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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강의록

성경 강의 입문과 마르코 복음 1장

삶과 동반하는 성경
성경은 그 자체로 공부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늘 우리의 삶의 단편과 연관시켜야 합니다. 성경을 배우면서 알게 된 결과물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죠. 이런 작업이 없이는 우리는 그저 우리의 지식의 단편을 하나 늘린 셈입니다. 따라서 매번의 성경 공부 뒤에는 매번 얻게 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나의 자리에서 실천해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런 작업을 꾸준히 해 오는 사람에게 이 공부는 지극히 유익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그저 지식을 늘리겠다는 이에게 이 성경 공부는 따분한 시간일 뿐입니다.

사전 준비
매주마다 성경의 각 장을 배우게 되는데 배우기 전에 반드시 성경을 한 번은 읽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을 하는 이 과정에 일주일 내내 단 한 번도 해당 부분을 읽지 않은 채로 온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 자세를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성경 강좌의 교리교사로서 여러분에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요구하고 싶습니다. "강좌에 오기 전에 반드시 해당 장을 읽고 오십시오." 이 작업을 잘 해 온 분들은 성경 강좌 때에 성경을 들고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1장의 큰 주제의 흐름
준비 - 세례 - 유혹 - 전도 - 제자단 형성 - 구마 - 개인 치유(봉사자) - 다수 치유 - 전도여행 - 나병환자의 치유

준비
무언가를 받아들이려면 그 입구를 잘 정돈해 두어야 합니다. 온갖 쓰레기로 방구석을 어지럽혀 두고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은 그 손님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복음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자를 맞아들이는 준비작업으로 구약의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인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제시합니다. 이 준비작업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은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부분입니다. 길은 과연 무엇이고 '곧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땅에 물을 쏟아봅시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가고 지대가 높은 곳에는 물이 차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낮아도 그 곳으로 물이 모두 쏠려 버리고 지나치게 높으면 메마른 상태 그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똑같이 다가오시려는데 지나치게 낮은 구석이 있으면 거기에 머무르시고 지나치게 높은 구석이 있으면 거기를 지나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고 따라서 우리의 마음 속에도 이런 두 부분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좌절한 마음, 자기 스스로를 폄하하는 마음과 그 반대로 지나치게 교만한 마음, 자기 스스로를 높이려는 마음입니다. 낮은 마음은 주로 과거의 죄의 결과로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비롯되는 이 마음을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미리 높여 두기를 바라시는 셈이죠. 또 반대로 지나치게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쥐고 흔든다는 이 마음. 이 마음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선하심을 그 어느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 작업만 잘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그분의 은총은 물 흐르듯이 흘러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때에, 우리가 군더더기 없이 우리 스스로의 본연적 모습에 충실하게 될 때에 하느님의 거룩한 영은 그와 함께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이와 같이 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을 받으시고 다른 한 편으로 예수님은 이 세례를 도리어 정화하고 축복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세례가 단순히 '죄를 씻는' 행위의 상징이었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거룩한 예식이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통한 세례는 '성령'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세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여전히 물로만 세례를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세례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 채로 물로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죄를 씻는 세례를 받고 그걸로 그만이라는 식이지요. 전혀 다른 종류의 세례가 있으니 바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입니다. 물의 세례가 우리의 외적인 것만을 깨끗이 했다면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는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를 씻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 꼬마가 컵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 이는 외적인 세례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한 세례는 보다 깊은 함축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를 들어 한 꼬마가 지난 번에 엄마에게 당한 섭섭한 일로 복수하려고 컵을 깨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기에 기꺼이 용서 해줍니다. 이에 이 아이는 지니고 있던 섭섭한 마음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엄마를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세례'와 유사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외적인 표지로 자신의 신앙을 살아갑니다. 미사를 참례하고 법규를 지키면 '신앙인'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이 그 내면에 깃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착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지닌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단순히 외적인 표지만으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 신앙은 참으로 빈약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유혹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셨다는 이 부분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유혹을 받을 수도 있겠지…"라는 그저 막연한 생각 뿐이지요. 하지만 그분이 겪으신 유혹은 진짜였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유혹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나약함을 더욱 잘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에 빠져드는 잘못을 뉘우칠 때에 그분은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유혹을 크게 겪어낸 사람은 다시 거기에 빠져드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마치 언어를 하나 배운 사람이 다시 그 언어를 배우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유혹들은 한번 극복해 내고 나서 내성이 생기고 나면 크게 어렵지 않게 느껴집니다. 술, 이성, 마약과 같은 지극히 육적인 유혹들에서부터 명예 권력이라는 내부적인 유혹, 그리고 교만이라는 상급 유혹에 이르기까지 유혹에도 수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고 일단은 나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구별해 내는 것부터가 중요합니다.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일종의 유혹에 빠져들고 쓰러지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일어설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도의 시작
'하느님의 복음' =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것이 사실 우리 교리의 전체를 꿰뚫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당신의 통치가 이루어질 나라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 그리고 지금까지 네가 해 온 그릇된 것들을 뉘우치는 '회개'를 하고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을 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는 깨끗하고 의로운 마음, 사랑과 용서로 이루어지니 우리 역시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고 그 동안 이 땅에서 물들여온 그릇된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리는 복잡하거나 난해한 게 아닙니다. 정말 간단 명료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다른 쪽으로 자꾸 파고 들다가 그만 교리책이 두꺼워져 버린 것입니다. 교리책 한 권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한번의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다가온 하늘 나라에 대한 인지와 회개와 복음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단 형성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절대로 성전의 고위 관리층이라던지 정부 관료들이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 일을 시작하신 건 바로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원래 직분에서 크게 벗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부였고 그리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어부'에는 전혀 변함이 없는 셈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합니다. 뭐가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상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머무는 자리, 부모, 자녀, 직장인, 학생 등등의 자리에서 그저 마음을 하느님의 나라로 옮기고 같은 일 속에 전혀 다른 방향을 담는 작업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향입니다. 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했다면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제자됨이 단순히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버리고 가족을 버린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세상의 근본에서 하느님의 근본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근본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과 평안과 편의에서 마음을 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의 내쫓음
더러운 영이 활동한 곳은 다른 시장바닥이 아니라 바로 '회당', 즉 당시에 예식을 집전하던 성전이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지금의 교회 안에도 더러운 영은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아마도 다른 곳보다도 거룩한 장소인 회당 안에서 이들은 더 날뛰게 될 것입니다. 특히 회당의 더러운 영은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들을 성가시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하려는 이들을 가로막고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이 있다면 행여 '더러운 영'에 걸린 게 아닌가 하고 본인 스스로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말은 많고 행동하지 않는 이들'이 주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교회적 지식이나 인맥을 자랑하지만 전혀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배를 사랑하며 자신을 위해서 이 모든 걸 하는 이들입니다. 악마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고 그분의 의도를 알지만 전혀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공작을 펼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교회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알지만 전혀 협력하지 않고 매사에 비판만 하고 전혀 일은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장모의 치유
마르코 복음의 첫번째 치유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치유를 받은 뒤에 바로 그들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결국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일할 이들부터 치유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들 가운데 이 치유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무적이라서 교회 안에서 그런 봉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 역시도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먼저 그들을 보살피고 치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면 가까이 있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보살피기를 내팽개쳐 버린다면 그들은 결국 견디다 못해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병자의 치유
이어서 예수님은 본격적인 치유 활동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 치유의 근본 목적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단지 그들의 육신을 낫게 하는 게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보다 극명하게 마귀들의 말을 가로막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치유가 목적이었다면 예수님은 엄청난 광고를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치유 센터를 개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질적인 치유에 관심이 있었고 마귀들은 예수를 유명하게 만들어 버려서 이를 가로막으려 한 셈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전도여행
예수님의 목적은 유명해지거나 권력을 얻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짧은 생애 동안 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으셨고 이곳 저곳 다니시며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어둠의 영)을 쫓아내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나병환자
나병환자에게서 예수님의 유명세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보여집니다. 사실 이 나병환자의 치유는 예수님의 사목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에게 불쌍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치유하게 되었고 결국 그 나병 환자는 자신의 입을 주체할 수 없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널리 퍼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보다 본질적으로 원하셨던 복음화 사업보다는 '치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악마들은 이를 원했던 것이지요. 그분의 활동을 가로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질은 육의 치유가 아닙니다, 본질은 하느님의 복음이 널리 전해지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은 이 부분에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자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돕는답시고 기도보다는 단순히 돈을 보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조심해야 합니다. 돈 맛을 알게된 사람들만큼 복음화 사업에 위험한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

2장의 주제의 흐름
치유의 계속(육체) - 죄인과의 만남(영혼) - 단식 논쟁(법규와 본질) - 안식일(법규와 본질)

2장은 그리 길지 않은 느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계속되지만 이제 예수님이 보다 본질적으로 무엇을 치유하고 싶으신지가 잘 드러나게 됩니다. 나아가 단식 논쟁과 안식일 사건으로 외적인 법규와 보다 본질적인 것 가운데 무엇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든 들어가시면서 가장 먼저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최우선시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의 혜택을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찾아옵니다. 그는 바로 중풍 병자였습니다.

타인을 위한 전구, 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것은 '중풍 병자'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중풍 병자는 다른 네 사람이 들것에 싣고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진리 하나는 '타인을 위한 전구, 기도'라는 주제입니다. 때로 우리의 생에 영적으로 중풍 병자의 꼴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자기 스스로 선을 찾아 행할 줄을 모르고 언제나 세상 것을 향해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리스도 신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그리스도 신자 가정에 더 많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부드러울텐데, 이 신자라는 딱지를 단 사람들은 벌써 한 번 맛을 보았으니 안다고 생각하고는 거기에서 멈춰 굳어져버린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굳은 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4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음을 모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한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영적으로' 이끌 수가 있습니다. 미사 중에 하는 신자들의 기도 만이라도 우리가 마음을 진심으로 모은다면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들의 믿음
중풍 병자는 그렇게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보신다는 것에도 주목합시다. 앞서의 주제에 상응하는 대목입니다. 사실 중풍 병자는 만사가 귀찮은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침대에만 누워 있고 싶은 마음에 예수님 앞에 오기 전에 그를 데려가려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이 술주정이 심하고 신앙에 전혀 관심이 없을 때에 아내는 자녀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남편의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죄의 용서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첫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조금 뜬금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몸이 굳어 있는 환자를 데리고 갔는데 '죄'를 운운하다니요.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지니신 분으로 모든 사물의 진수를 꿰뚫고 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했다는 것은 실제로 중풍 병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중풍의 치유가 아니라 그 마음 속의 '죄'의 치유라는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몸의 병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의 육적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신앙에 매달리는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별을 잘 해야 합니다. 우리의 악습에서 비롯된 병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작된 병이라면 정말 이 병이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좋으신 하느님은 애초부터 그걸 시작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병을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걸 껴안음으로써 얻게 되는 영적인 열매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고통스러워 하는 병자는 곁에서 그 고통을 함께 해 주어야지 이런 가르침을 주면서 '알아서 해라'라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사랑의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는 '육'의 치유에 앞서서 '영'의 치유를 선행하시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보다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권한
이어 예수님에게 의문을 품는 이들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권한을 신비로운 양식으로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분은 '영의 치유'의 권한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육의 치유'를 마치 손쉬운 일을 하듯이 처리하십니다. 그저 말 한 마디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그 일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청원
우리는 예수님을 무엇 때문에 찾고 있는 걸까요?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우리의 영의 치유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여전히 현세적인 어떤 목적을 갈구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스스로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청하고 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총을 가득히 부어 주시니까요. 그러니 쉬지말고 청하십시오. 당신의 기도가 하늘에 닿게 하고 당신의 정신이 깨치지 못한 것들을 성령께서 대신 청하게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안의 성령의 청원을 들으시고 필요한 것을 이루도록 도와 주게 하십시오.

레위와 세리와 함께한 식사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짧은 한 마디의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 모든 죄인들에게 크나큰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반대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성가신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언제나 두 부류가 있으니 한 부류는 언제나 자신을 낮은 자리에 두는 부류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서 밝히 드러나시게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온갖 선의 근원이신 그분 앞에서 자신의 나약과 부족을 뼈저리게 체험한 이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을 그야말로 간절히 필요로하는 이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는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많고 이미 오른 직분도 높아서 함부로 내려오려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합당한 권위가 명령할 때조차 그 권리를 포기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들은 눈 먼 이들이며 마음이 닫힌 이들입니다. 이들은 순명의 가치를 모르며 반대로 온 세상이 자기에게 순명하기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이 두 부류에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합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는 말씀이 반대로 교만하고 가진 자들에게는 비판의 말이 되어 버립니다. 같은 입에서 동시에 두 방향으로 말씀이 나아가는 셈입니다. 과연 우리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그걸 알아보는 건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서 기뻐하나요 아니면 성가시게 되나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답은 가까이 있습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이번 장을 꿰뚫고 있는 주제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껍데기 신앙에만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일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마음과 정신에 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옛 것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의 대표격은 '율법'입니다. 율법이란 아직 인간들의 의식이 깨이지 않았을 무렵 약자를 보호하고 악한 이들을 벌하기 위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자신이 가진 틀에다 비춰보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은 '법'에 사로잡혀 있지요. 법이 하는 역할은 '죄악'을 극명히 드러내는 것 뿐입니다. 법은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지요. 법은 무엇이 죽을 죄인지를 극명히 밝혀주지만 반대로 '사랑'을 드러내지는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쩌다 한 번 고기를 구웠는데 그 날이 금요일이었습니다. 이런 따스한 어머니의 마음을 법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규정대로 심하게 벌하겠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그 법을 뛰어넘어 그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감싸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보다 본질적인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법이 왜 생겨났는지 그 법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지. 이런 가르침들은 온전히 새로운 것이어서 새로운 그릇이 필요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옛 것에 길들여져 있었고 옛 것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릴 수 밖에요.
예수님은 모든 혼인 잔치의 주인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그 나날들이 얼마나 기쁜 나날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은 슬픔에 잠겨있을 틈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건강히 먹고 마시면서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처럼 이들은 곧 예수님을 빼앗길 운명이었고 그때에는 마땅히 단식을 하고 슬픔과 비탄을 마음 속에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 밀이삭 사건
앞서의 새것과 헌것 논쟁은 이 안식일에 행한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으로 더욱 확고해집니다. 누가 누구의 주인인지,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그 다음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위해 모든 법규와 규정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르코 복음 3장

오그라든 손과 오그라든 마음 -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예수님이 원하는 것 - 열두 사도의 선발 - 예수와 베엘제불 - 예수님의 참 가족

3장에서는 여전히 이어지는 치유사화, 하지만 그 내면의 본질은 영적인 것을 향해 있는 치유사화와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현명하게 맞이하시는 모습, 그리고 배반자가 섞인 열두 사도의 선발, 사람들의 모함, 그리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 등등 다양한 주제들이 산발적으로 나옵니다.


