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원한다면 우리를 감방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꼼짝도 못하게 온 몸을 꽁꽁 싸맬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의지이지요. 심지어는 정신마저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세뇌를 시켜버릴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마지막 ‘자유의지’만큼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다른 모든 것에 책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칼로 찌른 사람을 탓할 수 있지 칼에게 잘못을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한동안 ‘심리학’은 인간에게서 양심의 무게를 덜어내려고 꾀나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모든 것은 물려받은 것이며 내부적으로 프로그램된 것이라면 우리는 정교한 로봇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사람은 자유를 지닌 존재입니다. 바로 이 자유에서 선과 악이 출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로 선을 행하기도, 악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럼 모든 것은 각자의 자유에 달렸으니 자신들이 알아서 하는 걸까요?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최종적인 선과 악의 선택의 자유가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늘 보고 듣는 것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하느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 하느님을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여기에 우리 신앙인이 해야 할 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주어야 합니다. 빛이 있다는 걸 알아야 빛을 선택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자유가 있어도 눈 앞에 사과박스 밖에 없는데 오렌지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씀은 선포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오류가 많고 때로는 엉뚱한 짓을 저질러왔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사명,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마저 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사람들에게서 이 ‘빛을 전하려는 열정’이 사라진 것 같아 보입니다. 다들 신앙생활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르지만 거의 공통적인 것은 어느 순간에는 자신들이 빛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내가 그 빛을 전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열망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빛을 받지 못해서 어둠을 선택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마다 최소한의 빛은 지니고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빛을 전할 사명을 지닌 이가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해서 빛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그 사명을 지닌 이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우리는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선포할 사명을 지닌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이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7-48)
만일 인간이 다른 모든 것에 책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인간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칼로 찌른 사람을 탓할 수 있지 칼에게 잘못을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한동안 ‘심리학’은 인간에게서 양심의 무게를 덜어내려고 꾀나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고 모든 것은 물려받은 것이며 내부적으로 프로그램된 것이라면 우리는 정교한 로봇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사람은 자유를 지닌 존재입니다. 바로 이 자유에서 선과 악이 출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유로 선을 행하기도, 악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럼 모든 것은 각자의 자유에 달렸으니 자신들이 알아서 하는 걸까요?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최종적인 선과 악의 선택의 자유가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늘 보고 듣는 것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하느님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 하느님을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여기에 우리 신앙인이 해야 할 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주어야 합니다. 빛이 있다는 걸 알아야 빛을 선택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자유가 있어도 눈 앞에 사과박스 밖에 없는데 오렌지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씀은 선포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오류가 많고 때로는 엉뚱한 짓을 저질러왔다 하지만 이 근본적인 사명,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마저 그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사람들에게서 이 ‘빛을 전하려는 열정’이 사라진 것 같아 보입니다. 다들 신앙생활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르지만 거의 공통적인 것은 어느 순간에는 자신들이 빛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고 나서 내가 그 빛을 전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열망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빛을 받지 못해서 어둠을 선택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마다 최소한의 빛은 지니고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빛을 전할 사명을 지닌 이가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해서 빛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그 사명을 지닌 이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우리는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선포할 사명을 지닌 그분의 제자들입니다. 이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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