ‘성체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체성사는 하나의 의식이고 행사일 뿐이고 우리에게 성체성사는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거룩한 전례이지요.
영과 육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은 육과 영의 가치를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육’은 단순히 우리의 ‘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연계된 지상의 사정들을 통틀어 말합니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쥐고 하는 것들과 그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안락과 쾌락 같은 것을 말하지요. 물론 이러한 것들이 ‘영’을 위해서 봉사한다면 그 본래적인 가치를 회복하지만 영을 제외한 채로 그러한 육적인 것에만 헌신하게 된다면 그러한 것들은 가치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믿지 않는 자들
예수님은 말하는 대상 가운데에 믿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 안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 때문에 여전히 교회에 붙어 있거나 아니면 여전히 많은 다른 이유로 교회에 들어와 있는 이들이지요. 간단한 예로 모든 교리교사들이 하느님에 대한 열정으로 일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사제’와 맺는 인연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나누는 친교 때문에, 누군가는 어린 학생들에게 ‘선생님’으로 명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는 교리교사에게 보장되어 있는 여러가지 피정이나 연수의 특권들 때문에 교리교사를 하지요. 그러다가 그 가운데 몇몇은 진정한 신앙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의 기반을 신앙으로 철저히 다지는가 하면 적지 않은 다른 교사들은 외인들보다 더한 냉담자가 되곤 합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
예수님의 본래적인 가치를 들은 이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쫓아 보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빵’으로 상징되는 현세적인 가치를 기다렸고 결국 예수님에게서는 그러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우리 이득에 맞는 무언가가 유지될 동안에는 교회에 붙어 있다가 그것이 끝나는 날에는 언제라도 떠나곤 합니다. 신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떠나고, 구역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떠나고, 교회 구성원과 불화가 있다고 떠나고… 이유도 참으로 다양하지요. 하지만 근본 원인은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하느님은 그런 부족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배반을 했지만 다시 뉘우치고 돌아왔고 교회 공동체는 언제나 삐걱거리기가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교회가 그렇게 상처를 지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성질이 난 셈이지요. 자신들의 기준에 도저히 맞지 않는 셈입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십니다.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몬 베드로는 자신의 굳은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열두 제자 가운데에 유다가 있음을, 그리고 그는 이미 다른 마음을 지니고 있음에도 떠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다는 자신의 악을 더욱 완성해 가는 셈이지요.
악마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을 하십니다. 당신이 뽑은 열둘 가운데 하나는 악마라고 말이지요. 악한 존재를 표현하는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탄, 악마, 어둠의 영 등등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이 표현으로 ‘악마’라는 것은 악을 내면에 가득 품은 인간을 두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바로 이 악마였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예수님과의 시간을 더해 갈수록 이 악을 완성시켜가고 있는 셈이지요. 물론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말입니다. 즉 한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악을 형성하고 완성시켜 나갈 때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그것을 강제해서 선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7장
예수의 형제들
예수님은 유다 지방에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당장의 눈앞에 적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의 ‘형제들’이 다가와 예수님에게 유다 지방에 가서 위대하 일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님의 가족, 친척과 고향 이웃들을 통틀어 칭하던 명칭을 말합니다. 그들은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대지요. 즉 예수님의 일을 세상이 널리 알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를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조언을 해 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언뜻 우리를 살리려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우리를 향한 애정이 없기에 무엇이 우리를 위해서 정말 좋은 것인지 생각지 않고 그저 추상적인 이유를 생각할 따름이지요. 그리고 귀가 얇은 우리들은 그러한 충고를 받아들여 시행하게 되고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충고를 청하고 받을 때에는 단순히 그 사람의 경력이나 학식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한 마음과 신심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진정으로 우리에게 충고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귀에 달콤한 말을 찾지만 때로 그런 말들은 우리를 도리어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때
예수님은 ‘때’에 관한 설명을 다시 하십니다. 즉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2장에서 ‘시간’ 항목 참조) 반면 너희에게는 아무 때라도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너희의 때도 마찬가지로 충만의 때를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는 마땅히 무언가를 해야 할 시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 때가 아직 예수님에게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고 ‘너희들’이라고 표현한 이들에게는 그 어느 때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는 것이 거의 완성이 되는 시기이며, ‘너희’로 표현되는 그들의 시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아 무엇을 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시간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안에 어떤 열매를 키우고 있고 어느 시점에 있을까요? 우리는 오로지 세상의 것만을 마음에 품고 키워 나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과연 우리의 내면에는 ‘영원’을 향한 여정의 씨앗이 뿌려져 있고 그 씨앗이 자라나고 있을까요? 시간을 두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예수님