오그라든 손, 오그라든 마음

한 사람이 뭔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안식일과 회당이라는 내용에 뭔가 동떨어진 느낌이 되어 버렸지만 분위기를 보다 현대적으로 바꾸어서 주일과 성당으로 그리고 그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꾸어 보도록 합시다. 보다 직접적인 분위기가 보이는 듯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
먼저 우리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많은 이들이 '주일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며 주일을 나오고는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살아가고는 있는 것일까요? 혹은 주일은 쉬어야 한다며 막연히 몸을 놀릴 생각을 하거나 특별히 죄 짓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진탕 마실 생각을 하지는 않나요? 주일의 본연적인 의미는 '주님의 날'입니다. 올바르게 육신의 휴식을 취하면서 주님께 드려야 할 공경을 합당하게 드리는 날이지요. 지금 바리사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일의 의무'라는 그 외곽선만 넘지 않는 선에서 도리어 엇나간 모습을 더 많이 드러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마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은 아랑곳없이 '안식일 법'에 집중하여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주일의 진정한 의미'는 아랑곳 없이 '주일의 의무'에만 집중하여 그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온갖 다른 일을 계획하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일은 오전에 성당에 잠깐 다녀온 뒤에 그 동안 못 논 걸 진탕 먹고 마시면서 노는 날이 아니라 그동안 세속의 일에 몰두해 있던 영과 육을 진정으로 쉬게 하고 주님의 뜻을 찾는 날입니다. 따라서 참된 의미의 안식을 취하거나 그 동안 마음쓰지 못했던 필요한 봉사를 할 수도 있는 날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봉사를 강요당하거나 소위 '성당일' 만을 한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지는 못한 모습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이
자 이런 거룩한 날에 도움을 청하러 사람이 왔습니다. 딱히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해서 '병자'나 '거지'를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범위를 확대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주변을 조금만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우리가 꾸준히 무시한 사람.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의미를 상징적인 표현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가장 필요한 부분,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부분이 오그라들어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바로 우리의 가족 안에 그런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손의 자리에 '마음'을 넣어봅시다. 그 사람은 바로 여러분의 부모이자 아내이고 여러분의 자녀들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안식일의 법'을 지킨다는 허울좋은 핑계로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마음이 오그라든 이
전혀 다른 의미의 마음이 오그라든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마음을 굳힌 이들입니다. 우리 역시도 자주 빠지게 되는 오류 가운데 하나는 '정당한 미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아무런 이유가 없이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합당하고 정당한 미움의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미워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하느님께는 바로 '부당함'이거늘 우리는 그 가장 큰 부당함을 무시하고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이유에 정당함을 부여하려 한다는 모순입니다. 바리사이의 완고한 마음에 예수님은 슬퍼하셨듯이 지금 우리의 정당한 미움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슬퍼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모여든 군중
군중은 예수님을 밀쳐대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병을 고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딜 가시든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유일한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에게 전혀 다른 관심사로 찾아오는 이들 앞에서 참으로 현명한 방법으로 처신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배를 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를 이용해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그들과 직접적인 대면은 피하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속적인 관심'을 지닌 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을 마냥 내치는 것도, 그리고 그들 안에 온전히 함께 머무는 것도 결코 좋은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현명한 방법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두면서 그들에게 하늘 나라를 전하는 방법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배'였습니다. 과연 우리 사목자들은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 걸까요? 그건 각자가 찾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세속적 관심사로 당신의 일상을 '밀쳐대게'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서 온전히 '동떨어져서도'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진탕 골프만 쳐대는 사제는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혼자 거룩한 사제도 반성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맺는 우리의 친교를 사람들에게 전해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부르짖음
더러운 영들은 다른 모욕적인 언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부르짖음을 연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이르십니다. 결국 아무리 허울 좋은 말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귀에 아름다운 듣기 좋은 말을 찾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높아져가는 자존심과 교만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성도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달콤한 언사는 결국 우리의 성령에 따르는 진정한 사도적 활동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합니다.

열두 사도의 선발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시고 그들을 부르신다는 것에서는 굉장히 '영적인 상징'이 읽혀집니다. 예수님은 평지에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당신이 높은 곳에 올라가시고 그들이 따라 오도록 합니다. 우리가 흔히 논하는 '리더'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먼저 앞서서 나아가고 그리고 사람들이 뒤따라오도록 합니다. 흔히 사람들을 밀쳐대는 '보스'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의 등을 떠다미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에서 배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올라서고, 나서고, 궃은 일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길에 사람들을 불러야 합니다.

제자들이 받은 권한
'당신과 함께', '파견', '복음 선포', '마귀 퇴치' 이 4가지가 전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파견을 받았으며, 복음을 선포할 줄 알았고, 마귀를 퇴치할 줄 알았습니다. 당신의 첫 사도들의 권한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권한을 지니고 그대로 행사한다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는 셈입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주님의 파견을 받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의 권능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지막 항목인 '마귀 퇴치'는 광범위하게 이야기해서 세상에 깃든 악을 저지하는 모든 활동을 말합니다. 꼭 구마예식을 해야 마귀가 퇴치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때에 그 자리에는 그 어떤 마귀도 머물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 제자
예수님의 마지막 제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긴 유다였습니다. 과연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예수님이 유다의 배신의 기질을 모르셨을까요? 우리는 이런 예수님에게서 '부족함'을 감싸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 유다의 마음을 알고 계셨지만 당신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감싸 안을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는 수난 전날 저녁 마지막 만찬의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끊임없는 경고를 주시면서 그가 마음을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모습이 그릇에 함께 손을 넣는 장면에 묘사됩니다. 결국 유다는 마음을 굳혀 버렸고 약속된 수난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만일 유다가 그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꾸었더라면 예수님의 사명은 몇 년 더 이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런 '만일에'라는 가정은 전혀 소용없는 짓입니다. 우리는 배신자의 대표격으로 '유다'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바꿀 자유를 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
질투에 사로잡힌 이들은 예수님의 영을 모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참으로 중요한 언급이 하나 등장합니다. 모든 죄와 신성 모독하는 발언도 용서를 받을 터인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죄만 피할 수 있다면 다른 것들은 기꺼이 용서를 받는다는 말이니 어찌보면 구원의 열쇠가 되기도 하는 말 같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
단순하게 생각하도록 합시다. 성령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영입니다. 우리의 육은 정신의 명을 받들고 우리의 정신은 영의 명을 따릅니다. 오직 두 종류의 영이 있으니 하나는 성령이고 다른 하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언제나 이 두 흐름에 내어맡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선의'와 '악의'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악의'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의'를 '악의'로 비난한다면 그는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작용인 '선의'는 누가 지니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선의'는 성령의 작용으로 누구나 지닐 수 있습니다. 뻔히 악을 하는 자는 드러나지만 '선의'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도대체 '선의'를 지녔는지 아닌지 우리로서는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뻔한 악행은 분명 '악의'의 발로입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악행을 하는 자 앞에서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가 '선의'를 회복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바꾼다면 그들의 악행은 하느님 앞에 잊혀질 것이고 그들은 '성령'을 따라 구원을 입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온갖 약점과 어두움에도 절대로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되고 이는 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심판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살아 숨쉬는 그 누구에게도 마지막 희망을 건다면 우리는 최소한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
같은 공간에 거주한다고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립하신 진정한 가족의 의미는 내면의 일치,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을 '가족'의 범주로 넣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앞으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게 될 모든 이들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뜻' 안에 일치해서 한 가족이 될 이들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가족으로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4장(하느님 나라 비유 컬렉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비유 - 해설 - 등불 - 저절로 자라는 씨앗 - 겨자씨 - 비유로 가르치기 - 풍랑

4장에는 풍성한 교리교육 재료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교리교육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올바로 심어주는 것이고 그것이 일단 한 번 심기고 나면 알아서 싹이 트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4장의 전체적인 구조는 굉장히 단순합니다. 먼저 마음의 준비를 잘 시킨 다음에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잘 알려주고, 그리고 실제 삶으로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불안 속에서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체험으로 알려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
여전히 예수님의 기적을 통한 '현세적 인기'에 편승해서 모여든 군중들을 피해서 예수님은 배 위에서 가르치십니다.(3장 참조) 그리고 그들의 마음밭을 비유의 말씀으로 잘 가꾸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아주 유명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옵니다. 사실 이 구절은 따로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강론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비유를 들고 그리고 그것을 따로 제자들에게 해설도 해 주십니다.

삶에서 나온 비유
예수님의 비유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 환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설교가들은 이 점을 유심히 지켜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우리는 '언어의 폭력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비자 교리 때에 성경을 설명하면서 적잖은 이들이 성경의 권수나 복음 사가들의 역사적 배경 등등을 설명하려고 애를 쓰면서 예비자들을 '질리게' 만듭니다. 그런 설명은 학교 교육 안에서 충분히 받은 것들입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예비자들이 현재 처해있을 만한 상황 속에서 적절한 비유를 찾아 내어야 합니다. 문득 찾아온 누군가의 방문과 좋은 소식이라던지, 처철한 아픔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이라던지, 이런 저런 현대인의 삶 속의 현실을 바탕으로 적절한 비유를 들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오늘날의 산업 사회에서는 '씨도 안 먹히는' 일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예수님은 당신의 이웃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누가 들을 귀가 있을까요? 호수 주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들을 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진실함과 그 영적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렇게 말하니 엄청 어려운 느낌입니다만…), 즉 '의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의지, 의도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혀 엉뚱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흘러가 버립니다. 마치 사춘기 소녀가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어 죽겠는데 엄마가 옆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씨도 먹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벌써 그 내면의 의도가 '들을 마음이 없기'에 귀로 들려오고 있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셈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의지',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
이 부분은 언뜻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 아니 하느님의 원의는 모든 이를 구하는 것일진데 어째서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행여 선택된 이들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일까요? 과연 '운명'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운명
우리에게 운명, 즉 정해진 방향은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선한 이들은 그 상급을 받고 악한 이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운명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운명의 결정권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이들로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지닌 이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의 의미로 되돌아가서 이해를 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어둠의 운명을 선택해서 멸망하는 이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단언하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신 의도는 그런 이들이 지금 이 말을 듣는 동안이라도 마음을 바꾸라는 경고를 하고 계시는 셈입니다. 예수님의 말은 뒤바꾸면, '알아보고 깨달아 돌아오면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미묘하고 알쏭달쏭한 것 같지만 조용히 성찰해 보시면 예수님의 본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비유를 듣는 동안 경각심을 가지고 깨달으려고 애를 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깨닫고 알게 되는 순간 구원은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해설
그리고 예수님은 친절하게 제자들에게 그 뜻을 풀이해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해설에 대해서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쓰시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시고 그리고 친절하게 풀이해 주셨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등불의 비유
빛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우리의 선한 의지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감추려 든다면 그것은 빛이 아니고 수치인 탓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진정 빛으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신앙은 빛이 아니라 수치인 모양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하니 말이지요. 여기서 드러내라는 말이 길거리에서 외치라거나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귀찮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바를 삶으로 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하라'고 배웠고 '용서하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된다'는 것도 배웠지요. 하지만 왜 그리 실천하기가 힘이 들까요? 반면 우리는 일상 안에서 세상 소식은 어찌나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리는지요. 자신이 아는 최신의 소식, 최신의 사건 사고들은 사정없이 떠벌리면서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진솔한 삶을 나누는 건 왜그리 부끄러워하는지요? 그 말인즉슨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차를 한 대 새로 사면 자랑스러워하지만 우리 안에 십자가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숨기려고 합니다. 결국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생명의 책에서 제외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이런 비유들을 트럭으로 갖다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들어도 들어도, 보아도 보아도 전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여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예비된 결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멸입니다.

주는 만큼 받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주고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해서 사실 아무것도 주고 있는 게 없습니다. 받을 줄 뻔히 알고 주는 것은 주는 게 아닙니다. 투자하는 거지요. 눈에 뻔히 보이는 결과 속에서 받게 될 걸 알면서 준다면 그는 '자선가'가 아니라 '자본주의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받을 것이다'는 현세적인 의미의 되받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받을지는 우리 중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오직 그 '신뢰'하나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또 반대로 우리가 주는 것이 '증오', '질투', '시기'와 같은 것이라면 그 또한 고스란히 받게 될 것입니다. 하긴 우리는 그런 어둠의 것들은 곧잘 타인에게 내어줍니다. 그리고는 돌려받지는 않으려고 하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것들도 분명히 내어 준 이들에게 돌려주시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더욱 거룩해지고 애를 씁니다. 반면 영이 흐트러져 있는 이들, 세상 일에만 몰두해 있는 이들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것들도 모조리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의 심층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말이 얼마나 기쁨의 소식이며 또 반대로 '경고'의 소식인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심고', '추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일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눈을 뜬 이는 누구나 '심거나', '거둡니다'. 우리는 많이 심어야 합니다. 일단 제대로 심기만 하면 분명히 그 땅에 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꾸려고 기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심는 작업'만 충실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직 줄기가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열매가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열매는 때가 되면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씨앗을 뿌리고 뿌리고 또 뿌려서 일단 심겨지게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때로 많은 사목자들, 교리교사들이 심고는 열매를 기다리다가 지쳐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명은 열매를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추수꾼은 전혀 다른 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걸 추수하려고 애를 쓰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열매가 자라나 있고 전혀 다른 사람이 추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억울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누군가가 뿌린 씨의 열매 덕을 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에 순교자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신앙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우리는 그 달콤한 열매를 맛보고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에게 맡기고 때가 되면 그 자리를 떠나거나, 아니면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만 주어진 기회 안에서 씨를 많이 뿌리려고 노력하십시오.

겨자씨의 비유
일단 하느님의 나라가 심겨지기만 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과거에 코나 흘리고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훗날 고향의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의 가르침도 일단 사람 안에 심어지고 나면 그 사람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이들이 그 나무 그늘에 쉴 수 있을만큼 커져버리게 되지요. 하느님의 일은 놀랍기만 합니다.

비유
앞서 말씀드린 '비유'를 복음 안에서 새로이 요약해 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생활화한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에서 가르칠 거리를 만드셨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교사들'은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행여 나는 현학적이고 어려운 신학용어를 들이대면서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정말 좋은 강론이란 신학 잡지에 게재될 강론이 아니라 '초등학생도 알아듣는' 강론이어야 합니다. 어려운 말을 곧잘 쓰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 걸 전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걸 '과시'하려는 것이 목적인 경우가 다분합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사실 배울 것이 없습니다. 좋은 스승은 괴상한 말을 툭툭 뱉는 사람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풍랑을 가라앉힘
앞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실사판이랄까요? 눈 앞에 닥친 어려운 현실에 허덕이는 제자들 앞에서 에수님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온 존재를 차지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두려움과 겁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을 '알지 못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의 비유를 들었지만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세상에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주종관계'가 분명했습니다. 태풍이 불고 불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고, 우리가 죽고 사는것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설령 죽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진데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는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번 4장은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 나라'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거듭 거듭 읽어보시고 온전히 이해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움, 그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라도 훌훌 털어 버리시고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아멘.


마르코 복음 5장

구마와 치유

5장은 2가지(엄밀히 말하면 3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이고 다른 하나는 '치유' 나아가 '부활'입니다. 본격적인 이해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에게 나의 영혼이 환하게 열리도록 도와주시라는 짧은 기도를 바치는 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마귀들과 돼지 떼

더러운 영의 특징
이야기는 속히 진행됩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 건너편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의 특징이 나옵니다.

- 무덤에서 살았다.
그는 죽은 이들 사이에 머무릅니다. 더러운 이들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산 이와 죽은 이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현세 생명의 끊어짐이 죽음이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죽은 이의 특징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아마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을 파헤치기도 하고 시체들을 손상하기도 했겠지요. 이처럼 죽은 이들은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의 손아귀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회색 빌딩 숲 속에 살면서 세상이 가르치는 가치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자신의 생각은 전혀 없고 그들이 주입시키는 생각에 따르는 이들, 바로 우리 현대인들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죽은 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증오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상태에 늘 빠져 영혼의 올바른 선택을 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이고, 따라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바로 우리 가운데 살아갑니다.

-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이는 '구속'을 거부합니다. 그 어떤 연계를 거부하고 끊어 버립니다. 육체적으로야 쇠사슬만큼 튼튼하게 구속을 할 수 있는 것이 달리 있겠습니까마는 영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구속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명'이라는 주제와 직결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가르침도 거부하려는 반항적 기질을 품고 있습니다. 가볍게는 집안에서 가장의 명, 혹은 부모님의 명에 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올바른 기강을 위한 틀도 거부하고 교회 안에서도 주임 사제의 명을 우습게 봅니다. 나아가 때로는 사제들도 주교님의 명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런 불순명은 태초의 죄악에서부터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거부한 첫 인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복음서의 더러운 영도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는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명에 불순종할 때에 우리에게도 더러운 영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구원에 직결되지 않는 이상은 장상의 명이 아무리 어리석어 보여도 마땅히 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명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된다면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일을 당신 측에서 진행하실 것이고, 순명 없이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곧장 더러운 영의 조종을 받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 소리를 지르고
더러운 영의 특징인 분주함과 소음입니다.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분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머물러 성찰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모습에서 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쁩니다. 인터넷으로 세상 돌아가는 기사를 검색할 시간은 있어도 한 5분 하느님 앞에 앉아 머무를 시간은 없습니다. 텔레비전은 밤새도록 볼 수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은 그런 분주함으로 채우고 있고 이런 분주함과 소음은 그야말로 악한 영의 특징입니다.

-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자기를 해치는 일, 자해를 공공연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현대인들 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해'를 하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해가 되는 줄을 모르고 세상이 좋다는 활동을 모조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관점은 주로 '영적인 관점'이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우리는 영적으로 어떤 자해를 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여가 활동은 곧잘 우리의 영혼을 해치는 활동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쉼'은 영육간에 조화된 쉼이 아닌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쉰다는 핑계로 술을 진창 마신다던지 몸을 더욱 피곤하게 하고, 나아가 영적으로도 해악을 끼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해를 하는 이들이고 그 주체는 자신이 받아들인 '더러운 영'입니다.

