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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두가지 문화

장례를 다녀왔습니다. 어느 가난한 할아버지였는데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청하러 온 아저씨가 들어오면서 묻습니다. “당신이 신부님인가요?”라고 말이지요. 그 말인즉슨 단 한 번도 주일 미사나 다른 기회에 나를 만난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미소를 띄우고 다가가서 언제 장례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3시로 정하고 다녀왔습니다.

한국은 장례식이라고 하면 ‘연도’를 생각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체험해 보았을 예절이지요. 함께 모여서 장중한 목소리로 함께 시편 기도를 노래하고 가능하면 성가도 부르고 하지요. 때로는 그 인상깊은 모습 때문에,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기꺼이 다가와주는 신앙인들의 모습에 종교가 없던 사람이 신앙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는 기본은 같지만 분위기가 좀 많이 다릅니다. 여기는 일단 장례가 나면 관에 넣고 시작을 합니다. 가장 먼저는 장의사를 불러 시신에 조치를 하고 그러는 동안 사제를 찾지요. 그리고 사제는 가서 입관해 있는 시신, 하지만 얼굴을 내어놓은 시신과 더불어 간단한 장례 예절을 해 줍니다. 그러고는 그 장례 날부터 9일동안 사람들이 함께 해 줍니다. 하지만 따로 한국처럼 ‘연도’라는 예절이 있지는 않고 ‘기도하는 이들’이 9일기도 동안에 기도를 바쳐 줍니다. 물론 그 중에는 ‘기도’를 파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돈을 받지요.

이곳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만은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예컨대 이 곳 도로에서 가끔 가다가 길 옆에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십자가의 의미는 이 곳에서 사람이 치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막연한 경외와 함께 두려움을 느끼고 삶의 자리에서 죽은 자를 어떻게든 위로하려고 합니다. 물론 민간신앙이 많이 작용하고 있지요. 하지만 단순히 민간신앙만은 아니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감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죽음’과 꽤나 친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지요.

반대로 한국은 죽음을 꽁꽁 포장하는 느낌입니다. 아예 환자들부터 격리를 하고, 노인도 죽음에 가깝기 때문에 격리하는 분위기이지요. 노인 병원이 그렇게나 많이 생겨나는 이유일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공존하기보다는 죽음을 최대한 포장해서 마치 죽음이 없는 듯이 살아가려는 듯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숨길 수가 없지요.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요. 그렇게 마주하는 죽음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삶, 집안에 환자를 두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이들의 삶과, 환자를 병원에 격리하고 죽음을 일상에서 떼어놓는 현대화된 우리 나라의 모습은 참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든 저든 죽음은 우리에게 참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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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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