여기서 ‘세상’은 예수님이 악하다고 비난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성경 안에서, 특히 요한 복음에서 세상은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로서의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저버린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너희’라는 그룹을 미워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바로 ‘너희’,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바탕으로 그 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남몰래
예수님은 ‘남몰래’ 무언가를 하십니다. 예수의 믿지 않는 형제들이 알지 못하게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신 것이지요. 만일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며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때가 있었고 가장 적절한 때에 그것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성전에 올라갈 때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보란 듯이 무언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의 좋은 것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남몰래’ 해야 하는 경우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고 떳떳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내가 한 것들이 다른 이들의 필요 이상의 주의를 끌어 하느님에게 반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면 차라리 그것을 숨기는 것이 좋습니다. 대외적으로 무조건 좋아 보이는 일이라고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모든 이들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루살렘에 방문하는 것이 모든 유다인들의 정당하고 합당한 행위임에도 예수님은 이를 ‘남몰래’ 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일상 안에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때로는 ‘남몰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 있나?
아니나다를까 예수님은 그들이 이렇게 당신을 찾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믿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서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더욱 분노를 일으켜 그를 죽여 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의견이 나뉘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두고 선하다고 하는 사람과 그가 남을 속이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조용히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올라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지식은 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영은 하느님의 영, 즉 성령이었지요. 마치 서로 다른 바이올린의 같은 줄 하나를 울리면 다른 바이올린이 ‘공명’하는 것처럼 그분의 가르침은 같은 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의 영혼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려 할 때에 수많은 가르침의 홍수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우리의 분별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공명하는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의 영광, 보내신 분의 영광
우리가 전하는 가르침은 반드시 두 가지 방향 가운데 하나를 품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영광’이라는 방향과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이라는 방향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마치 하느님을 전하는 듯이 자신의 영광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이내 식상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들은 진정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유지 시키려고 하기에 가르침에서 점점 세속적인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즉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찾고 그분의 뜻을 전하려는 사람의 말은 메마르지 않습니다. 그는 샘솟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모세의 율법은 옛 것이지만 거기에도 엄연히 생명은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은 그마저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은 법을 교묘히 이용해서 사람을 죽이려고 듭니다. 이러한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을 사랑하게 돕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인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이용해서 도리어 우리의 목적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해서 사회복지 법을 만들고서 가난한 이들에게 산더미 같은 문서를 요구해서는 그들을 돕지 않으려는 상태와 같지요.
죽이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에 항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살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죽이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모든 살인,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모든 형태의 살인은 타인을 향한 증오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을 죽일 ‘의도’가 한 사람에게 깃들어 결국 그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지요. 예수님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의도’ 즉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적대심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적대심을 가득히 품고도 자신들이 지금껏 실제적으로 행한 것이 없으니 자신들은 무죄하다고 말합니다.
올바른 판단
예수님은 ‘할례와 안식일’이라는 예를 통해서 당시의 유대 사람들에게 설명을 시도합니다. 즉, 할례라는 인간이 세운 규정은 얼마든지 주님의 규정인 안식일에 이행하면서 정작 주님이 세운 가장 근본적인 규정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라는 것을 예수님이 안식일에 행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오늘날 말씀을 하셨더라면 오늘날 주일의 규정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한 말씀 하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날인데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의무’ 규정에 너무나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주일날 미사를 가지 않고 그 날에 병원에 가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더라면 오늘날 분명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래도 미사를 가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이지요. 우리는 그런 외적인 규정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셈입니다.