- 간교함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인 줄 고백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에 미묘하게 비꼬는 부분이 있으니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간 적도 없고 그저 그 지방에 도착했을 뿐이며 실제로 다가온 것은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마르코 5장 6절) 악마의 간교는 대부분 이렇습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언제나 그 사실 안에 약간의 과장이나 거짓이 첨부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뜻 사실을 전파하는 듯 하지만 그 안에 누군가를 향한 적대감과 악의가 깃들어 있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둘 사이를 갈라 놓는 활동을 곧잘 합니다. 행여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말들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 어떤 악의 섞인 과장이나 허풍도 삼가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것에 대해서 발언하는 적지 않은 이들은 자기 안에 은근한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걸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마

- 신원을 밝히기
이제 예수님의 차례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처음에 하시는 일은 그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변 동네 사람들이 절대 하려고 생각지도 않은 일을 시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인격적인 만남'이었습니다. 타인을 돕는다며 '생각만'으로 돕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도 가고 남미도 갑니다. 오직 생각만으로 말이지요. 그리고는 자신이 도울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계획보다 오히려 나의 곁에 있는 형제에게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가서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피기만 해도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셈이 됩니다.

- 물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수많은 어둠의 영은 돼지떼를 선택했습니다. 주변의 하고 많은 것들 가운데 왜 하필 돼지떼였을까요? 그 돼지떼에는 사람들의 탐욕이 깃들어 있고, 어둠의 영들은 그 돼지떼에 붙어 있는 사람들의 집착을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이는 전적으로 제 개인의 추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지금 눈 앞의 한 사람이 더 중요했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어둠의 영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 주십니다. 천 마리쯤 되는 돼지떼보다도 한 사람의 영혼이 소중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돼지떼는 모두 호수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는 분명한 어둠의 영의 작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지만 일어난 일(재산의 손실)에 절망하고 진정 소중한 분을 도리어 쫓아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 상황의 반전
결국 예수님은 단순히 이 더러운 영에 들린 한 사람만을 보신 게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던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만드신 셈입니다. 사람들은 '재산'을 선택했고, '영원한 생명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에 도리어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따라 나서기를 청합니다. 상황이 그야말로 역전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그 고장 사람들이야말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임이 드러났고 지금껏 더러운 영에 들렸다고 생각했던 이가 구원된 모습을 드러냅니다.

- 선교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따라 나서는 걸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깁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리고 그는 한 명의 선교사가 되어 두려움 없이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지방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마는 단순히 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시시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때로는 쓰러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을 올바로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한 명의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 - 딸을 사랑하는 회당장 아버지의 겸손
"한 사람이 청을 드려서 예수님이 일을 하신다." 라는 단순한 구조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보다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회당장이 와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단순히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회당장은 당시 사회 신분으로 보면 엄청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이고 사람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던 직분입니다. 이는 마치 한 주임 사제가 신자들이 가득 모인 곳에서 용하다는 한 평신도를 찾아 가는 모습과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요. 그래서 이 부분이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아버지가 뭔가를 청한 것이 아니라 이 아버지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내려놓는 모습을 보인 셈이지요. 그래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밀쳐대며 따라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
소박한 믿음
이 가운데 하혈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무려 12년 동안 그 병을 앓고 있었고 가진 것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렇기에 내면에 이런 저런 어두움과 원한이 자리잡을 만도 하건만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가졌던 생각은 지나치게도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런 소박하고도 신실한 믿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해서 커다란 스타디움에서 소리를 꽥꽥 질러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야 '와아~!!!!!'하고 감탄을 하지만 실제로 기적을 가져가는 이들은 이런 소박한 믿음을 지닌 채로 매일 미사에 묵묵히 참여하는 이들, 주임 신부의 모난 성정을 기꺼이 견디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사람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촛불을 켜고 묵주알을 돌리는 사람들입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교님과 친구라고, 어느 신부님과 친척 관계라고 뭔가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소박하지만 굳건한 믿음이 우리를 하느님 가까이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하혈이 멈춘 것을 느꼈습니다.

믿음의 시련
하지만 이 여인의 기적은 여기서 단순히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당신에게서 기적의 힘이 빠져나간 걸 눈치챈 예수님이 소위 그 '범인'을 찾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인에게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냥 숨겨 버리고 혼자 조용히 물러날 수도 있었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엎드려' 일어난 일을 고백합니다. 이 믿음의 용기가 그녀에게 더 큰 위안의 말을 전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단순히 하느님 앞에 고백을 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으시지요.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용서야말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의 사죄경은 진실로 고백하는, 그야말로 '두려워 떨며 엎드려' 고백하는 신자에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대충대충 주일미사 빠진 것이나 내던지고 도망가려는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영적 위안이 없게 되지요.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받아 넘쳐 흐르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셈입니다. 이 하혈하는 여인의 소박한 믿음과 주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 안에서의 고백은 이 여인에게 '구원'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이 말을 듣는 그 기쁨은 어떠할까요? 충분히 느껴보실 수 있으니 진솔한 고해성사를 준비해서 사제 앞에 나서십시오.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사죄경은 그 사제가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는 예수님의 도구로서 그 사죄경을 여러분들에게 내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치를 하느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구원'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딸의 죽음과 아버지의 신앙
그러던 차에 딸이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회당장의 신앙을 점검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딸이 죽었다고 알린 사람의 소식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제 회당장은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반응과 그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를 슬퍼하며 소란을 떨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바로 이 때에 회당장이 사람들의 편에 섰더라면 그 다음 구절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이라는 구절이 오히려 정반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회당장과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내었겠지요. 하지만 회당장은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하기로 한 셈입니다. 만에 하나 딸이 되살아나지 못할 때에 자신이 받게 될 비난과 조롱을 회당장은 짊어진 셈입니다. 그리고 가족과 예수님 일행은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를 받게 되지요.

탈리타 쿰!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죽음의 잠'에 빠져 있던 아이가 일어나게 되는 장면입니다. 소녀는 일어나서 걸어다니고 사람들은 놀라 넋을 잃습니다. 이 감격의 순간에 잠시 머무르셔도 좋습니다. 복음서를 내려놓고 회당장의 마음이 되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함구령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제자와 그 부모들만이 알아야 했지요.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걸어다니니 이보다 더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알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거듭 알리지는 말 것을 명하십니다. 당신의 복음 선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명성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행동반경을 극도로 제한하고, 또 결과적으로 예수님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애정
그리고 또 하나 잊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행한 업적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오히려 오랜 굶주림에 배가 고플 소녀를 걱정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만일 어느 설교가가 이런 일을 해 내었다면 자신이 행한 업적에 대한 자랑 스러움에 당장 그 주인에게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함구령과 더불어 소녀를 챙기십니다. 그분의 겸손과 따스함이 느껴지시는지요? 이 분이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마르코 복음 6장

고향 사람들의 무시 - 열 두 제자의 파견 - 헤로데의 생각 - 세례자 요한의 죽음 - 오천명을 먹인 기적 - 물 위를 걸으심 - 겐네사렛의 치유

고향에서의 복음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분이 그 동안 사적인 생활로서 살아오셨던 곳에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러 가신 셈입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 가족과 친척'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현세적인 그리고 피로 이어진 관계 안에서 때로 우리는 가족 안에서 늘 이 '복음화'를 미루기 쉽상입니다. 언젠가는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 또는 '가족인데 뭘~'이라는 아주 가벼운 생각을 바탕으로 때로는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복음화 작업을 소홀히 하곤 합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육적 본거지에 돌아가셨고 거기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척에게도 주저함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이 나에 대해서 품고 있는 온갖 생각으로 내가 하는 말의 권위를 무시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결정입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참된 권위에 대한 무지
이어 등장하는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은 타인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사고의 흐름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놀라면서도 곧이 곧대로 듣기보다 그의 현재의 배경과 권위에 비추어보기 일쑤입니다. 유명한 누군가가 시덥잖은 말만 해도 난리가 나지만 시골 출신의 현자가 제 아무리 주님의 뜻을 드러내어도 사람들은 그의 현재 갖추고 있는 여러 권위와 배경을 두고 무시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뭔가 좋다는 말이 있으면 우리는 그 즉시 그 발언자의 권위를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가 그 말을 할 만한 권위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는 그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말을 다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예컨대 이런 문구를 만난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 곳에 가고 싶다. - 성서학 박사 OOO"
사람들은 뒤의 타이틀부터 바라보면서 앞의 말에 의미를 찾기 시작하고 때로는 화자가 전혀 상상도 못한 결과가 도출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 박사는 '그 곳'을 단순히 '화장실'을 의미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박사의 권위로부터 온갖 상상을 유추해서 그 곳이 다름아닌 '예루살렘'이라느니 '천상 낙원'이라느니 하는 온갖 억측을 이끌어냅니다. 또 반대의 경우는 이런 느낌입니다.
"엄마 아빠, 서로 싸우지 마세요 - 우리집 아이"
아이가 진심으로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충고를 전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아이의 발언을 쉽사리 무시하고 맙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에 우리들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져 왔던 예수님의 초대를 무시해 버린 책임을 묻게 될 것입니다.

내 곁의 예수님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다면 그분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실제로도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으니 교회의 제일 큰 어른으로 대접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마디 하나하나에 전 세례는 매번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긍정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우리는 때로 보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으니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 실제로 들려오는 나의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장 40절) 라는 말씀 안에는 단순히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해 주는 것만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여기에는 그들의 '요구'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시사적인 거대한 흐름에는 쉽게 관심을 갖고 참여를 하지만 정작 우리 가장 가까이에 머무르는 이들의 요구에는 냉담하기 쉽습니다. 바로 내 아내, 남편, 나의 아이들과 집안의 어르신의 요구에 우리는 둔감하면서 밖으로는 참으로 선하고 착한 인상을 심어주려는 헛된 노력에 빠져있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서 무시당하고 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관점, 즉 믿음이 없는 것에 놀라워하고 계십니다. 어디에서나 존경받는 예언자를 찾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계시니까요.

기적의 근원
우리에게 솔깃한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기적'에 관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굉장히 나약해진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른 곳에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옷깃만 스치는 것으로도 치유했지만 정작 당신의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 외에는 아무런 기적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기적의 발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기적은 기적을 발현하는 자의 의도보다는 그 기적을 받고 싶어하는 자의 간절한 원의와 믿음에 더 큰 바탕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여러분이 지금 곁에 함께 지내고 있는 그 어떤 사제에게 다가가더라도 여러분에게 간절한 원의와 믿음이 있다면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아무리 용하다는 사람이 오더라도 여러분들이 의심을 품고 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다가가야 할까요? 어떤 사람을 찾지 마십시오, 오히려 미사를 통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에게 직접 다가가십시오. 그분의 성체를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믿고 받아모실 때에 우리의 원은 너끈히 채워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람
예수님도 놀라십니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계시는 듯한 분이신데 그분의 '놀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 '놀라게' 될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접했을 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의 '불신'에 대해서 놀라고 계신다는 말은 그들이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 아무리 고향 사람이지만 당신께서 예상한 믿음의 결과물들이 있어야 하는데에도 그 순간 사람들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신앙에 대한 선택이 그 '외적인 영향' 때문에 좌절되는 것을 보고 놀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놀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우리들이 지닌 '자유의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향 마을에서 예수님은 무척이나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마땅히 거두어져야 할 열매를 기다리고 계시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놀래키지' 않도록 잘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에게서 성경 강의를 받는 분들도 행여 저와 예수님을 놀래키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열 두 제자의 파견
7절은 짧지만 예수님의 '제자된' 이들의 특징을 정말 굵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 부르시어
먼저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되려는 이들은 이를 올바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려는 모든 직분은 언뜻 우리가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되고, 교회 평신도로서 일종의 봉사직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마치 '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한 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흥미를 잃으면 곧잘 떠나 버리려 합니다. 좀 열심히 하는 척 하다가 조그만 난관이라도 만나게 되면 흥미를 잃고 직분을 내던져 버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빠지고 못할 것 같이 느껴져도 주님께서 그만 두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교회의 합당한 권위가 그만두라고 하지 않는 이상은 제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이행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부름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
예수님의 직분을 나눠 받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권한 입니다. 무엇 보다도 열두 제자들이기 때문에 다른 권한보다도 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이 가장 핵심이 됩니다. 특히 우리 사제들에게는 이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영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당당하게 나서서 더러운 영들 앞에 명령하십시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말입니다. 이 작업은 '고해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평신도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제자 되려는 이들에게는 이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으셔도 좋습니다. 봉사 직분을 수행하면서 힘들고 괴롭다는 생각이 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시고 이 어둠의 유혹을 떨쳐 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 둘씩 짝지어
공동체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무너질 때 다른 사람이 일으켜줄 수 있고 또 서로의 생각을 함께 나누면서 둘의 부족함을 채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물론 지금 세상의 단체는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고 또 서로의 부족함을 공격해서 자신이 살아 남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주님의 공동체가 되는 셈입니다. 그분의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을 지고 나아갈때 비로소 완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십시오.

- 세상 것에서의 탈피
예수님은 지팡이 하나 외에 아무것도 추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의 이 파견은 일종의 '선교 수업'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제자들이 체험해 보아야 했던 과정이었지요.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권한과 가르침만을 받아들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명을 이루고 말지요. 하느님께 기대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 한 집에 머물기
자신의 사명이 다할 때까지 선택한 곳에 머무르는 행위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진득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시험해 보려는 것은 결국 우리의 현세 삶에 더욱 합당한 것을 찾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일단 가기로 결심하고 한 번 맡게 된 곳에서는 우리의 사명이 다하는 날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반장과 교리교사들은 이를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해진 사명이 다할 때까지 이리 저리 옮겨다니지 마십시오.

- 받아들이지 않고 말도 듣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
이 부분은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신앙을 단순히 좋은 것을 전하고 성가신 일들은 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경고를 해줄 필요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할까나 하는 두려움으로 반드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회개의 선포
제자들이 선포한 내용은 단 하나 '회개'였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가서 이런 저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했겠지만 그 모든 근본에는 '회개' 곧 '방향 전환'이 숨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방향에서 하느님을 향한 방향으로의 전환이지요. 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름이 아닌 '방향의 전환'입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세속적인 욕망과 유혹에 저항해서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고 그분의 도우심과 자비에 우리들을 내어 맡기는 것이지요.

- 마귀를 쫓아냄, 병의 치유
예수님께서 하신 대표적인 두 행위 입니다. 나쁜 것은 쫓아내고 아픈 것은 싸매 고쳐주는 행위. 우리는 이웃에게 늘 이런 마음가짐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나쁜 것을 분별하여 분명하게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물쩡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내버려 두면 상처가 배로 곪아서 결국 모두가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것은 잘 싸매 주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조금 아프다고 내던지거나 그냥 방치하다가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귀와 병, 즉 '악의'와 '약함' 사이의 구분을 잘 해야 합니다. 이 분별을 잘 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에게 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헤로데 - 죄책에 시달리는 대표적 인물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과거의 한 때의 선택의 실수에서 도무지 헤어나지를 못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있을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고 자신의 내면을 통해서 말씀을 걸어오시는 하느님보다는 사람들의 의견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오류는, 그런 자신의 잘못에 얽혀 살면서도 그 잘못을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게 아니라 그저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 우리는 기꺼이 그분의 용서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에 얽매여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뒤바꿔 놓은 채로 우중충하게 살아가는 적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루빨리 하느님의 품에 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어 헤로데의 과거사가 소상하게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을 죽인 사건입니다. 참으로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헤로데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 그리고 그녀의 딸이 주요 인물입니다. 물론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 있으니 '고관들과 무관들, 갈릴레아의 유지들'로 대표되는 세속 권력의 무리들입니다.

음모의 시작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의롭지 못한 일을 꾸짖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 요한의 의로움은 '악의'와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헤로디아에게서 '앙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앙심이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성가시고 좋지 못한 취급을 당할 때면 늘 이 '앙심'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이 '앙심' 즉 '악한 의도'에서 모든 범죄가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요즘 정치를 논하면서 곧잘 '앙심'을 품는 이들이 보이는데 이런 분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헤로데는 조금은 우유부단한 사람이라 자기의 욕구대로 요한을 감옥에 잡아 가두는 것과 같은 일을 처리하기도 하지만 의로운 세례자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기도 하였습니다.

