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교사 모임에서는 ‘더 나은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통상적으로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더 나은 집,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생활 수준을 이야기하곤 하지요. 더 건강하고 더 부유한 삶, ‘웰빙’의 삶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리교사들은 이미 제가 하려는 이야기를 알더군요. 바로 이러한 것들은 더 나은 삶의 지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매일같이 노력합니다. 우리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지요. 그 더 나은 것에 대한 개념이 올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세상이 더 낫다고 하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고유의 내면에 더 나은 것에 대한 방향성이 없으니 옆에서 하는 말이라도 듣는 셈이지요.
교사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더 나은 것들, 즉 더 많은 돈, 더 나은 삶의 질이 단순히 ‘더 나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여러분들에게 더 나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저마다 답변을 합니다. 그 동안 가르친 게 헛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삶입니다.”
참 아름다운 답변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저는 말을 계속 이어 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바람직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요. 과연 우리는 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자 한 교리교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고, 그 성령을 약속하신 아드님을 보내 주셨지요.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의 삶과 말씀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서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리교사가 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요? 교리책을 들고 아무리 교리 지식을 아이들에게 전한다고 한 들, 그 지식을 들고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사실 교리시간 동안에 지식을 배우기보다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고 배웁니다. 즉, 그들은 교리교사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배우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언제 태어나셨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게 아니라, 바로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세이지요. 교리교사는 예수님을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오류가 많고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지만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함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이 되어 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교리교사라는 직분입니다.
이 전체적인 구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찾지만 이미 세상에서 말하는 더 낫다는 것들이 실제적으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 내적이고 영성적인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서 신앙의 길에 들어서고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수님과 그분의 성령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더 나은 삶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고 교리교사로서 다른 이들도 더 나은 삶으로 초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매일같이 노력합니다. 우리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지요. 그 더 나은 것에 대한 개념이 올바로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세상이 더 낫다고 하는 것을 향해서 달려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고유의 내면에 더 나은 것에 대한 방향성이 없으니 옆에서 하는 말이라도 듣는 셈이지요.
교사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더 나은 것들, 즉 더 많은 돈, 더 나은 삶의 질이 단순히 ‘더 나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여러분들에게 더 나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저마다 답변을 합니다. 그 동안 가르친 게 헛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삶입니다.”
참 아름다운 답변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저는 말을 계속 이어 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은 바람직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요. 과연 우리는 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자 한 교리교사가 대답을 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고, 그 성령을 약속하신 아드님을 보내 주셨지요.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그분의 삶과 말씀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분이 보내시는 성령을 받아서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교리교사가 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요? 교리책을 들고 아무리 교리 지식을 아이들에게 전한다고 한 들, 그 지식을 들고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사실 교리시간 동안에 지식을 배우기보다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고 배웁니다. 즉, 그들은 교리교사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배우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게 아닙니다. 그분이 언제 태어나셨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정보를 안다는 게 아니라, 바로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세이지요. 교리교사는 예수님을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오류가 많고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지만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려고 노력함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이 되어 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교리교사라는 직분입니다.
이 전체적인 구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찾지만 이미 세상에서 말하는 더 낫다는 것들이 실제적으로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입니다. 그래서 더 나은 삶, 내적이고 영성적인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서 신앙의 길에 들어서고 하느님의 뜻을 찾기 시작한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수님과 그분의 성령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고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더 나은 삶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고 교리교사로서 다른 이들도 더 나은 삶으로 초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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