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눈을 뜨지도 않는데 보려고 하는 것은 억지일 뿐입니다. 눈을 뜨고 빛에 적응을 하고 비로소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눈을 뜨기 이전에 ‘의지’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로만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환경에 살아왔고 얼마나 더러운 것들을 좋아해 왔으며 여전히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역겨워하면서도 이미 거기에 길들여져 있어서 함부로 바꾸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는 기간, 이어 아는 것을 실천하는 기간은 무엇보다도 회개를 위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충격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과정은 ‘흉내’를 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당하게 될 충격과 공포는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특히나 그런 이들이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실제로는 예수님 뜻에 가장 멀리 행동하고 살아왔을 때의 그 충격과 공포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사람들은 말로만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환경에 살아왔고 얼마나 더러운 것들을 좋아해 왔으며 여전히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역겨워하면서도 이미 거기에 길들여져 있어서 함부로 바꾸지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는 기간, 이어 아는 것을 실천하는 기간은 무엇보다도 회개를 위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충격을 상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과정은 ‘흉내’를 낸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당하게 될 충격과 공포는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특히나 그런 이들이 예수님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실제로는 예수님 뜻에 가장 멀리 행동하고 살아왔을 때의 그 충격과 공포는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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