사건의 진행
헤로데는 사람들의 말에 귀가 얇은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그런 그가 동네의 유력자들을 모조리 청해 놓고 잔치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헤로데와 손님을 즐겁게 한 헤로디아의 딸에게 헤로데가 공공연한 맹세를 합니다. 악마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입니다.

어둠의 영들은 우리의 약점을 공격하는 데에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지혜 만으로 그런 어둠의 영들의 활동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와 그분의 도우심에 늘 기대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곧잘 어둠의 영들은 우리 영혼의 도성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헤로데에게는 그 부분이 바로 '허영심'과 '명예'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악마는 헤로데를 죄짓게 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천진하게도 엄마에게 와서 묻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품고있던 앙심을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어찌보면 당연히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바늘 들어갈 틈만 찾고 있었던 셈인데 아주 좋은 기회가 온 것이지요. 소녀는 또 천진하게 돌아가서 그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들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녀는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그 위엄있는 분들 앞에 나서서 춤을 출 정도면 사춘기 정도의 어느정도는 분별력이 있는 나이였음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충고를 청하는 사람의 악의를 그대로 답습하게 됩니다. 물론 의도의 정도와 앎의 정도에 따라서 매를 덜 맞기는 하겠지만, 한 사람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달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았을 터인데도 헤로데에게 가서 그 말을 그대로 전해 버립니다.

헤로데는 고민에 빠집니다. 세력있는 이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과 한 의로운 이의 생명 앞에서 갈등을 하지요. 그리고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는 자신의 위신을 선택해 버리고 맙니다. 우리 역시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반대의 것을 선택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학생을 마주하면서 그 아이를 도와주면 다른 친구들에게 당할 취급을 두려워하는 모습, 걸인에게 동전을 쥐어주면 주변에 걸어가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받을 것을 걱정하는 모습, 퇴폐적인 술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직장에서 당할 취급을 걱정하는 모습, 누군가에 대해서 수근거리는 자매들 사이에서 그런 일은 주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고 했을 때에 그 일당 자매들에게 당하게 될 수모… 헤로데는 우리의 모습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한 권력가의 그릇된 선택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도 이런 그릇된 선택 때문에 무죄한 이들이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다

피정
파견 되었던 사도들이 돌아와 한 일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휴식'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휴식을 한답시고 더 시끄럽고 번잡한 곳으로 가는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참된 휴식은 영과 육이 모두 함께 쉬어야 합니다. 그것이 '피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기마저 쫓아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정당한 휴식' 마저도 희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무엇이 우선인가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그들임에도 가엾은 이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시작하십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참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인 여러분들은 '휴식'의 가치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님 시대처럼 그렇게나 정신없이 일할 이유는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고요한 시간을 잃지 마십시오. 현대의 우리의 문제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려와서 정신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너무 부산스러워서 고요를 찾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고요한 곳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 찬미와 감사의 제사
그 외딴 곳에서 늦은 시각이 다가오고 사람들은 굶주려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게 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은 '빵 걱정', 즉 현세적인 걱정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미리 각본이 짜여진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 미흡한 가진 것
먼저 예수님은 가진 것을 파악하고 제자들에게 확인 시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봐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모자랐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 자리잡기
예수님은 사람들을 정돈하는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저 빵을 축복해서 대뜸 사람들에게 내던지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그 신비에 참여하게끔 준비를 시키신 셈입니다. 나중에 이 부분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감사와 찬미
예수님은 가지고 있던 미흡한 것을 들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줍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 버렸습니다. 결국 5000명이 빵을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셈입니다.

자, 이즈음 했으니 눈치를 채셔야 합니다. 어디서 익숙한 장면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미흡한 것을 들어 바쳐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를 드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너끈히 먹이고도 남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행위… 바로 미사입니다!!!!! 예수님은 첫 미사를 드리신 셈입니다. 물론 미사의 탄생은 최후의 만찬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말로 더할나위 없는 미사의 은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바치는 것은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너끈히 먹고도 남는 은총이 부어집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앞서의 것들이 필요합니다. 1) 미약하나마 우리가 가진 것을 바쳐야 하고 2)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준비도 시켜야 하고 3)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미사에 참여할 때에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무엇을 바치러 가져옵니까? 아니면 아무 준비 없이 다가옵니까? 미사를 집전하는 이는 받아들이는 이들이 이 감사와 찬미의 제사에 참여할 준비를 합당하게 시키는지요? 그들의 말씀에는 힘이 있고 사랑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는지요? 준비없는 이들을 끈기와 인내로 잘 가르치고 있는지요? 우리는 미사 안에서 진정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지요? 아니면 어디서 가져왔을지 모를 우리의 탐욕을 미사 안에서마저 드러내면서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충분히, 너끈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요?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물 위를 걸으시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 하셨습니다. 밥 먹을 틈도 없이 오천명을 가르치시고 빵을 축복해 먹이시고 그리고 나서도 언제나 '기도'를 잊지 않으십니다. 기도는 예수님의 힘이었고 근본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저런 힘이 어디서 나올까?' 싶다면 그의 근본에는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 위를 걷기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신비'라고 합니다. 하느님에게는 불가능이 없고 우리 인간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때로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서도 '불가해'한 일들이 벌어지고는 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없는 우리들에게는 '말도 안 돼는' 일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제자들의 상황
제자들은 풍랑에 시달리고 거기다가 물 위를 걷는 존재(우리야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저녁 무렵에 물 위를 걸어오면서 다가오는 존재를 말이지요.)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여 비명을 질러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참 코믹하기도 한 순간입니다. 남자들이 힘겹게 노를 젖다가 다가오는 대상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상황은 바로 우리들의 현재 상황입니다. 세상의 풍랑에 힘겹게 머물다가 다가오는 세상의 상식을 넘어선 존재, 바로 예수님이지요. 우리는 그런 예수님 앞에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겁니다. 풍랑도 힘겨워 죽겠는데 미지의 대상이 오니 우리의 목숨이 위태하게 느껴지는 거지요. 그분이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따위는 이미 공포심 때문에 잊어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와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 이해가 가시는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시는 분입니다. 더군다가 그분을 모시고 나니 풍랑이 순식간에 멎어 버립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이 닫혀 있었던, 너무나 세상적인 것에만 몰두해 있었던 셈입니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예수님 일행은 가는 곳마다 할 일이 천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아픈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적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아픈 사람을 마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영적으로 아픈 이들이 즐비합니다. 결국 몸의 병도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어야 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그분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소홀히 하고 있는 우리들이지요. 그분의 옷자락에 손만 닿아도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실 수 있으신지요? 도와 주십시오.



마르코 복음 7장

7장에 이르러 예수님의 가르침은 슬슬 본질적인 것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십니다. 여전히 치유를 계속하시지만 보다 내밀한 가르침을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신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시작점이 되는 것은 바로 첫번째 에피소드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껍데기와 알맹이
우리는 곧잘 껍데기에 사로잡히고 외면적인 것에 빠져들어 보다 참되고 소중한 내면의 가치들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부분은 따로 설명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너무나 훌륭히 잘 설명해 두셨기 때문이지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 말씀만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새기고 살아간다면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를 하신 셈이 됩니다.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사람을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금 일본 원전 사고 때문에 방사능이 퍼진다며 다들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 방사능마저도 우리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그 보기좋은 예로 일본 나가사키의 나가이 타카시 박사는 도리어 방사능 속에 머무르면서 자기 몸을 바쳐 방사능 연구에 헌신했습니다. 방사능이 그의 몸은 죽여 버렸지만 그의 고귀한 영은 여전히 살아남은 셈이지요. 이처럼 밖의 것은 몸은 죽일지언정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실제로 한 인간 존재를 더럽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이런 것들이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나와 실제 한 인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을 조금 더 전개시켜본다면 타인의 '악'마저도 우리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올바른 방어체계가 구축되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욕에 반응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제 아무리 욕을 한다고 해도 그 아이가 그걸 알아들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 그 욕에 대한 반발 시스템이 없다면 그 욕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폭력'도 같은 이해를 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나무에서 열매가 그냥 뚝 떨어져 맞았다면 우리는 그냥 머리를 한 번 쓸고 넘어갈 겁니다. 하지만 그 나무 위에 어떤 꼬마가 의도적으로 열매를 던지면 우리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게 됩니다. 이처럼 같은 행위를 당하더라도 우리 안에 반응 체계가 없다면 그 행위는 생각만큼 심각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인이 '악'으로 우리에게 반응할 때에 우리 내면에 저항 시스템을 두지 않으면 그 행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밖에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 우리를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뽑아내는 것들입니다.

이방 여인의 믿음
예수님은 드러나기 싫어했다고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기'나 '명예'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하고 싶으셨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의 선포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였습니다. 그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면 그분은 어떤 것이든 마다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그분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을 하느님께 모았다가도 다시 흐트리고, 곧잘 주변의 것들에 빠져들곤 합니다.

예수님의 표면적 거부와 보다 심오한 뜻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이방 여인이 다가옵니다. 그녀는 자기 딸에게 들린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이 일만 보면 예수님으로서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니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부정적인 의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좋아 보이는 일'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다 심오한 원의를 살펴볼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결국 원하신 것은 이방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하고 다니셨지만 결국 '믿음'이 있는 이들을 찾아 다니신 셈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내어줘도 받을 사람이 마음이 없으면 헛고생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요. 복음 선포에 있어서 마냥 하느님을 믿으라고 부르짖는 것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이 될 수 있지만, 수용자의 '믿음'을 분별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겸손의 가치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 봅시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말을 보다 직접적으로 하면 "너는 우리 가족 아니다. 너의 아이들은 강아지고 너는 개다. 그러니 이 좋은 빵은 못주겠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복음의 구절을 살펴보면 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마르코 복음의 이 구절 만으로도 충분히 그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에 그 여자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아이들이 '강아지'임을 인정했고, 결국 자기가 '개'인 것을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새로이 청을 드린 셈입니다. 결국 여인은 이 '겸손'의 시련을 통과했고 자기가 원하던 바를 얻게 됩니다.

청원기도의 틀
이렇게 우리는 '청원기도'의 기본 틀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딸, 하혈하는 여인, 이방여인에 이어지는 구도에서 우리는 '청원기도의 틀'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본은 우리의 '원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신앙의 다가섬'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시련의 극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조건이 합당하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결국 원의를 이루게 됩니다. 이든 저든 원의가 있어야 하고, 그 원의를 들고 예수님에게 믿음을 가지고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들고갈 수 없는 원의를 들고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괜스레 '엄청난 시련'만 겪고 나자빠지게 될 테니까요. 시련이 얼마나 지속될지 얼마나 큰 것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 즉각적인 응답이 요구되는 것이었지만 때로 이 시련은 우리 평생을 두고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모쪼록 의연히 잘 견뎌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고 원하는 것 그 이상을 기꺼이 얻어낼 것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이 단순히 육의 병만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우리 역시도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다 참되고 좋은 것,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이 하나를 사람들이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이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는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어서는 안될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손을 얹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행동을 그에게 '사적인 자리에서' 하신 셈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혀에 침을 바르셨습니다. 이는 벙어리에게 필요한 행위였습니다. 그가 귀와 혀로 분명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느끼게 하기 위한 수단인 셈입니다.

사람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의도
사람들의 의도는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보기를 원한 셈이고 예수님은 그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그릇된 의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손을 얹는' 행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 따위는 중요치 않았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이가 당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바르는 행위는 그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는 분명한 치유 행위로 인식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회당장의 아이들 말씀 하나 '탈리타 쿰!'으로 일으키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다른 행동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 병자의 수준으로 다가가십니다. 그가 이해하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 작업이 우리 예수님을 담은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알고 믿는다 해도 이를 모르는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은 예수님
이 일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장애가 될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엄명하지만 사람들의 놀라움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알리지 않았다면 분명 고관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에게서 더욱 멀리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은 보다 동떨어졌을 것이며 예수님은 보다 많은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서는 이를 참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하여 그것을 사방에 퍼뜨린다고 그 최종 결과가 좋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언제나 주님의 목소리를 충실히 듣고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르코 복음 8장

사천명을 먹이시다
지난 번 6장에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이어 이번에는 사천명입니다. 따라서 달리 이 기적 자체에 대해서는 설명해 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 역시 주님의 은총의 잔치, 곧 '미사'에 대한 전이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여기서는 예수님의 첫번째 말씀에 주목해 보았으면 합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예수님의 마음은 군중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그 군중이 어디에서 어떻게 온 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알고 계셨지요. 그들이 어떻게 고통받게 될 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공감'은 바로 예수님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결국 사천명을 먹이는 기적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순수한 아픔에 공감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하신 힘이 솟아나게 됩니다. 참으로 많은 '무감각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변 인물들은 그저 '대상'일 뿐,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들 사이에서 '따스한 마음'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지닌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딱 잘라 거절하십니다. 실제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표징은 이미 주어지고 있는데 그들은 그 표징을 바라보지 못하고,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 셈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욕구를 채워줄 표징이지 실제로 내려오는 표징이 아닌 셈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욕구에 놀아날 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표징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체가 표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이 솟아 오르던지 하늘이 무너지던지 구름이 변화하던지 기괴한 동물이 나타나던지 하는 것들이 필요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표징이 아니라 표징을 볼 줄 아는 눈이었고 그들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도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기심과 탐욕이 그들의 눈을 가로막아 장님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누룩
누룩이라는 것은 자그마한 빵을 엄청 부풀리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도 그렇게 부풀려진 존재들이 있습니다. 주로는 권력과 명예, 그리고 돈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누룩을 뺀 채로 빵을 구우면 원래 크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쪼그라듭니다. 있던 물기가 빠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누룩을 조금 넣으면 엄청 부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그렇게 대단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옷을 벗겨놓고 직업도 생각지 않고 같은 자리에 놓아두면 너나 나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헌데 우리 사이에 정한 분별 기준에 따라서 누군가는 엄청 높고 존귀한 사람이 되고 다른 누군가는 전혀 바닥을 기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인간 사이의 차별이 바로 '누룩'입니다. 우리는 이런 누룩이 우리 안에 깃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특히 그 안에 깃든 영혼을 바탕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몰이해
하지만 제자들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빵' 이야기를 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가리키는 달을 보지 못하고 그 손가락만 바라보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는 뻔합니다. 더군다나 불과 얼마 전에 오천명과 사천명을 먹이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현세적인 걱정에 빠져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받아들여 가장 뜨겁게 불타 올라야 할 그들이 세상 걱정에 빠져 그 능력을 전혀 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답답함에 제자들에게 "그렇게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몇번이고 주의를 주고 또 줍니다.