어디에서 온 자인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근본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즉 예수님의 출생지와 출신 성분을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는 마치 오늘날 한국에서 누군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려는데 ‘저 사람은 경상도 촌뜨기가 아닌가? 그리고 내놓을만한 학위도 하나 없지 않은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자신들보다 뛰어나고 드높은 존재를 찾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영광에 둘러싸인 인물을 찾지요. ‘유명’이나 ‘스타’라는 글자가 앞에 붙은 ‘수도자’나 ‘사제직’을 지닌 분을 선호합니다. ‘주교님’이나 ‘추기경님’ 또는 ‘교황님’이면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러한 모든 일련의 행동 속에는 사람들의 무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내면의 근원과 크기를 향한 무지라고 할 수 있지요. 즉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분별하는 기준들은 모두 세상의 기준들입니다. 그들은 올바른 것을 분별해 낼 능력이 없지요. 아무리 하느님의 사람이라도 해도 겉으로 초라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오늘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귀에 솔깃한 소리를 조금만 하고 세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 들어높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는 이를 가장 필요한 곳에 두실 줄 아는 분입니다. 그리고 설령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을 통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분을 당신의 삶으로 드러내어 보이셨고 증명을 하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에게 다가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수많은 이들이 그 예수님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어둠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안다는 이들이 전혀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구원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야 할 이들은 분명히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외국을 나가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설교를 해야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예수님을 목말라하는 수많은 이들을 두고 있으면서도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할 일을 미루고 있지요.
머물다가 떠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영원’을 보낼 작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서 보낼 수 있도록 허락된 짧은 시간을 이미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기를 쓰고 세상 것들을 추구합니다. 모으고 쌓고 해서 이 땅에서의 기반을 구축하려고 애를 쓰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의 내면이 공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쌓고 저장해도 그 텅 빈 공허함을 채울 수 없다는 걸 늘 느끼게 되지요. 그렇지만 이미 눈이 가리워진 우리들은 그러한 공허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세상을 더욱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옷을 사도 그 순간의 쾌락 뿐이거늘 그렇게 산 옷을 입고 길에 나섰다가 집에 돌아오면 다음날에는 더 큰 공허로 다시 쇼핑에 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찾지 못한다.
눈이 없으면 시각적인 정보를 지닌 사물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오직 소리로만 분별하거나 만져서 촉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요. 장님 앞에다가 색맹 검사지를 놓고 그 안에 적힌 숫자를 알아 맞히라고 하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나면 ‘승천’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만 거기에 예수님은 없지요. 승천이라는 의미 자체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떠나고 나면 그분의 신비는 더욱 가중될 것이 분명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절대로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습니다.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논리이지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은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왜’ 필요한가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교리교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교사회에서 주관하는 각종 프로그램, 교사 연수, 교사 피정에 참여하고 다른 또래의 교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기 위해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교사는 예수님이 전하려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교리교사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로 원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그 교사에게 원하는 이유로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듯이 헛되이 예수님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전혀 예수님을 진정으로 목말라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그분이 주시려는 진정한 생명의 샘, 즉 성령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려는 시도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30절, 32절, 44절, 45절) 몇 차례나 잡으려고 하지요. 심지어는 성전 경비병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하지요. 과연 단순히 그들이 예수님에게 설득당해서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던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 의문 부호만을 남겨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의 항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끌고 오기는 커녕 도리어 돌아와서 그분이 한 말이 전혀 새롭고 권위있는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핑계로 그들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게 이루지는 못합니다. 율법에 대해 알고 있는 니코데모가 율법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변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길은 지독히도 외로운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예수님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힘없는 이들’이었지요. 하지만 그 사랑은 분명히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니코데모의 이 항변도 무색할 뿐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다시 ‘출신지’를 바탕으로 그를 비난합니다. 이러한 식의 비난은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무언가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성분 분석이 들어가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제쳐두고 그의 여러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를 쏟아붓는 일이 빈번하지요.
