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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

- 모두 하느님의 나라 가고 싶지요?
- 네!
-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가지는 못합니다.

어제는 강론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통상적인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었지요.

-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렇죠? 제가 비유를 하나 들어 드릴께요. 여러분들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시라구요. 어느 집에 아들이 친구를 하나 데려와서 함께 자겠다고 아빠에게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그러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 친구라는 녀석이 집에 들어와서는 제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겁니다. 컵을 깨고, 아빠의 소중한 책들을 찢어버리고, 벽에 낙서를 하고… 그러면 그 아빠는 아들을 조용히 불러 말하겠지요. ‘얘야, 너는 내 아들이니 그 어떤 장난을 해도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이겠지만 저 친구는 아무래도 자기 집으로 되돌려 보내야 할 것 같구나.’

우리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자녀였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입적된 이들이지요. 하지만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어둠의 행실들을 버리고 하느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곳이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요. 또다른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떤 여자아이가 남자친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친구와 간절히 만나고 싶고 입맞춤도 하고 싶습니다. 헌데 부모님은 딸을 보호하려고 하기에 밤늦게 나가서 누구와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려 하지요. 하지만 딸은 기어코 나가고 싶어서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이 순간 이 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말 하지 말라’라는 계명과 ‘부모에게 효도하라’라는 계명을 내던진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는데 나는 나에게 손해를 끼친 그 사람을 좀 더 미워하고 증오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가고싶다’고 하지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고, 성공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즉시 하느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 성공해서 뭐할려구? 내 뜻을 이룰거니? 정말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 너의 성공을 소중한 데에 쓸 거니? 아니면 너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 청하는 거니?’라고 말이지요. 세상 누가 돈을 잔뜩 벌어서 남을 주려고 성공을 한답니까? 그래서 그러한 소원에 하느님은 무심하신 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진실하게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청한다면 하느님은 기꺼이 그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이들은 적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실 하느님의 나라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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