벳사이다의 눈먼 이
이 부분은 제가 참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눈 먼 이를 데리고 옵니다. 마르코 복음 10장에 예리코의 소경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는 그 자신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마르코의 부분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옵니다. 이는 중풍병자와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이들은 지붕까지 뜯어내는 열성이 있었지만 지금 이 소경을 데리고 온 이들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1차로 치유를 감행하십니다. 물론 말씀 만으로도 치유할 수 있었지만 그가 분명히 느낄 수 있게 그의 눈에 침을 바르는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1차적으로 치유를 받은 이에게 보이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사람의 '영적인 시야'를 먼저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데리고 온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들은 걸어다니는 나무토막 같았습니다. 영적인 생명, 즉 사랑이 없는 존재들이었지요. 그리고 나서 다시 눈에 손을 얹어 육체의 시야까지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을에는 걸어다니는 나무토막 같은 이들 뿐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 마을에 있는 동안에는 그를 데리고 온 이들의 호기심과 탐욕의 희생물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천자만별이었습니다. 누구는 '세례자 요한', 누구는 '엘리야', 누구는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면서 모두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과 욕망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일 뿐이었지요. 예수님을 올바르게 보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 가운데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지 우리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로 수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한 '위대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내면에는 '위대한 이건희, 위대한 빌게이츠, 위대한 싸이' 등등의 이미지가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우리가 바라고 찾는 것대로 우리 내면의 우상의 이미지를 형상화 해 놓은 것이지요. 이에 따라서 예수님 역시도 우리 욕구의 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냥 내가 '편하게' 사는 일종의 보험 같은 수단인 셈이지요. 과연 우리 내면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수난과 부활의 첫 예고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보고 첫번째 당신 운명을 예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서는 불보듯 뻔한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우리야 다음에 일어날 일을 모조리 알고 있으니 그렇다지만 당시의 제자들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지금 우리 삶 안에서 주임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면 우리도 깜짝 놀랄 겁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잘 되자고 신앙생활 하는 거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고 더욱 고통받고 결국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죽어서 그리고 난 뒤에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몇몇 신자들이 벌떡 일어나 나가버릴지도 모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신앙의 첫 맛은 달콤하니까요. 그들은 멋들어진 전례와 뭔가 있어보이는 신부님, 그리고 사랑스러운 신자들의 세속적 달콤함을 찾아 옵니다. 헌데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맘에 안드는 주임 사제와, 지겹기만 한 전례, 그리고 신자들과 이런 저런 속상한 일들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누군가는 결심을 하고 신앙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이미 녹아들어 있었던, 그리고 예고되어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 환상은 깨어져야 했던 것들이 맞고 결국 깨어지게 된 것이고 그리고 그들은 다시 세상을 찾아 떠나간 셈입니다. 물론 그 환상이 올바로 깨어지도록 도와주지 못한 교회의 잘못도 있겠지만 결국 최종 선택은 그들 자신이 하는 셈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보다는 현세의 생명을 택한 셈이지요.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예수님에게 이 말을 명백히 듣고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우리들은 과연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사람의 일에만 빠져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8장 안에서 계속 설명 드렸던 것의 종합편인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그분이 약속하시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원의를 잘 살피고 다시 길을 걸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길을 시작한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고 촛점과 방향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뭔가 되려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누구든 언젠가는 뒤로 남겨두고 떠나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지닌 모든 것들로 영생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서라는 이 핵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여기서 목숨에는 2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보다 영원하고 참된 것을 위하여 한시적이고 헛된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저에게는 하나의 자랑거리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자녀들에게는 멍청해 보이고 수치스러운 말일 뿐입니다. 한 번 보도록 하지요. 훗날 미소짓는 이가 누가 될지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을 품고 이 땅에 사는 사람은 훨씬 더 삶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실제적으로도 그러합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사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코 복음 9장

하느님 나라의 관상
살아있는 동안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비록 '모두'는 아니지만 '더러'는 그렇게 된다는 말을 비추어 단순히 한 명을 꼭 집어 건네주신 은총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한 편으로 단순히 '영성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시간의 관념'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시간
시간은 언제나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때를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이 두 번째 관점에서 많은 이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체험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상, 언제나 하느님께 마음을 둔 이들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영광스로운 모습으로 변모
앞서의 예수님의 예고가 끝나고 6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십니다. 베드로는 믿음을, 야고보는 희망을, 요한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여 반석이 된 사람이고, 야고보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청하고 받기를 바랬던 사람이고, 요한은 늘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오른 예수님은 순간 당신의 옷이 새하얗게 변화되기 시작하고 구약의 두 대표적인 예언자 엘리야와 인도자 모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엘리야는 희망의 완성이라 할 수 있었고, 모세는 신앙의 완성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은 바로 그 둘을 품고 사랑의 완성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두려움
헌데 베드로라는 여전히 미흡한 지상의 존재가 그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다름아닌 초막 셋을 지어 그들을 이 땅에 잡아두려 합니다. 하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고 행여 그들에게서 무슨 말이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판에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겁'이라는 것은 '미지의 것'에 대해서 인간이 가지는 감정적 반응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자세히 알고 있다면 '겁'이 생겨나기보다는 그에 대한 대책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풍의 위력도 모르고 방사능의 해악도 모르고 교통사고가 언제 날지도 모르고 하니 그러한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 자연스레 '겁'을 집어먹게 되는 셈입니다.

수동성과 몰이해
아니나 다를까 구름이 그들을 덮고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두 예언자와 예수님의 천상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상의 예수님만이 곁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 입을 다물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도무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자기들끼리 서로 물어봅니다. 우리 역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이들 가운데 살아남'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모르긴 해도 수많은 이들이 단순한 육적 재생을 막연하게 상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육신은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의 재림
제자들은 율법학자들의 의견을 묻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당시의 학식 있는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비록 행실은 올바르지 못했을 지언정 그들이 지니고 있는 학적 권위는 여전히 하느님에게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장상에 대해서 삶이 뒷받침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쉽사리 그의 의견을 무시하려 들기 일쑤입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바탕으로 보다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찾아내는 시도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하지만 이어 보다 더 정확한 해석을 덧붙이십니다. 물론 율법학자들이 근거를 두는 성경을 바탕으로 말이지요.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엘리야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셨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엉망으로 다루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을 담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리 죄많은 '군중'은 그런 이들을 곧잘 무시하고 천시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돈을 더 벌게 해 준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보다 참된 길로 이끌어 주겠다는 사람입니까? 이미 답은 우리 스스로 알고 있는 셈입니다.

제자들의 논쟁
시작은 산에 올라가지 않았던 '다른 제자들의 무능'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가 있는데 제자들에게 맡겨 보았지만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율법 학자들과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몇 가지가 혼합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먼저는 그들의 무능력이었고, 다음은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입니다.

무능력
우리의 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될까요? 우리는 인간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없고, 너무 세밀하거나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한 나약한 인간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저마다 거기서 거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능력이 없더라도 아버지가 힘이 있으면 그의 능력을 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동안은 그분이 마치 우리 일을 당신의 일처럼 생각하시고 돌보시겠지만 우리가 아버지에게 전혀 충실하지도 않은데 말도 안되는 일을 가져온다면 아버지는 관심은 커녕 도리어 우리를 꾸짖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한탄하신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이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곧 떠나신다는 말이고, 우리는 예수님 없이도 그분이 하신 일을 해 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능력의 전달
이제 예수님이 일을 시작하십니다. 먼저는 그 문제가 된 아이를 부르십니다. 그러자 곧 아이가 발작을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시간을 좀 두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된 거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는 언제나 수용자의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마련해서 건네 주려고 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건네줄 수 없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일에는 반드시 수용자의 의도와 능력도 먼저 고려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도와 달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가능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번 사건의 핵심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주변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 '믿음'의 위력에 대해서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말은 전능하신 분의 위력을 믿지 못한다는 것의 반증일 뿐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은 '전능하신 분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위해서 우리의 뜻을 희생하고 심지어는 고통을 당할지언정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컨대 이번 복음의 사건에서는 하느님은 당신의 위대함을 외아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셔야 했습니다. 헌데 우리가 이런 복음의 구절을 읽었다고 다른 이에게 가서 그것을 '치유행위'로 함부로 드러내려고 하는 데에는 다름아닌 '우리의 뜻'이 숨어 있기 쉽상입니다. 예수님이 치유를 했다고 해서 우리도 무턱대고 치유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관점이 틀려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치유'를 하신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아가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치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보살핌'이 더 절실하고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더 세세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느님의 뜻은 일상 안에서의 '인내', 이웃을 향한 '친절', 미운 사람을 향한 '용서'와 같은 것들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우리에게 부족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뜻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불가능했는가?
제자들이 와서 자기들은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는지를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도'의 가치를 언급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기도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직접 이루었던지, 아니면 기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겸손되이 사양을 했던지, 아니면 예수님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적어도 '논쟁'을 시도하지는 않고 인내와 사랑 속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 순간 자기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두 번째 예고
예수님은 당신에게 일어날 일을 다시 알리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여전히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살려고 나온 세상인데 자꾸 수난 당하고 죽는다고 하니 제자들, 아니 우리들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이 운명은 단순히 당신 홀로 이루실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곳 그분을 따라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인 셈입니다. 우리는 수난 당하고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뿐더러 그 뜻을 풀이해 달라고 하기도 두려워하는 실정입니다.

가장 큰 사람
제자들이 두려워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중에 제자들은 누가 더 큰 사람이냐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죽기보단 살기를 낮아지기 보단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셈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누가 더 힘이 있고 정통성을 지니고 있느냐로 논쟁하기 일쑤입니다. 천만에요. 정 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누가 더 힘이 있고, 누가 더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낮은 곳에 머물려고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단순하고 명료한 말로 이를 정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상대의 약점을 수용하는 사람
나아가서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어린아이는 성경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이 구절에서는 '나약한 사람', '약점을 지닌 사람', '보완해 주고 도와 주어야 할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곳 볼리비아에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아서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한국에는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 많아서 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잘 추스리고 받아들이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이
우리 이웃 형제 종교들에 대해서 잘 성찰해 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곧잘 막연한 적대감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이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마저도 깔보고 무시합니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 우리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어 비판하고 깔아 뭉개면서 우리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하는 아름답고 좋은 일들은 곧 같은 주님의 이름 안에서 행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을 늘 가슴에 품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죄의 유혹
앞서 계속 이야기한 부분이 인간의 '나약함'이라면 이번에는 '악의'와 '죄의 유혹'에 대한 부분입니다. 나약함은 보완되고 도와 주어야 하지만 '죄에 기우려는 경향'은 단호히 잘라 버려야 합니다. 간단한 예로 아직 다리에 힘이 없는 아기는 도와주고 일으켜 주고 보듬어 주고 사랑해야 하지만, 아기의 다리에 붙어 피를 빨고 있는 거머리는 빨리 떼어 내어 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사람과 욕구들은 한시바삐 끊어 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것을 방치하다가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마저 영원한 죽음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금
마지막 날에 우리는 모두 거대한 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우리의 육은 이미 우리가 지상에서도 보듯이 이 땅에 남겨두고 영혼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모종의 시험, 즉 불소금에 절여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죄의 경향들 처럼 하느님에게 합당하지 못한 것들은 소금에 절여지면서 사라지게 되고, 그 소금의 과정에도 유일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것, 즉 우리 안에 간직하던 소금은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이 소금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소금입니다. 우리 안에 이 소금을 간직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0장

혼인과 이혼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그들의 눈이 열리고 그들이 보다 기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쓸데없는 틀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시는 거지요.

바리사이들의 목적
헌데 바리사이들이 다가옵니다. 그들의 목적은 굉장히 뚜렷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험'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 기준에 합당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족하게 되면 문제가 없지만 그들이 만족하지 못하면 그들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 입증되어야 하는 무엇이었지요. 그들의 기준은 이미 '하느님의 뜻'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순수한 마음,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을 재어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마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우리 주변에 숱하게 있습니다. 이들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세상이 모두 '나의 뜻'을 받들어 옳다고 해야 겨우 만족할 정도이니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고 이들은 언제나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듭니다.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누구든지 '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을 파괴하려 들지요. 예수님을 앞에 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혼인'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지금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큰 문제였나 봅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과연 이 사람들에게 솔깃한 질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시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규율을 되물어봅니다. 사람들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모세가 허락하였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보다 본질적으고 그 안에 숨겨진 것을 밝혀내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의 완고함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혼인 문제는 참으로 굵직한 주제입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한번쯤은 이런 어려움에 직면해 왔습니다. 즉 배우자와 마음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는 오류와 약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지요.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약점과 오류를 받아들이는 작업이 항시적으로 필요한 현실입니다. 이는 비단 부부 사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부 사이에 이것이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은 부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부부는 하나, 즉 한 몸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를 떠올려 봅시다. 왼손이 아프다고 오른손이 왼손을 잘라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감싸고 치유될 때까지 애쓰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기 때문이지요. 부부 사이의 문제는 같은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법적인 절차를 따지고 묻기 이전에 보다 본질적으로 나는 그를 내 몸처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그 뒤에 사람들은 '법적인 절차'를 고심하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질 수단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함부로 갈라놓을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간음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이 구절로 예수님은 부부 사이의 '죄악'을 분명하게 명시하십니다. 법의 선이라는 것은 늘 양측으로 작용합니다. 사랑에 충실하려는 이에게는 '보호'의 구실로 작용하고 반대로 사랑에서 벗어나려는 이에게는 '단죄'의 구실로 작용을 합니다. 모쪼록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 구절이 여러분들에게 '보호'의 구실로 늘 작용을 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이 시리고 있다면 그건 이미 우리 마음에 '갈라섬'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신호를 잘 준수하는 사람에게 눈앞에 신호등이 나타나면 또 하나의 준수할 사항일 뿐이지만, 언제나 신호를 어기려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신호등은 성가시고 귀찮고 회피하고 싶은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규율을 우리 양심의 척도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이
앞서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로 설명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예수님이 받아들이는 '어린이'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번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참으로 순수하고 순박한 이들의 대표주자입니다. 언제나 현재에 충실하고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은 순수한 존재를 의미하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린이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품어 안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은 '결코'라는 단어까지 쓰시면서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음흉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늘 어린이와 같이 현재에 충실하고 다른 군더더기 생각이 없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표정
덧붙여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은 무서운 사람에게는 절대로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냥 울어버리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에게 아이들이 기꺼이 다가갈 수 있었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얼마나 온화하고 온유하며 많이 웃으셨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중세 시대의 엄숙한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일쑤입니다. 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주님은 참으로 호탕하시고 잘 웃으시며 온유하고 온화하신 분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한 사람이 달려옵니다. 그리고 무릎도 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가 달려왔다는 것은 그의 마음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고 싶었고 그분에게 보다 빨리 이르고 싶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그의 내면의 높이가 굉장히 낮다는 즉 겸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찾고 있는 것이 현명하거나 학식이 많은 게 아니라 '선의'를 찾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나아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이 사람의 관심사가 '영원한 것', '신적인 것'임을 드러냅니다. 적어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나쁜 의도를 가지거나 또는 세상적인 목적(치유, 빵)으로 예수님을 찾은 게 아닙니다.

선하신 분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선함'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만이 선하심을 선언합니다. 하지만 왜 그러신 걸까요? 이 지상의 인간들 중에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면 누가 선할 수 있는 걸까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모든 인간은 모종의 '부족함'과 '결함'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조차도 '완전한 선'을 유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느님' 만이 선하시다는 것, 나아가 그분을 우리 안에 담아야지만 인간은 오직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함에 있어서 인간 예수님이 신적 예수님에게 겸손되이 자리를 양보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신적 예수님, 즉 성령을 우리 모두에게 선사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계명
예수님은 계명을 절대로 '무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청년에게 '계명들'에 대해서 물어 보십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그러한 계명을 어릴 때부터 열심히 준수해 왔다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이한 말씀과 활동 속에서 곧잘 '규정'을 무시하려고 들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규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규정' 안에 들어있는 본질을 드러내어 밝히시고 그 본질을 준수하도록 가르치신 것이지 '규정' 자체를 깡그리 없애 버리시려고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소위 갓 성경을 공부하는 분들이 참으로 주의하셔야 하는 부분입니다. 겉멋만 들어서 모든 규정이 마치 필요없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이 청년은 참으로 바람직하게 살아온 셈입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지만 그는 이 예수님의 '해법', 또는 '조언'에 기뻐하기보다는 '울상'이 되어 떠나갑니다. 이제부터 이 청년에게 일어난 일을 조금 더 깊이 조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한 셈입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어둠'에 빠져 있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이 어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둠을 벗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하늘 나라를 향해서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악의에서 비롯되는 죄악들을 벗어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계명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청년에게 물으신 것이지요. 그리고 청년은 거뜬히 이 시험을 통과해 온 셈입니다. 적어도 청년은 더럽혀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의 영을 깨끗이 하였으면 다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우리의 드러난 나약함입니다. 다리에 힘이 없는 아기가 걸을 수 없듯이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보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들이 덕을 수련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서 '악'을 찾을 순 없어서 사랑스러운 눈으로 볼 수 있었지만, 다른 한 편 청년에게 엄청난 '나약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죄를 짓는 건 아니었지만 청년의 '재물'이 청년의 마음을 잡아두어 청년을 허약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청년에게 '가진 것을 팔라'는 영양제를 주신 셈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이 영양제를 먹고 싶어하지 않고 울상이 되어 떠나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각자 이런 저런 약점이 많은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매번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모종의 해결안을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런 해결안을 일상 안에서 마주합니다. 자신의 성격 때문에 곧잘 화를 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화를 내게 할 만한 사건과 사람을 주셔서 우리 스스로 생각하게 하십니다. 돈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돈을 사랑할 때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꾸 경제적인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결국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자극시켜 주시는 셈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에게도 그 자존심을 박박 긁는 무언가를 주셔서 그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겸손'을 키울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런 모종의 목적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들은 아직 어린아이라서 그런 고통이 무작정 싫고 이해할 수 없고 피하고 싶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청년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재물
예수님은 나아가 '재물'에 대해서 한마디 더 언급을 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라고 덧붙이십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참으로 쉽습니다. 사실 거의 모든 인간적 유혹이 '재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심지어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죄악의 뿌리'라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마저도 예수님의 이 발언을 듣고는 저마다 수근댑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즉 제자들은 아직도 재물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
짐짓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일들 앞에서 우리는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불신'의 다른 단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기대어 청을 드릴 때에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런 일들이 어떻게 벌어질는지는 각자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든 저든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조금씩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모든 원의와 욕구들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날이 다가옵니다.