8장
올리브산
올리브산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피정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제자들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친 영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올리브 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단순히 영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간음한 여자
예수님께서 내려오자마자 마치 준비한 듯이 판이 짜여져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합심해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율법의 준엄한 명령을 핑계로 여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전에 없던 엉뚱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즉, 몸을 굽혀서 땅에 뭔가를 쓰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했지요.
흥분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엉뚱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빨리빨리 진행할 때에 우리는 곧잘 중심 생각을 잃어버리고 눈 앞의 현실에 급급해지게 됩니다. 운전에 열중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을 묵상할 리가 없습니다. 그는 눈 앞에 빠르게 오가는 자동차들을 주시하느라 자신의 열정을 다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 영원한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적’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미사 사이사이에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살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늘 바쁘다고 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 있다고 외쳐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흥분한 군중을 진정 시킵니다. 군중들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자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소위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가져온 자신들의 추악한 의도를 다시 그들에게 돌려 주십니다. 즉 그들은 이 추악한 선택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들어가기를 바랬으나 예수님은 ‘조건’ 하나를 붙여서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신 셈이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갖게 같은 행동을 취하십니다. 즉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언가를 쓰시지요. (알 도리는 없지만 저는 ‘서로 사랑해라.’를 여러번 반복해서 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이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납니다. ‘나이 많은 자들’, 즉 그나마 삶의 지혜가 있는 이들부터 자리를 뜨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군중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군중의 특성은 그러합니다. 흥분해서 소리치고 뭔가 힘을 일으키지만 결국 흩어 놓으면 제각각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들이지요. 허망하고 먼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군중’ 속에 있을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뭔가를 전복하기 위해 애쓰지만 때로는 ‘왜?’라는 의문도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저 단순히 지금 우리가 달리는 것이 ‘옳다’고 다른 이들이 달리는 걸 보고 믿을 뿐이지요. 광장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비둘기떼 가운데에서 날아야 할 이유를 아는 놈은 제일 먼저 나는 놈 뿐입니다. 나머지는 덩달아 따라 날아오르지요. 그리고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여인 만이 남습니다. 그 여인을 단죄하던 자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오직 ‘죄 없는 분’이신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세상의 빛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지요. 태양에서 나와 만물을 비추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여 멀쩡히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드는 빛입니다. 우리의 주님 또한 빛이십니다. 하지만 이 빛은 단순히 우리의 눈을 밝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영을 밝혀주어 우리가 다른 차원의 어둠, 즉 죄악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고 영적 사정을 분간하여 위험 없이, 즉 유혹에 빠지는 일 없이 걸어다니게 만들어 줍니다.
자신에 관한 증언
우리가 늘 증언을 할 때에 제3자를 찾는 이유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은 통상적으로 진실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증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큼 진실하신 분은 다시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말이나 사건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인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다른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들이지요. 예수님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던 분이셨기에 그분의 증언은 유효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이런 저런 일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려 듭니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원하는 것을 취하려니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맡기셨고 당신의 개인적인 욕구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심판
심판은 심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이가 어른 재산분쟁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그런 사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다른 형제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의 내면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만이 그리고 그분이 합당하게 자격을 맡기시는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이 올바로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은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 있느냐?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외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출신의 동네 사람으로만 그를 인식할 뿐 그의 내면에 쏟아부어진 성령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내면에 ‘증오’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나는 간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한동안 하늘만 쳐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간다’는 것으로 통해서 바로 ‘공간’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간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신 셈입니다. 마치 개미들이 종이 위에서 오손도손 모여 있는데 위에서 손가락을 갖다대면 이 손가락이 마치 전에 결코 없던 것이 자신들의 세상에 나타난 것인양 놀라 허겁지겁 도망가는 것처럼 예수님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올 수 없다
자신의 죄 속에서 죽을 운명을 지닌 자들, 즉,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멀기를 선택한 자들은 이미 그분이 진정으로 의도하시는 것, 진정으로 우리들을 이끌고 가실 곳에 대한 일말의 개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증오’를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랑’의 하느님에게 속한 분이시지요. 증오하는 자들은 모두 살인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지금 당장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저 ‘증오’를 마음에 품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증오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면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사랑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서 이를 읽어내셨고 그들의 운명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정해진 운명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합당하게 따르려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증오를 종식시키고 사랑을 열기 시작하게 되어 우리의 삶을 180도 뒤바꿔 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를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믿는 바를 선포하고 전하게 되지요. 그렇게 스스로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리워진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홀로만 품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이름이 널리 퍼지는 진정한 믿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그분과 함께 머무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자녀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 걸음을 모두 지켜보시고 바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보살핌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선인에게는 더 똑바로 힘있게 걸어가게 가르치시고 악인에게는 그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도록 가르치실 뿐이지요.
