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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된 본질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수적인 데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과 해야 할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밖의 온갖 부수적인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도 정작 스스로 영적 굶주림의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핵심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안인데 이 핵심을 놓쳐버리고 나면 교회는 이상한 모습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성사와 전례가 존재하는 것인데 정작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은 없이 성사와 전례를 참례하게 되면 거기에는 ‘의무’와 ‘규정’만이 남게 되고 그 의무사항과 규정사항을 통달한 사람이 으뜸으로 취급받아 헛된 영광을 얻고, 반대로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시되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야 겠지요.

어느 수도회는 전통적인 수도 복장을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자신의 고유한 수도 복장이 있고 현대의 화려함 속에서 그 수도복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난을 실천적으로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반드시 지키게 되어 있지요. 헌데 한 수사님이 어느 지독히 가난하고 초라한 지역으로 파견을 갔는데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역으로 그 수도 복장이 사람들의 초라한 복장보다도 더욱 화려하고 부유하게 보이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래서 그 수도복을 벗고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장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헌데 어느 날엔가 수도회 중앙 본부에서 감찰관으로 수사님이 오셔서 그 수사님이 ‘규정에 어긋나는’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 감찰관인 수사님은 다시 규정을 꺼내들고 그것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순의 본질적 의미를 망각한 채로 수난하고 죽으신 그분의 고통을 잊고 사순 시기 동안 부활 계란 공장을 돌려 부활절 밤에 교리교사들이 회식을 하는 자금을 마련하는 데에 치중하고, 겸손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떠올리기는 커녕 대림환을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은 아랑곳 없이 내년 간부들 연수에 쓰기 위한 본당 재정 확충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이지요.

무엇이 본질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일까요? 고민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사는 대로 고민하게 됩니다. 내가 해야 하겠다 싶은 것이 떠오르면 그것을 위해서 달려 나갈 수 있지만, 딱히 내가 생각해 둔 것이 없으면 세상이 우리더러 뛰어 가라고 하는 대로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를 거듭 강조하는 세상 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이 부르짖는 헛된 구호를 반복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잘 분노하는 정치적 이슈는 어쩌면 ‘분노’와 ‘증오’를 끌어내기 위한 세상의 수단인지도 모릅니다. 선하신 하느님 앞에서 ‘정당한 증오’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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