따름과 보상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자신들을 예수님 앞에 내세웁니다.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말에 가감없이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무언가를 스스로 포기한, 버린 사람은 '박해'와 더불어 '현세의 보상'도 뒤따를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을 약속합니다.

박해
예수님을 따르면서 현세의 것을 포기하는 이에게 다가올 박해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아주 간단한 예로 회사에서 2차로 퇴폐적인 술집을 가는데 그곳에 따라 가기를 거부하는 한 회사원을 봅시다. 당장 삐딱한 시선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 니가 성인이란 말이지?' 그리고는 곧잘 빈정대는 말과 시련이 주어질 것입니다.

현세의 보상
헌데 이 현세에서 '백 배'를 받는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당장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버리려는 사람에게 무엇이 다가온다는 말일까요? 이는 '소유'라는 개념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는 그 밖의 것을 자동으로 '배척'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나머지 것들은 가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나에 집착하는 순간부터 나머지는 사라져 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니 반대의 방향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 집착을 벗어 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나머지가 모두 한꺼번에 다가옵니다. 우리가 '내 집'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모든 장소가 나의 집이 되는 셈이고, 우리가 '내 가족'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세상의 모든 관계가 나의 가족이 되는 셈이고, 우리가 내 땅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나의 터전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선교사'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영원한 생명
앞서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최종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 희망은 '박해'를 견디어 내는 데에 큰 도움을 줍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감소되게 마련입니다.

수난과 부활의 세번째 예고
<예수님, 제자들, 뒤따르는 이들, 박해자들>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장서 가고, 제자들은 놀라워하고, 뒤따르는 이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며 예루살렘에서는 그분의 뜻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적군이 그득한 성을 치고 들어가는 왕과 그와 친분이 있는 장군들과 그리고 졸개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뜻을 세운 이와, 그 뜻에 경탄하는 이와, 그 뜻을 두려워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쯤에 속해 있을까요? 우리는 주님의 뜻에 경탄을 하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주님의 뜻에 두려워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처럼 주님의 뜻에 반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일어날 일을 이전보다 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설명하십니다. 마치 두 눈에 보는 듯 말씀을 하십니다.

어두움의 명확성
어두운 욕구에 사로잡힌 이들은 하는 행동이 매우 뚜렷하고 명확합니다. 그들의 일관된 방향은 충분히 예상할 만 합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 사이에 돈이 끼어들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명예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명예로운 자리가 주어졌을 때, 권력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권좌가 주어졌을 때에 일어날 일은 분명히 명확합니다. 그래서 사탄들은 충분히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이들의 어두운 욕구를 찾고 발견해서 움직이게 하고, 나아가 '선한 이들'을 무너뜨릴 계획을 잡습니다. 부당하고 불의한 일들을 통해서 선한 이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게 하고 '증오'가 자리잡게 하면 그들은 이 작업을 통해서 또 한 사람의 '죄인'을 얻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악마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채로 진정 목숨을 내어놓을 지는 정말 예상도 못한 셈입니다. 그들은 승리를 예감했겠지만 하느님은 이 모든 걸 일시에 뒤바꾸어 버릴 작정이셨던 겁니다.

출세와 섬김
이 철없는 두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된 자리를 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욕구와 의지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수난의 잔에는 동참하겠지만 정해진 자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은 그 대상만 바꿀 뿐 모든 것에 미칩니다. 심지어는 거룩하다는 것마저도 우리의 탐욕의 대상이 되기 일쑤인 셈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원하는' 것들이 많은지 곧잘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지나가기 일쑤입니다.

결국 그들이 원했던 것은 남들보다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점에 대해서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매우 뚜렷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우리는 언젠가 그분의 길을 따르면서 참으로 많은 낮은 곳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난한 이들이 될 것이고, 스스로 낮은 곳에 처신하는 이들이 될 것이며 많은 이들의 비난과 조롱을 자진해서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는 참으로 힘겹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부당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한 만큼의 상급, 그에 해당하는 철철 넘치는 상급을 받게 되고 우리의 기쁨은 넘쳐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만큼의 상급을 받을까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 신경써야 할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하고 그분의 뜻을 받들어 섬길 것인가에 신경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구원도 가늠하기 힘든 미흡한 존재들인 우리가 저 세상에서의 높은 자리를 탐하고 있으니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라 생각합니다.

예리코의 눈 먼 이
이번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으셔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들은 여전히 눈이 멀어 있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소경인 상태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예리코의 소경이야기를 통해서 '희망'을 잃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지는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에 대해서 웅성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홀로 내면에 작은 믿음의 씨앗을 심고 키워나간 셈입니다. 그러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용기를 내어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들도 세상이라는 길가에 앉아 있으면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고심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소소한 계기로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접하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 알게 되는 셈이었지요.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 내면에 그 원의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게 됩니다. 전에는 맛있는 밥이 좋았는데 이제는 영적인 가르침이 더 좋고, 전에는 멋있는 옷이 좋았는데 이제는 덕을 닦는 것이 더 좋고, 전에는 많이 가지는 것이 좋았는데 이제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게 더 좋아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옵니다.예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지나가?
예수가 지나간다니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도 마을 밖에 길가에 앉아 사람들 사이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분으로 지나갑니다. 이 소경 앞에 지나가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듯이 우리 앞에 지나가는 예수님도 보이지 않지만 지나가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는 그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하지요. 누군가에게는 사제직을 통해서 지나가시기에 그 누군가는 사제직을 붙들어 버립니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성소로 지나가기에 우리는 그 성소를 붙듭니다. 누군가에게는 봉헌생활로 지나가기에 우리는 그 생활을 붙드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붙들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잠시나마 멈춰서게 만듭니다.

시련
하지만 부르짖는다고 다 끝난다면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이 보이지도 않는 소경 앞에는 '사람들의 꾸짖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경을 나무라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으로 어떤 선택을 할 적에 마찬가지 일들이 항상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나무랍니다. 그만 하라고 합니다. 신학교를 이제 겨우 들어갔는데 가족들은 그만하고 나오라고 합니다. 반장 일을 이제 시작했는데 자격이 없다고 하고 좋지 않은 일이 자꾸 생깁니다. 교리교사도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수도생활도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왜 그리 반대가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삶을 시작하나 싶은데 다가오는 건 '사람들의 꾸짖음'입니다. 이에 기가 꺾이기 일쑤입니다.

용기
하지만 이 소경은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용기를 더욱 내어 봅니다. 사람들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밀한 곳에서 그동안 싹틔워온 '믿음'이라는 불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이 그냥 지나칠세라 그분을 더욱 붙잡아 세웁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부르심
예수님은 불렀지만 그가 들은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꾸짖던 그 사람들이 이번에는 그에게 가보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반대를 받더라도 용기를 낸다면 결국 그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집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는 소경에게 겉옷은 전부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에게 나아갑니다. 우리 역시도 그분의 부르심을 듣기 시작할 때에는 '포기'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더 가벼운 마음으로 더 전적인 신뢰로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질문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언뜻 자연스러운 대화 같다고 생각되지만 잘 살펴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왔는데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물어 보십니다. 소경이 청하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그러한 체험을 몇 번 해 보았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병세가 나아지기보다는 전혀 엉뚱한 바램을 지니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런 이들은 원하는 건 얻을지언정 보다 본질적인 구원은 얻지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아뢰어 보십시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되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대학'에 합격하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런 일시적인 바램을 들고 있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지금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개인적으로 저는 외칠 것입니다. '제가 사제로서 다른 이들을 구원의 삶으로 이끌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이지요. 저는 압니다. 제가 이 일에 헌신한다면 저의 구원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걸 말이지요.

다시 볼 수 있게
소경은 눈을 열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원하는 걸 얻었습니다. 소경이 뜬 것은 자신의 육신의 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는 바를 얻은 소경의 마음에는 이미 큰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고, 영혼의 눈이 더욱 활짝 열린 셈입니다. 이 소경의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소경은 다니는 곳곳마다 자신의 '믿음'을 증거할 것입니다. 자신의 눈을 열어 다시 보게 해 주신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당신 영으로 미리 알아채신 예수님이기에 이런 말씀을 건넨 셈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다시 보게 되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합니다. 아멘.



마르코 복음 11장

예루살렘 입성

수난과 죽음의 연이은 예고에 이어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하나하나의 동작이 '비장함'으로 다가오지만 제자들과 둘러선 군중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장면이 연출되게 됩니다. 이제부터 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 의미들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묶여있는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이 나귀가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큽니다. 먼저 이 나귀는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함부로 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은 자유로운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묶여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욕구에서 도무지 벗어나지를 못하고 그 욕구에 휘말려 늘 우중충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요. 잠깐잠깐 얻어먹게되는 '쾌락의 풀'이 전부인 셈입니다. 하지만 묶여 있는 이상은 어디를 가지 못하지요.

'아무도 탄 적이 없는'이라는 의미는 다행히 이 나귀가 욕구에는 묶여 있지만 어둠의 영을 허락하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대죄'에 얽매이진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로 인해서 이 나귀는 보다 더욱 우리의 현실에 적합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허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서 그 어둠의 영의 주인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귀'라는 것은 여전히 성숙하지 않고 볼품도 없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신앙인으로서 여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세상 안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특별히 걸출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어린 나귀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어 이 나귀를 '풀고' '끌고 오게' 하십니다. 나귀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어디서 나타난 이들이 자기가 묶여 있는 끈을 풀고 어딘가로 이끌고 갑니다. 성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요. 우리는 곧잘 다른 신앙인들, 즉 파견받은 신앙인들의 도움을 받아 눈을 뜨고 어딘지 모를 곳(하지만 예수님이 기다리는 곳)으로 이끌려 갑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우리 신앙인들의 선교사명이고 다른 하나는 비신앙인들이 체험하게 될 일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늘 파견 명령을 받습니다. 하지만 선교는 커녕 제 자신도 추스리지 못하는 어린 나귀 꼴을 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타인을 신앙으로 초대하려는 굳은 마음을 지닌 이들이 있고 이들의 일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아가 우리 미성숙한 신앙인들은 그런 이들의 인도를 받으면서 얼떨떨합니다. 사실 끈이 풀리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지경이지요. 벌써 세상의 욕구들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오히려 '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 싫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긴 하는 것인데 사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셈입니다. 그러니 많은 것들이 싫고 귀찮아집니다.

거기에 서 있던 이들
나귀를 푸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나서서 물어봅니다.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신앙인이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런 이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이들의 의도는 '풀지 마라'라는 것입니다. 나귀는 묶인 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경우에 용기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이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그러는데 곧 이리로 돌려보내신답니다." 그러면 그들은 막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에 흥분해서 다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시 거기에 몸 담은 뒤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토록 흥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나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제자들이 한 이 대답 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께서 이 나귀를 필요로 하십니다. 어리숙하고 미숙하고 볼품없고 얼마 전까지 욕구에 묶여 있던 존재이지만 주님께서는 이 나귀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귀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십니다. 나귀는 예수님과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모셨던 그 기억을 간직하고 돌아오게 되겠지요. 그리고 원래 하던 일을 하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만나고 현실로 돌아와 이전보다 더한 열심으로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거기 서 있던 이들은 그 나귀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귀 위에 '겉옷'을 얹어 놓고 사람들은 그 나귀가 가는 길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귀로서는 엄청난 대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절대로 '나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봉사자 평신도들이 잊고 살아갑니다. 마치 우리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빼고 나면 우리는 예전의 초라한 어린 나귀로 돌아오고 맙니다. 전혀 볼품없는 존재인 셈이지요. 헌데 사람들이 조금 잘 대해 준다고,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겉옷을 내민다고 마치 스스로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다가는 예수님께서 내리시게 될 때에 더욱 초라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외침
"호산나!"
미사 중에 우리가 바치는 '호산나'의 노래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미사의 시작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서서히 알아가고 맞아들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의 시작 부분에 있는 '감사기도'문을 통해서 천상의 교회 안으로 나아가 결국 천상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가 힘을 모아 이 '호산나'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고 그 곳에서 우리는 어린양의 희생 제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지상의 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로 변화된 모습의 주님을 통해 그 제사를 바치는 것이지요. 우리의 눈으로는 그저 한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반으로 가르고 들어 바치는 모습 뿐이지만 그 가운데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엄연히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호산나'를 외칠 때에 더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로 들어높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예수님의 신성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분은 그저 위대한 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 분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가오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광된 찬송을 불어넣어 주신 셈이지요. 만일에 이들이 부르짖지 않았다면 돌들이 소리쳤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의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우리 조상의 다윗의 나라는 분명히 지나갔는데 '다가온다'고 표현을 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의 보다 천상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곳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 제사로 인해서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는 진정 복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수많은 이들이 초대될 것이고 기쁨의 향연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희망을 진정으로 극대화 시키는 부분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성경 안에서 '높은 곳'으로 표현되는 부분은 단순히 '하늘'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 즉 하느님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지극히 높은 천상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군중들은 이 노래를 통해서 지상 교회와 천상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셈입니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미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니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 그 순간 하느님의 아들의 권능으로 이 지상의 교회를 들어높여 천상의 교회와 일치 시키는 셈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다
철도 아닌 때에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셔서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무화과나무로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부분의 영성적 의미를 파악해 보기로 합시다. 먼저는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인간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을 지니고 있을 때에 피조물은 우리의 지배권에 순종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지배권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굉장히 약화되어 있습니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과거 자연은 우리에게 먹거리와 입을 것을 너끈히 제공했지만 지금은 우리의 탐욕으로 인해서 극도로 노동을 해야 그러한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탐욕은 만족을 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자연에게서 빼앗으려고 하지요. 사실 지금의 자연 순환은 이미 망가져 제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살 터전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지요.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열매'를 맺을 시기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언제 우리에게 다가오실까요? 열매를 맺는 철이 따로 있어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열매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부분의 보다 심오한 영성적 의미는 이것입니다. 좋은 시기에 좋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변의 이웃들이 모두 상냥하게 대해 주는 데 내가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짓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다들 나를 저주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데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열매'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의 거룩한 굶주림은 때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가 가장 반항할 때에 우리를 감싸 안으신 분이십니다. 헌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어둠을 드러내고 저항할 때에 그것을 감싸안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열매 맺을 좋은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기에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보란듯이 행하십니다. 심지어 나무를 향한 저주의 말씀도 들으라는 듯이 하셨지요. 이 부분은 보다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뒷부분에 나옵니다.

성전 정화
예수님은 성정에 들어가 열정에 사로잡히십니다. 그리고 복음서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폭력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성전 안에 있는 장사치들을 모조리 쫓아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이 부분에서는 '성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성전'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그 건물이 '성전'을 의미할까요?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을 위한 제사를 바치는 영적 공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헌데 우리의 영혼을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바로 '탐욕'이 들어 있습니다. 기도는 커녕 장사치들을 한껏 재어놓고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는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도 이런 '탐욕'들이 지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우리 가운데 계셨더라면 우리는 호된 꾸중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즉 우리가 죽는 날에 이러한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저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셨던 그분의 진노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를 드려야 할 공간에 온갖 잡다한 것들을 쌓아놓고 있었으니 말이지요.