진리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자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 다리에 줄을 묶어 놓으면 그 말은 자신이 달리지 못하는 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말에게 자신이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키고 나면 원래대로 달리게 되겠지요.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죄에 묶여 있던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풀어헤쳐 영원을 향해 달리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죄의 종
죄를 짓는 자들은 죄의 종이 됩니다. 어둠을 범하는 자들은 그 어둠에 종속되게 됩니다. 반면 진리를 실천하는 자들은 그 진리로 인해 더욱 자유롭게 되지요. 죄를 짓는 자들은 사랑하기를 힘들어합니다. 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지요. 과연 자유라는 것이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죄인들도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스스로는 더욱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요. 마음껏 욕설하고 비방하고 증오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는 동안 더욱 더 참된 행복에서 멀어져 가는 셈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그러한 어두움들이 다시 자신들에게 되돌아와서 공격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요. 참된 자유는 본인의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이고 선을 행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우리는 악을 저지르기 위해서 태어난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종과 아들
결정적으로 종과 아들을 구분짓는 것은 집에서의 행태입니다. 종은 임시적이고 계약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반면 아들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지요. 악인들에게 허락되는 모든 것들은 임시적으로 계약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일해서 벌어서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지탱해 나가야 하지요. 하지만 아들들의 기쁨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내면에서 샘솟는 기쁨을 만끽하고 그 기쁨의 원천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종의 아들은 좋은 주인에 의해 보살핌을 받지만 ‘유산’을 받지는 못합니다. 반면 아들들은 가득한 사랑을 받고 더불어 유산도 받지요. 하느님의 유산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들
여기서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 하느님의 자녀들의 상대편에 맞서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바로 악마를 아버지로 둔 악마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알아들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의 본성이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아무리 엄마가 좋은 뜻으로 다가가도 엄마를 두려워하듯이 거짓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은 진리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보면 증오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짓의 자식이고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계속되는 언쟁
그들은 예수님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의 편에 서 있고 그들은 거짓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허망하게 계속 언쟁을 시도하지만 예수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행여 한 명이라도 진리를 깨닫고 돌아올 자를 위해서 끊임없이 그들의 피곤한 언쟁에 답변을 해 주시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9장
태생 소경
인간의 질병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질병은 우리의 죄의 결과인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너무 과하게 욕심내서 먹지 않았더라면, 잘 절제하고 필요한 것을 취하고 적절히 몸을 돌볼 줄 알았더라면 많은 아픔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비축해 보겠다는 일념 하에 우리의 몸을 함부로 굴리다가 병을 얻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벌인 것들을 고스란히 다 써버리고 빚마저 지고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죄의 결과가 아닌 병들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성인들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질병의 일종으로 드러나곤 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류의 고통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중이었지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아픔들도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서의 예시처럼 ‘태생 소경’의 경우이지요. 이러한 경우는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병’은 당연히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이 소경에 대해서도 누구의 죄인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못박으십니다.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물론 세상에는 복음의 경우처럼 기적적으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지 않는 태생 소경도 많습니다. 그들은 소경으로 살아가지요. 하지만 그들의 생존 자체가 실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지요. 그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가 분명히 하느님의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실로암(파견된 이)
