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정말 극악 무도한 사람도 무조건 용서한다면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들입니다.
과연 종교에서 말하는 ‘용서’라는 것의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느 정도의 한계는 존재할까요?
용서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회개라는 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하지요. 이러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없습니다.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는 용서란 주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그렇다면 이 뉘우침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평생을 남을 괴롭히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주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말 한마디로 회개가 이루어지고 그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 계실 적에 왼편과 오른편에 있던 강도의 예를 보면 그런 것도 같아 보입니다. 평생을 강도질을 하다가 이제 마지막 순간에 재수가 좋아서 예수님 곁에 매달려 있다가 구원을 받은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강도의 내면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악을 저지른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선한 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평소에 미리 준비되어오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과연 ‘회개’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회개는 단순한 삶의 태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즉, 한 사람이 청소를 하나도 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고 그가 회개를 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았을 적에, 그 청소하는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 다른 보상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현세적인 다른 목적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일 뿐, 실제적인 회개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내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성질이 달라서 물은 무거워 가라앉고 기름은 가벼워 뜨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물이던 것이 그 내면의 실체가 바뀌어 기름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바람 빠진 풍선이 바닥에 있습니다. 바닥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있어 그 풍선은 그 더러움을 고스란히 묻히고 있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풍선에 헬륨가스가 주입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풍선은 점점 몸을 일으키고 결국 바닥에서 몸을 띄우게 됩니다. 즉 풍선의 무게가 바뀌어 이제는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그 풍선은 여전히 바닥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그 풍선의 무게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까지는 아래를 향해서 처져 있던 풍선이 이제는 위를 향해서 떠오르는 것을 말하지요. 하지만 그 무게가 변했다고 해서 아직 그 위치가 온전히 뒤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풍선은 ‘아직은’ 바닥에 있고, 그리고 얼마나 더 떠오를 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바람이 빠지기 시작하면 위에 있던 풍선도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니까요.
회개라는 것은 내면의 뜨거운 열정, 근본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회개가 일어났다고 그의 삶이 순식간에 뒤바뀔 순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삶의 환경에 머물러 있고, 예전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여전한 일상적 삶의 고민들과 함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외면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가 여전히 바닥에 머물러 있는 한 비난을 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면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이셨고,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풍선들 중에서도 힘이 점점 빠져가서 결국 가라앉고 말 풍선들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가라앉아가는 그 풍선들이 여전히 위에 떠 있다고 그들을 찬송하고는 하지요.
회개가 이루어진 사람, 내면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사람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에게 덕지덕지 묻어있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닦아내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가 더 빨리 떠오를 수 있게 말이지요.
하지만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 여전히 어둠을 즐기는 사람에게 ‘용서’라는 것은 함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는 던지지 않는 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누구나 용서한다고 비난하고, ‘밀양’과 같은 영화에서 가증스런 종교인을 등장시켜 일반화합니다. 하지만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용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회개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아무리 극악 무도한 죄를 지어도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일 뿐입니다.
과연 종교에서 말하는 ‘용서’라는 것의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받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느 정도의 한계는 존재할까요?
용서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회개라는 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하지요. 이러한 회개가 없이는 ‘용서’도 없습니다. 뉘우치지 않는 자들에게는 용서란 주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그렇다면 이 뉘우침이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평생을 남을 괴롭히며 살다가 죽기 직전에 ‘주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말 한마디로 회개가 이루어지고 그는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 계실 적에 왼편과 오른편에 있던 강도의 예를 보면 그런 것도 같아 보입니다. 평생을 강도질을 하다가 이제 마지막 순간에 재수가 좋아서 예수님 곁에 매달려 있다가 구원을 받은 케이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강도의 내면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악을 저지른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선한 이를 알아본다는 것은 평소에 미리 준비되어오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과연 ‘회개’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회개는 단순한 삶의 태도의 변화가 아닙니다. 즉, 한 사람이 청소를 하나도 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 청소를 하기 시작한다고 그가 회개를 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았을 적에, 그 청소하는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 다른 보상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현세적인 다른 목적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일 뿐, 실제적인 회개가 이루어진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내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성질이 달라서 물은 무거워 가라앉고 기름은 가벼워 뜨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물이던 것이 그 내면의 실체가 바뀌어 기름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바람 빠진 풍선이 바닥에 있습니다. 바닥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있어 그 풍선은 그 더러움을 고스란히 묻히고 있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풍선에 헬륨가스가 주입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풍선은 점점 몸을 일으키고 결국 바닥에서 몸을 띄우게 됩니다. 즉 풍선의 무게가 바뀌어 이제는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그 풍선은 여전히 바닥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그 풍선의 무게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전까지는 아래를 향해서 처져 있던 풍선이 이제는 위를 향해서 떠오르는 것을 말하지요. 하지만 그 무게가 변했다고 해서 아직 그 위치가 온전히 뒤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 풍선은 ‘아직은’ 바닥에 있고, 그리고 얼마나 더 떠오를 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바람이 빠지기 시작하면 위에 있던 풍선도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하니까요.
회개라는 것은 내면의 뜨거운 열정, 근본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회개가 일어났다고 그의 삶이 순식간에 뒤바뀔 순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삶의 환경에 머물러 있고, 예전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여전한 일상적 삶의 고민들과 함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외면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가 여전히 바닥에 머물러 있는 한 비난을 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면의 가치를 알아보는 분이셨고,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풍선들 중에서도 힘이 점점 빠져가서 결국 가라앉고 말 풍선들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가라앉아가는 그 풍선들이 여전히 위에 떠 있다고 그들을 찬송하고는 하지요.
회개가 이루어진 사람, 내면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사람에게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에게 덕지덕지 묻어있는 더러움을 깨끗하게 닦아내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가 더 빨리 떠오를 수 있게 말이지요.
하지만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 여전히 어둠을 즐기는 사람에게 ‘용서’라는 것은 함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는 던지지 않는 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누구나 용서한다고 비난하고, ‘밀양’과 같은 영화에서 가증스런 종교인을 등장시켜 일반화합니다. 하지만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용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회개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아무리 극악 무도한 죄를 지어도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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