그 뒤에 바로 나오는 구절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악한 의도'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님 앞에서 도리어 그분을 없앨 궁리를 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의 우리의 현실 안에서도 익숙한 일들입니다. 우리는 진정 거룩한 이들을 반기기보다 '두려워'하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 스스로가 변화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조금은 더 돈을 탐내고 싶고, 조금은 더 외모를 가꾸고 싶고, 조금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그 미련을 도저히 버리지를 못하는 셈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 참된 방향, 낮아지고 내어놓고 자기를 버리는 방향을 제시하는 이들은 '성가신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진리의 말씀에는 이미 귀가 닫힌 셈이고 자신들의 욕구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어리석은 귀머거리 장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는 뿌리째 말라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선포는 그대로 작용한 셈이지요. 만일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여전히 지닌 거룩한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지없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동물들과 대화를 했고 과거의 교부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거룩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새들과 물고기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진리를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은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 가까이 다가갈 때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탐욕의 상징인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져버린 이들은 자연 가까이 갈수록 도리어 두려움이 커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불편함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에어컨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각종 편의시설이 없으면 죽는 줄 압니다. 그리고는 불평을 입에 달고 살지요. 이런 이들은 산이든 바다든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에 5성급 호텔에 머문다면 모를까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가 고스란히 담긴 '자연' 그 자체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연을 '소비'하려고만 드는 이들이고 합당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문명'이 생산한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이고 자연의 생태고리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연 속의 '암세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바램은 미약하지만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램은 마치 스위치를 올리는 손가락의 힘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느 스위치 앞에 가서 스위치를 올리는가에 따라서 그 전체의 기계가 작동하듯이 우리의 믿음은 미약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전체의 시스템을 동작시키게 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러한 원의를 세상의 순환고리 안에서 소비합니다. '아 돈벌고 싶다'라는 원의는 적잖이 강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의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군가는 세상 안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구에 따라서 모든 것을 정비하고 재조정하고 그에 발맞추어 모든 말과 행동을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수많은 이들이 마찬가지의 원의를 가지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고 싸워야 하기가 일쑤입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서고 그분의 뜻에 우리의 믿음을 둔다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들은 자신의 기도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고 그들이 청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됩니다. 아니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지요.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
믿음의 청원에 관한 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 하지만 여기에서 수많은 이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산을 옮기려는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변의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도식화해서 이해를 돕겠습니다.

1) 최초의 원의(하느님) - 그 원의에 부합하는 우리의 믿음 - 청원
2) 최초의 원의(나) - 그것을 하느님의 원의로 꾸미는 우리의 탐욕 - 청원

1)번의 순서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 구절에서 설명하는 바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산을 옮기시려는 원의'를 지니고 계신다면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청원을 드릴 수 있고 그것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적지않은 그리스도인들이 2)번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려는 음험한 마음을 마치 '하느님이 원한다는 식'으로 뒤바꾸어서는 청을 드리고 나아가서 그 청을 이루어주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원망하기 일쑤입니다. 참으로 장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안에 일치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런 작업에 제대로 된다면 우리는 당신이 원하시는 치유와 기적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만한 믿음을 지닌 이들을 찾아보기가 좀처럼 힘이 듭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욕구의 노예가 되어 '신앙' 마저도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려고 들기 때문이지요.

결국 예수님의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 행동은 제자들을 위한 교육의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권능'에 관한 시청각 교육을 시켜 주신 셈이지요. 죽어간 무화과나무는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지의 창조주이신 분의 아들에 '순명'한 기쁨을 누렸을 것이지요. 그러니 지나치게 무화과나무를 '의인화' 해서 우리의 감정을 실어 예수님을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여라
마지막 부분에서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가진 '원의'는 하느님의 뜻에 부합할 때에 이처럼 엄청난 권능을 지니는 한편 반대로 한 인간에 대해서 '증오'로 작용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파괴력의 종점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증오'는 언뜻 상대를 향해 복수하고 그를 멸망시키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로 나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셈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 후반부에도 나오고 예수님은 다시 그 구절을 반복하시면서 우리 내면의 '증오'를 경계하고 또 경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한
우리는 적지 않은 순간에 '복잡하고 음험한'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을 담고 있는 맑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지닌 것을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악'은 자신을 선한 것처럼 꾸미게 되고 그에 따라서 무척이나 많은 변명거리와 이유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을 도와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라고 하는 추상적인 질문에 우리는 '네 도와야 합니다.'라고 답변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곁의 불쌍한 거지에게 1000원을 줄까요 말까요?'라는 질문에 우리는 곧장 변명거리를 찾아내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기 싫은' 셈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돈이 아까운' 셈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황은 우리 일상 안에서 곧잘 연출되곤 합니다. 우리 주변의 성가시고 궃은 일 앞에서 우리의 본성은 늘 '거부'를 표현하고 변명거리를 찾곤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내면 사정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질문을 바로 파악해 내신 셈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묻는 그들의 '부정적인 마음'을 파악하셨고 그들이 절대로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던지신 셈이지요. 참으로 통쾌한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스스로 그 어두움을 곧잘 드러내곤 합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맞서는 것은 못이 가득 박혀있는 나무판을 맨주먹으로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는 나서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작용한다면 예수님처럼 그들의 말문을 막을 반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이 경우는 침묵 속에서 가능하면 그 자리를 물러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권유는 악의를 지니고 있는 이들을 마주한 '마음이 진실한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무턱대고 모든 이를 피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는 '선의'를 지닌 이들이 우리를 향해 충고하는 데에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나 스스로를 '진실하고 선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자리를 피하려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르코 복음 12장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예수님이 정리하는 신구약 성경 강의록입니다. 정말 그분의 말씀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말끔한 느낌입니다. 포도밭과 소작인의 비유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주면서도 사람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주십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철이 되자', 즉 인간의 영혼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열매를 거둘 때가 되자 당신의 '종'을 선택하시어 소작인들에게서 소출, 즉 당신을 향한 사랑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헌데 이 소작인들, 즉 우리들은 이 종을 붙잡아서 매질을 하고는 빈손으로 돌려 보냅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이를 참아 견디시고 다시 다른 종을 보내지만 이들은 더 최악의 상황으로 그 종을 다룬 뒤에 모욕합니다. 하느님은 이번에도 참으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종을 보내지요. 이번엔 대놓고 죽여 버립니다. 그 뒤에도 수도없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주인은 마지막 희망으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헌데 이 소작인들이 그분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가진 유산을 탐을 내고 죽이려고 달려들어 결국 죽여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진정 '우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가지고 있는 축복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그만 잃어버리고 만 셈이지요. 하느님의 외아들에 대한 신앙 앞에서 자신들의 교만이 작용을 해서 그들 민족이 하느님의 상속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셈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 축복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신 셈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 수혜자들인 셈이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요.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수많은 가르침들을 받았지요. 번번이 하느님이 보내신 종을 만난 셈입니다. 그 종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전했지요. 세상에서 관심을 떼어라, 진정한 영적 가치를 찾아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이런 수많은 가르침들을 전하는 그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했을까요? 우리는 '구원'은 바라면서 그 구원을 전하러 온 대상을 너무나도 쉽게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구하면서 그 영원한 생명을 직접 건네 주시려는 분을 무시한 셈이지요. 미사를 향한 우리의 자세만 봐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과연 미사 중에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의무감'에 사로잡혀 억지춘향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반성해 볼 문제입니다.

내버린 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진정 놀랍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 아무리 미소하고 없어 보이는 것들도 절대로 무시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업을 완성하십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합니다. 일어서려고 해도 자꾸만 쓰러지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자꾸만 넘어지는 자신의 약하고 미천한 모습에 그만 실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때가 하느님이 일하시는 때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지극히 약한 모습을 통해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군중이 두려워
어둠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군중'을 두려워합니다. 반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들은 죽음도 불사합니다. 이것이 영을 분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편승하려는 이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기 일쑤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빤한데도 사람들의 인기를 인식해서 옳은 것을 옳다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담고 있는 이에게는 차라리 침묵을 하면 할 지언정 그른 것을 옳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공동체의 모임 안에서 비춰지는 그릇된 행태 속에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과감히 이야기하고 자신이 지닌 약점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천시'당하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께 나아가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
어둠의 세력들은 급기야는 예수님에게 덫을 놓을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껍데기를 선하게 꾸민 이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감언이설로 그분의 마음을 꾀어 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먼저 찬양합니다.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이렇게 뱉어놓은 스스로의 말들을 따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신앙고백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미사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면서 그런 말마디들을 전혀 따르지 않을 때에 우리는 이 복음의 어두움의 세력과 똑같은 '위선자'가 되는 것이고 주님을 시험하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데나리온의 주인
예수님은 데나리온의 초상과 글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황제의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데나리온은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는 가르침 속에는 오히려 이들에게 반문하는 질문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모두는 누구의 것이냐?" 그럼 그들은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이 질문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대답은 이미 우리가 해 오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나요? 우리의 영혼의 사정에 시간을 더 많이 두는가요? 아니면 더 가꾸고 꾸미고, 더 많이 벌고, 더 육신의 건강을 챙기고, 더 높이 올라가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쓰는가요? 이처럼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우리의 주인을 결정하고 드러내고 있는 셈이지요. 마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겉으로만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가톨릭 신자' 이름표만 달고는 실제로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주인'을 정한 셈이지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우리의 육신은 훗날 세상에 남게 될 터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으로 영혼의 사정을 허비한 이들의 영혼은 그만 세상에 속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특징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논쟁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에만 사로잡혀 '부활'을 부정합니다. 요즘도 이런 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지혜만 믿으면서 신앙적인 내용들 중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들에게는 종교는 '아편'과 같은 것으로서 역사 속에서 민중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왔다는 식의 내용을 더 쉽게 받아들여 믿고 있고, 신비적인 모든 것들을 부정합니다. 이든 저든 자신의 사고에 받아들여져 이해가 되어야지만 수용을 한고 나머지는 모조리 부정하고 맙니다. 역사적 예수의 존재는 인정을 하지만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근본 '교만'이 깃들어 있습니다.

언뜻 사두가이의 주장을 들어보면 참으로 합당한 일이기도 합니다. 한 여인이 7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들였는데 죽고나서 부활한 뒤에는 누구를 남편으로 취해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을 해 보자면 참으로 골머리 아파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한 꼬마가 사탕을 한움큼 샀는데 자기 주머니는 하나 뿐이고 작아서 어디에다 보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입니다. 이 꼬마는 자기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부모님의 존재를 잊고 있는 셈입니다. 부모님에게 달려가서 자신이 들고 있는 사탕을 맡길 수 있고, 심지어는 더 많은 사탕을 얻어낼 수도 있건만 이 꼬마는 세상에 자기 밖에 없다고 순간 생각하는 모양새입니다. 인간의 편협한 사고도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신이 보고 듣고 인지하고 생각하는 선에서 그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 선에서 홀로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셈입니다. 그리고는 쾌락주의에 빠지거나 허무주의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는 대상들 앞에서 정신을 홀리는 쾌락을 선택하던지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셈이지요.

부활 그 이후
여기에서 예수님의 부활 그 이후의 실상이 증언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이 증언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여전히 세상의 생각으로 부활 이후의 삶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가족 관계가 하늘에서도 여전히 유지될 것으로 상상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인간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실천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하거나 자녀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배우자 선택 역시도 내가 알 수 있는 만남의 범위에서 이루어집니다. 한국 사람이 갑자기 엉뚱하게 알라스카 사람과 결혼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관계는 하느님의 선물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배워 나가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죽음 이후에 재정비됩니다. 각자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갈 수도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이를 분명하게 인지하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심판의 결과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는 이들은 이 심판의 결과를 수용하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관계, 즉 하늘나라에 있는 모두를 천사로 수용하는 관계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이 구절은 한동안 저를 혼동스럽게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모두 죽은 사람들인데 왜 예수님은 이 구절을 들어서 하느님을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저로서는 논리적으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 구절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래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기에 저 구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두가이 사람들이 '사람들의 부활'을 부정하기에 그들이 여전히 신봉하는 위대한 이들을 두고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입증한 셈입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 당신이 살아 계시고 그리고 그분은 여전히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선대에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 역시도 죽은 게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특히 하느님을 열렬히 따른 이들은 더욱더 완전한 의미로 '살아있는' 이들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에 이 땅에서의 존재의 양태가 사라질 뿐,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게 됩니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예수님께서 간간이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심판'이 되겠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가장 큰 계명
예수님의 계명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랑을 절대로 하나만으로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분명한 두 가지 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웃을 향한 사랑이 뒤따릅니다. 그거나 그거나 똑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배제되고 나면 엇나가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보다 광범위하고 심도 깊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턱대고 가난한 이와 약한 이를 향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이, 선인과 악인을 모두 감싸안아 하나로 아우르려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면 곧잘 한 부류의 이웃을 사랑하면서 다른 부류의 이웃을 증오하기 쉽상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행동은 '인간적 사랑'으로만 바라본다면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그 막대한 돈을 더욱 가난한 이웃을 향해 쓰는 것이 좋지 않았던가 하는 유다의 말은 언뜻 인간적으로 이해가 더 쉽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 사랑'을 배제한 발언입니다. 우리가 때로 하느님에게 드리는 시간과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봉사는 '기도'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실제 그런 이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살인범에게 다가가 용서를 건네는 부모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스캔들이 됩니다. 갈갈이 갈아 마셔도 모자랄 판에 용서라니요. 심지어는 적지 않은 신자들도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보다 진정한 길, 참된 평화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의 대답에 동의를 하면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모습에 예수님이 그에게 남기신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멀리 있지 않다'는 표현이 썩 유쾌하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왜 전혀 다른 표현으로 '너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다'라든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이런 애매해 보이는 표현을 하신 것일까요? 이는 바로 그 율법 학자가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을 뿐 여전히 그의 삶은 앞으로 개선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올바른 방향을 분별하기는 하지만 그리로 걸어나가지는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빛을 인식하고 그리로 방향을 틀었지만 실천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힘이 부족한 사람인 셈입니다. 머리로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지만 삶이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얽매인 사람입니다. 제가 같은 표현을 여러번 달리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요? 이런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신자들 중에 머리로는 하느님을 쫓아가지만 삶의 실천으로는 그 자리에 머무르거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이들이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이들'도 아닌 셈입니다. 그저 몇 걸음만 걸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이들은 여전히 그쪽만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그의 슬기로운 대답을 반겼지만 그에게 '한 걸음만 더 걸어오지 않겠니?' 하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인식만 하지 말고 실제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노력하라는 초대인 셈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인간적 생각은 보다 천상적으로 업그레이드 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자신의 율법적 배경 지식 아래에서 다가올 그리스도마저 자신들의 '율법 규정'안에 집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분이 진정한 세상의 구원자라면 어느 틀 안에 머물러 계실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모든 지상의 권력과 권위들이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합당하고, 심지어는 다윗 자신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같은 율법을 율법학자들은 제 편의대로, 예수님은 보다 진실한 성령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셈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교회법을 바라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법 준수'를 고수하며 가까이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일이 흔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대 위에 뭐가 좀 부족하다고 열심히 준비한 수녀님을 부끄럽게 하는 신부님들, 복사단이 뭘 좀 미흡하게 했다고 사랑하고 힘을 실어주고 보듬어안기는 커녕 대뜸 꾸짖기부터 하는 수녀님, 이제 겨우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자를 이끌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의무규정'을 들이대며 겁을 주려고 하는 평신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선인 걸까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위선자들의 전형인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의 특징은 "겉꾸미기를 좋아하고 명예로움을 즐기고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돈을 사랑하고, 실제로는 사랑이 전혀 없이 오히려 도와야 할 사람을 괴롭히기 일쑤인 이들"을 말합니다. 따로 누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 그런 이들이 보이면 조심하십시오. 하지만 '증오'하거나 뒷담화를 하지는 말고 그런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교회의 권위로 가르치는 바는 따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양심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내용을 빈번하게 가르친다면 그분의 윗 장상에게 합당하게 알려 드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판단은 '하느님'에게 맡겨져 있다는 걸 잊지 말고 그들을 심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거듭거듭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고 또 한다면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내면이 더욱 성숙될 것이고 하느님도 그 기도를 물리치시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많은 돈이라는 것의 허상에 우리는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보다 내밀한 부분을 바라보시는 분이십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의 마음의 방향입니다. 사실 하느님 말고는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는 이들은 곧잘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내어놓곤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들을 보살피게 되지요. 이들이 사는 것은 어찌보면 기적과도 같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셈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려서 세상의 것에서 마음을 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성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이 복음 말씀 그대로 특별한 소명을 받아 세상 것을 그대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상것을 대하는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위한 목적으로 세상 것을 취하려 하지 말고, 영원을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13장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외적인 것의 아름다움에 곧잘 경탄을 보이는 우리들입니다. 그 수많은 성지순례며 피정을 가서 우리가 보고 오는 것은 적지 않은 경우 거기에 있는 사물들의 외견입니다. 거대하고 장엄한 석조 건물들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간접체험할 수도 있겠으나 결국 하느님은 외적인 무언가로 드러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을 통해서 다가오시는 분이시니까요. 예수님부터 말씀하십니다.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그 흔적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단순이 이 외적인 건물의 파괴만을 예언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외적인 것에 감탄하고 집착하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우시는 셈입니다. 우리는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을 쌓아야 합니다.