이 소경은 전에 없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복음 선포자가 되어 갑니다. 우리는 복음의 이 태생소경의 예시를 통해서 우리의 ‘소경됨’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부터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장 5절) 예수님은 태생 소경을 통해서 상징적인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제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힐 수 밖에 없는 일을 하셔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장님들입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눈을 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간단한 치유(침으로 만든 진흙)를 하신 후에 우리를 ‘파견’ 하십니다. ‘가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태생 소경은 가서 씻고 난 뒤에 보기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 장님의 상태에 당신의 치유를 하신 다음 우리를 ‘파견’ 하십니다. 미사의 모든 마지막은 ‘파견’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파견을 받아 나가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치유 이후에 잠들어 버리기 일쑤입니다. 일을 할 줄 모릅니다. 파견을 받은 것을 이행할 줄 모르지요.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안식일 논쟁
예수님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난리가 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태생 소경을 닥달하고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물었던 것을 다시 묻고 또 묻고 그 어떤 오류가 있는지, 그 어떤 작은 실수라도 있는지 찾아내어 벌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리’ 안에서 일어난 일에 그러한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태생 소경은 일어난 일을 솔직하게 대답하고 자신이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진정한 예언자이심을 고백하지요.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모에게 가서 묻고 또다시 소경에게 묻고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태생 소경은 마침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 30-33)
하지만 이 진정한 영적인 장님들은 단지 육신의 눈이 멀었을 뿐이던 태생 소경, 지금은 육과 영의 눈이 모두 뜨인 진정한 의인인 태생 소경을 죄인 취급하고 쫓아내어 버립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태생 소경의 신앙고백은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태생 소경은 시련을 당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진실성을 변호하다가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을 무렵 다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을 숨김 없이 드러내시고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하며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이로써 우리는 심판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게 되고 보는 이들(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이들, 탐욕스럽고, 명예와 학식을 자랑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교만한 이들은 사실 소경들입니다. 그들은 원래부터의 영적 눈멀음을 더욱 짙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이들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은 눈을 뜨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10장
목자와 양
예수님은 그 지역의 문화 속에 실존하셨던 분이고 자연 그 지역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늘나라의 신비를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되는 대표적인 비유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오늘날에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목자를 따르는 순박한 양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단 양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을 떠올려 보아도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목자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진실되고 속임이 없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언제나 문으로 드나듭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언제나 곁길로 들어섭니다. 정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언제나 주변에서 서성이다가 빈 틈을 바라보고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같은 것들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식으로 공공연하게 가르침을 받는 것들은 바로 목자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곁으로 슬쩍 다가와서 이상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들은 도둑이며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따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이들을 조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호기심에, 그리고 교회에 대한 불만에 이런 다른 길을 찾아 나서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양
하지만 다른 한 편, 양들은 목자가 누군지를 아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자의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부르면 금새 그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피해 달아납니다. 하지만 양들이 아닌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목자 아닌 이들을 쉽사리 따라갑니다. 그리고 아픈 양들이 있습니다. 올바로 듣지 못하고 올바로 걷지 못하는 양들, 엇나가기 시작하는 양들이고 길을 잃는 양들이지요. 우리는 이런 양 무리를 올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양이 아니고, 모두가 건강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들 사이에 침투한 도둑과 강도, 즉 늑대를 쫓을 줄도 알아야 하고, 아픈 양들을 돌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도둑과 강도, 즉 늑대는 쫓아내야 하고 양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분별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도둑과 강도
이어 예수님은 도둑과 강도, 즉 늑대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특징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들’입니다. 즉 정문을 두고 언제나 다른 문을 이용하여 들어와서 양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아주 일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서 소곤대며 접근하는 이들,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합니다.
