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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 신부님, 왜 성모님 이야기는 안 해 주세요?

미사를 마치는데 한 여자아이가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얼른 눈치를 챘습니다. 아마 자기 반 아이들 중에 개신교 아이가 있어서 서로 의견이 달랐을 테지요.

- 일부러 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으니 그렇지. 하지만 다음 기회가 다시 오면 해 줄께.

아주 일상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앙을 지닌 아이들은 성모님을 사랑하는데 다른 교회에서는 툭하면 우리가 성모님을 믿는다고, 성모상을 우상처럼 숭배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비판을 들이대니 학생들로서는 서로의 자존심도 있고 해서 아는 선에서 서로들 싸우는 겁니다.

성모님은 다투라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이런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서운하실까요. 성모님은 차라리 예수님의 빛에 가리워 절대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더 좋아하셨을 분입니다. 다만 인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너무나 뜨거워 당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모님의 찬가는 그 내용 자체로나 신학적인 구성으로나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모님의 찬가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풍부한 영적 보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다른 부분에서 등장하는 성모님의 모습은 굉장히 지엽적일 뿐입니다. 그 잠깐 잠깐의 등장의 순간마다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차지하는 역할을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만 쏙 뽑아서 성모님을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비판한 그 내용에 대해서 훗날 반드시 그분의 아들 앞에서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변명할 말이 있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때로 성모님을 사랑하는 신자들의 오류는 명백합니다. 그들은 때로는 우상 숭배의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고, 성모님을 하느님보다 더 위에 계신 분으로 착각하기도 하지요. 예수님이 하느님이고 성모님이 어머니시니 성모님이 급으로 치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그런 신자들의 오류는 사목자가 열심히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오류는 애정으로 고쳐 주어야 할 부분이지 서로 대놓고 싸우자고 달려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그에게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 단지 천주교 신자라고 해서 당신에게 다가와 성모님을 비판하는 사람을 만나면 성모님처럼 행동하십시오.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그 비판을 침묵으로 수용하고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비판을 시작하는 그 자체로 자신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별달리 당신이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곧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입장에서 교회를 옹호해야 하는 신학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가 믿고 있는 성모님에 대한 내용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이미 수도없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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