착한 목자
반면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다니는 곳이 곧 문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언제나 크고 바른 문으로 들어오십니다. ‘진리, 정의, 선’의 문으로 들어오시지요.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분별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바로 착한 목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목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인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삯꾼
여기에서 또다른 무리가 등장합니다. ‘삯꾼’이라 불리는 그들은 삯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양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삯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평소에는 양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위협이 다가오면 그 앞에서 양들을 지키려 하기는 커녕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에 있지 않은 양
이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강도와 도둑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 밖에 양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만 아무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서 밖에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목소리를 듣게 되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찾아오게 될 이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양들은 한 목자 아래 한 무리의 양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는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분명한 약속입니다.
다시 얻는 목숨
스스로 내어놓는 봉헌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렇게 선물 받은 것을 더 좋은 것으로 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남는 것을 하느님 앞에 돌립니다. 그래서 기쁘게 봉헌할 줄 모릅니다. 진정한 봉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목숨은 오직 예수님의 것이고 아무도 함부로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목숨을 스스로 내어 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행동은 예수님의 독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당신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맡겼고 그래서 당신의 이 행위, 즉 생명을 스스로 내어놓는 행위는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몰이해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앞에 두고 반으로 갈라집니다. 하지만 둘 다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측은 예수님을 마귀가 들린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다른 한 편은 예수님의 외적 업적만을 두고 그분을 평가하지만 둘 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배척
예수님이 그렇게나 스스로의 신원에 대해서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양의 비유를 말해 줍니다. 목자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 즉 예수님의 양떼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반면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양떼가 되는 좋은 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가장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뜻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화가 나서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왜 돌을 던지느냐?
누군가가 다른 이를 해치려는 것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나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무언가 예수님에게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걸 묻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난 것인지 말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 자체로 그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그릇된 행동,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행동도 하지 않았고 모든 좋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그들 마음이 뒤틀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름으로 변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즉 예수님의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으로 자처하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마저도 대답해 주십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고 불리우기에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전혀 그릇된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애시당초 예수님을 그릇된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분이 하시는 선한 행위나 그분이 하시는 진리의 말이나 올바로 듣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시지요.
요르단 강 건너편
요르단 강 건너편, 그곳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이었습니다. 요한의 기억이 생생한 곳이지요. 예수님은 옛 친구가 그리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가갑니다. 우리는 때로 이런 ‘관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 혼자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마다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도 알아가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요한이 한 말을 떠올리며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11장
라자로
예수님과 아주 절친 사이였던 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바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였지요. 특히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몸을 팔아 돈을 벌어 생활했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릴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이었지요. 헌데 그 오빠인 라자로가 병을 앓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전해 받고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십니다.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시지요. 그 병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병을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하시지요.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본격적으로’ 준비되게 되지요.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두고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 수난과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 자기 앞에 마련된 수난과 죽음이 다가올 때에는 전혀 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시간을 끕니다.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고 그리고 나서야 돌아갈 준비를 갖추십니다. 사실 라자로의 병이 죽을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라자로의 죽음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도록 일부러 시간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낮에 다니는 자
제자들은 유다로 돌아간다는 말에 걱정을 시작합니다. 최근에 겨우 거기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빠져 나왔는데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마치 가솔린을 등에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모양새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고 하시지요. 이는 단순히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빛이 있으면 장애물이 있어도 피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유혹이나 영적 위험이 다가와도 마찬가지이지요. 하지만 빛이 없는 자들, 빛을 잃은 자들, 영적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그들은 오히려 득세하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부자이고 학식이 가득하고 유명하고 권력을 쥐고 있지요.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에서 걸어 다니는 자들이고 그래서 곧잘 넘어지고 아파하고 서로 다투는 자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빛을 지닌 자들이고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라자로의 죽음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예수님의 표현을 ‘잠들었다’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죽었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죽음 때문에 도리어 기뻐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라자로의 죽음보다도 당신이 하게 될 일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 더 중요하고 기쁜 일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예수님은 기쁨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점의 중심이 되는 자리로 다시 돌아가시고자 하십니다. 즉, 죽을 뻔한 곳으로 다시 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토마스가 동료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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