재난의 시작
예수님의 말씀에 눈치를 챈 몇몇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시기와 그때의 표징을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아주 진지한 어조로 그때에 일어날 일을 예견해 주십니다.

속임
그때에는 수많은 이들이 서로를 속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거룩한 것을 대상으로도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간한 머리로는 그들을 분별해 내기가 쉽지 않을 정도일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이들만이 그 속임을 분별해 낼 것입니다. 벌써부터 이 땅에는 그런 이들이 적잖이 있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전쟁
그때에는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대규모의 무차별 살상이 자행되고 인간성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이 '반드시 벌어지겠지만'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전쟁 역시도 불의한 이들 앞에 내려지는 하느님의 심판의 도구로 작용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마지막은 아닙니다.

국가적 분쟁과 지진과 기근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아니 이미 일어난 지가 한참이 되었습니다. 이미 진통은 시작된 셈이지요. 사실 인간사에서 민족간의 분쟁이 있고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심각한 양상이 되어가고 있고, 과거의 국지적인 난국이 아닌 지금은 한 분쟁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류이 진통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악의 열매가 익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은 그 진통의 기간 동안 기다리고 계시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와 복음선포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의회에 넘기고 매질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총독과 임금들 앞에서 증언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최우선 사명은 '복음을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어떤 박해를 무릎쓰고라도 복음은 방방 곡곡에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이 사명을 맡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볼리비아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리에서 말이지요.

증언
우리는 말할 거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순간에 가장 적합한 말, 또는 '침묵'을 성령께서는 선물하실 것입니다. 어둠의 세력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진리가 없고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우리는 내면에 진리와 사랑을 품고 그들 앞에 나서기만 하면 그 이후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신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깨어지는 관계
지상에서 맺은 모든 관계,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친밀했다고 생각하던 관계의 파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그 때에는 '하느님'과 각자의 관계가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 밖의 관계는 형제든, 부모자식이든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이미 수많은 관계는 '탐욕'으로 바스러지고 있는 중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그 어떤 관계도 올바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 즉 하느님을 찾고 섬기는 이들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내로이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재난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이건 저로서도 알아들을 재간이 없습니다. 상상력을 통해서 여러가지 것들을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성전 제단 위에 무언가를 갖다 놓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슨 표시를 새기는 것일까요?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영성적'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황폐함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영성적인 면으로 여러가지 악덕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악' 그 자체가 그것이 되겠지요. 이 '악'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니까요. 거기에서 빚어져 나오는 온갓 악한 것들, 즉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의 모든 것들이 바로 '황폐함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있어서는 안될 곳은 어디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안의 거룩한 곳, 즉 '영혼'입니다. 사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들을 항상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어운전을 해도 갖다 박으려는 운전자는 어쩔 수가 없는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지침을 주십니다.

달아나라 아쉬워하거나 돌아서지 마라
그런 이들을 마주했을 때에 우리의 첫번째 행동양식은 '달아나기'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과 맞서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할' 속셈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정의와 진리와 선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맞서는 순간 그들의 파괴공작에 넘어가는 셈입니다.

다음 지침은 '아쉬워하지 않기'입니다. 그 어떤 소중한 가치들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런 이들 앞에서는 그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지상의 그 어떤 소중한 재화일지라도 그 어떤 명예로운 직위나 권력의 자리일지라도 그것을 탐하고 달려드는 이들 앞에서는 그런 것들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아쉬워하는 우리들을 너무나 쉽게 파괴해 버릴 것입니다.

마지막 지침은 '돌아서지 않기'입니다. 우리는 달아나고 아쉬워않고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 호기심에라도 흘긋 뒤를 돌아보다가는 그대로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악의를 지닌 이들 앞에서 여러분은 제 갈길을 가십시오.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시기에 무언가를 보살펴야 하는 이들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특히나 그 애착이 심하게 붙어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하고 안타깝다고 선언하시는 게 아니라 '불행하다'고 선언 하십니다. 이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렸다는 여자들은 단순히 실제적인 아이를 가진 여성들로 해석하기보다는 분명한 영적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애착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곧 '임신한 여자' 혹은 '젖먹이가 딸린 여자'가 되는 셈입니다. 저 역시도 이 정도만 설명하고 말겠습니다.

겨울
겨울이라는 것은 추위가 감돌고 온기가 있는 집 말고는 머물 곳이 없는 시기입니다. 즉 겨울은 우리의 영성적인 냉담한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히 성당을 나오지 않아서 '냉담'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찾지 않고 '냉담'해지는 시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꾸준히 기도 안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이 시기를 피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꾸준한 기도는 언제나 우리의 영성적 시기를 '봄이나 여름, 가을'로 꾸며주는 셈입니다.

환난
바로 이 최악의 시기에 환난은 다가옵니다. 어떤 환난이 될는지 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표현을 빌면 창조 이래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환난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환난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숨을 쉬고 살아있는 이들 중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고난을 떠올리더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환난'에 부합하는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연결시켜 말해오는 바, 이 환난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라기보다는 '영적 시련'이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모든 애착을 끊을 수 있는 '최악의 영적 시련'이 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과연 뭘까요? 예수님의 영적 고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의 '억울한 느낌', '버림받은 느낌', 모든 이에게 심지어 자신을 파견한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그 느낌을 짐작해 볼 수 있다면 아마 이 영적 '환난'의 정도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줄여진 날수
환난의 시기는 다행히 줄여 졌습니다. 하느님에게 이미 '선택받은 이들'이 있고 그들을 위해서는 이 환난의 시기가 줄여졌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견뎌내지 못할 시련과 환난을 마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속임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속임'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발현을 들고 나와서 순진한 이들을 속일 것이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도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표징과 이적들'로 선택된 이들마저 속이려고 들 것입니다. 애시당초 이런 '감각적'인 것들을 닫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감각적인 것에서 신앙의 표지를 구하려는 신앙인들은 훗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들로 속아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해 둔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지력에 맡겨 놓으셨습니다. 다만 이 모든 내용들은 '읽는 이'를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분명한 예언의 내용들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 이런 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복음선포'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분명히 알고 피할 수 있는 것들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방약이 나와 있는 질병은 예방해야 하는 셈이지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예고하십니다. 그 모든 환난이 지나가고 나면 '해'와 '달'이 빛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낮을 비춰오던 해와 달은 과연 무엇의 상징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현세의 사물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던 이성과 그 과거의 빛인 기억들입니다. '별'들은 명예를 상징하고 '하늘의 세력'은 권력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빛을 잃고 떨어지고 뒤흔들리고 나면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신비',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종교를 선택하고 하느님을 선택했다고 얼마나 많은 순간에 착각을 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훗날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무화과나무의 교훈
우리는 나무 한 그루의 변화를 보고 계절의 변화를 짐작합니다. 그런 같은 지혜로 우리는 세상의 일들을 보고 계절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야 합니다. 우리 인류의 죄악의 수준이 허용 범위를 넘어선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위에 언급된 사항들은 영성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어느 부분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 전체의 종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개개인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우리들에게 이 세대라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생의 세대를 말합니다. 이 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이러한 일들이 개인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한 사람의 생의 끝은 그에게는 곧 세상의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당신 말씀의 진실성을 확증합니다.

깨어 있어라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한 분, 아버지만이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로 봐서는 실제로 당신도 전혀 알지 못하셨던 부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당시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어 계셨지만, 신성은 이 거룩한 신비를 인성에게 드러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일진데 이 무슨 말이냐 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 입니다. 한 분 하느님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은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고 서로를 온전히 존중하는 것입니다. (좀 어렵고 난해한 부분이므로 이 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모든 이에게 제 자리에서 할 일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십니다. 따라서 문지기를 맡은 사람의 역할은 지대한 것입니다. 문지기, 즉 교회의 장상들과 사제단은 이 역할을 맡아 불을 꺼뜨리지 않고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제 자리에서 일을 열심히 하도록 돕고 나아가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언제라도 주님이 다가오시는 날 사람들을 일깨워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 이 거룩한 사명을 사제들이 이해한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이 '깨어있음'은 비단 사제들만의 영역은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이 말씀으로 이 지상명령을 모든 이에게 건네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마르코 복음 14장

음모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활동으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단단히 약이 오를대로 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굳건히 지켜온 자리가 무너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으니 그들이 쌓아온 세상의 탑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무너지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이 쌓아온 분열과 대립의 탑, 교만과 허식의 탑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누구라도 이런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이들은 자신 안에 쌓여 있던 거짓의 탑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속임수
그런 진리의 예수님 앞에서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수단은 '속임수' 뿐이었습니다. 속임수라는 것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언뜻 진리인 것처럼 우리에게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 바로 속임수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재물이 우리에게 드러내는 이상향이 바로 속임수이고, 명예로운 자리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안락과 편의가 속임수이며, 권력이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들이 바로 속임수인 셈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속임수가 만연합니다. 그리고 이 속임수를 통해서 의로운 이들이 무너지게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 앞에 선 이 '고위층'들도 마찬가지 계략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임수'를 통해서 예수님을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군중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군중'이었습니다. 이들은 군중을 바닥에 양탄자처럼 깔고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두려운 것은 바로 군중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느 형제를 깔고 그 위에 있는 이들은 바로 이 복음 구절의 율법학자와 수석 사제들이 하려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 이들은 누군가의 위에서 그들을 깔아 뭉개며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행여 우리 가운데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면 얼른 내려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자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부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에 몇 사람이 불쾌해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재화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이 '아까워'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 여인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나르드 향유보다도 더 향기로운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름은 전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온전히 '장님'이었던 셈이지요.

가난한 이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이들 타령을 합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도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헌신합니다. 본당마다 사회복지회가 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보살펴 줍니다. 하지만 그 근본 목적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유는 '복음선포'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알리고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궁핍함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들이고 따라서 예수님에게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나서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지 단순히 그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기를 바라고 돕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봉헌 행위처럼 자신의 신앙을 순수하게 드러낸 기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 교회에 거룩한 기물을 마련하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의 배신
그러는 가운데 유다가 조용히 홀로 움직입니다. 유다에 관해서는 이러저러한 이론의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배반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현실이기에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상상을 해 보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 넘겼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여러가지 면에서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데 유다는 아무래도 돈 욕심이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우리도 잘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도 돈 욕심이 있고, 예수님의 본질적인 가르침(수난, 죽음, 부활)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에 똑같은 행위에 빠져들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전에 없던 '예언'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짜여진 판을 보고 있는 듯이 예수님께서는 행동 하나하나를 지시하시면서 제자들을 보내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혹시 모든 것은 미리 '짜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 편으로 맞는 말이고 다른 한 편으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돈 욕심이 하나도 없는 사랑이 가득한 사람을 만날 적에 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생길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욕심이 엄청 많고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청을 할 때에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면이 뒤바뀌지 않는 이상은 우리의 짐작대로 일어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적 지혜에 덧붙여 하느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앞길 역시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자의 배신 예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동요했지만 유다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유다가 다시 마음을 돌이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의 고집을 바꾸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어지간히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그 동안 동행하면서 그 권능을 지켜봐 온 분의 입에서 이런 저주의 말이 나오는데도 뉘우치지 않고 배길 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의 고집은 더욱 굳어져 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고,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는 말들, 어떤 죄스런 결과가 예상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들으면서 웃어 넘겨 버리고 맙니다. 그런 우리의 고집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유다와 우리의 자화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성찬례의 제정
미사가 탄생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면서 당신의 '몸과 피'로 선포하시고 우리는 그 예식을 '미사'를 통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미사 가운데에는 사제의 인격을 통해 예수님은 현존하시고 여전히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십니다. 절대로 미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몇 번이고 강조를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배반 예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반 역시도 예고를 하십니다. 하지만 철없는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장담을 합니다. 우리 역시도 일이 잘 되어갈 때에는 어떤 장담이든 곧잘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그 모든 이유는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언제나 하느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니에서 기도
예수님은 슈퍼맨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모든 일어날 일을 보고 미리 파악하고는 계셨지만 그것을 아무런 감정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은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인간으로서 나약하셨고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청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의지만큼은 아버지 앞에서 굽히십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믿음, 희망, 사랑'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 덕목으로 세상을 의미하는 제자들을 벗어나 아버지 앞으로 더욱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조금 더 나아가'시어 땅에 엎드리는 '겸손과 순명'을 이루십니다. 그러는 중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청을 드립니다.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바램도 없는 로봇이 아니었고 당신이 원하는 바가 뚜렷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난의 시간이 비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의지는 하느님에게 봉헌을 하신 셈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도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세가지 복음 삼덕,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겸손과 순명'으로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모조리 청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주님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하지요. '당신 뜻대로'.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수면
잠을 자는 이들의 특징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제자들은 육체적인 피로로 인해 잠을 자고 있었지만, 이는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꿈'에 젖어 있는 이들이라서 영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맛들인 이들은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육적인 쾌락에 빠져 사는 이들도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세상이 건네주는 명예와 권력에 빠져사는 이들도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려고 하는 찰나에 우리는 여전히 이런 잠을 즐기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영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지만 우리의 육은 너무나도 나약하여 끊임없이 잠자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잠에서 깨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 뿐입니다.

잡히시다
이제부터는 실질적인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마치 눈 앞에 드러나는 일을 서술하듯이 복음서의 서술 방법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일은 무척이나 긴박하게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는 영성적인 의미를 파악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칼과 몽둥이
칼과 몽둥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육신을 제압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위용을 떨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육과 함께 머물러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이 칼과 몽둥이의 위력 앞에 눌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칼과 몽둥이의 한계는 거기 까지라는 것을 말이지요. 칼과 몽둥이는 절대로 우리의 영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덧붙여 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 이들을 보낸 이들은 '수석 사제, 율법 학자, 원로'들입니다. 이런 세상의 지위 역시도 우리를 외적으로는 제압할 수 있지만 우리 내면의 영은 절대로 제압할 수 없습니다.

입맞춤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친밀함을 표현하는 행위로 배반자는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입을 맞추려면 상대가 저항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제자의 입맞춤을 받아 들입니다. 이는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사랑의 표현이었던 셈입니다. 배반하러 온 제자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지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귀를 자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그를 꾸짖고 오히려 그 귀가 잘린 종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폭력을 쓰는 자들과 같은 수단으로 맞서라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한 젊은이가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가다가 사람들이 그를 붙잡으려 하자 그마저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을 칩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지 못한 세속 사람이 마지막까지 쥘 수 있는 마지막 재산과 자존심마저 버리고 그는 '생명'을 지키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 반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러 가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옷을 벗기우면서도 생명을 구하러 달아날까요? 아니면 예수님처럼 생명을 바치러 나아갈까요? 묵상해 볼 주제입니다.

신문
모든 고위 신분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맞설 수 있는 다른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거짓'을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마저도 서로간의 의견이 들어맞지 않는 꼴을 보입니다. 마치 바벨탑에서 일어난 장면을 다시 재현해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느님의 권위에 대적하기 위해서 서로 힘을 모아 탑을 쌓아 올리지만 결국 말이 뒤섞여 버리는 그들과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에 단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다 '네가 메시아냐?'라는 대사제의 질문에 의연히 대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님의 이 증언은 우리가 진정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뒤에 드러나는 그분의 말씀은 더욱 진실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역시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 일이 일어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대사제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신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사제는 이를 '신성모독'으로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자신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치부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른 한 편, 오늘날에 이를 흉내내려는 어리석은 이들과 그것을 추종하는 추종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적 계시는 마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알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는 이들이 하나씩 둘씩 생겨나고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그들을 따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롱
침과 주먹과 뺨을 때림. 육체적인 고난도 고난이지만 예수님의 가장 기본적인 인격도 모독을 당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독의 단 한 부분도 견디질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들, 특히 악인들에게 당하신 모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우리를 저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내동댕이친다 하더라도 그리 억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죽음을 불사하고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베드로, 이제 그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3번 부인하게 됩니다. 3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성을 담고 있는 숫자이지요. 베드로는 이로써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한 셈입니다. 그리고 곧 닭의 울음 소리를 듣고 자신이 한 일을 깨닫고 뉘우쳐 울기 시작합니다.

유다에게 주어진 경고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경고, 이로써 둘은 결국 같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두 인물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고 배반과 더불어 예수님의 경고도 받은 셈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완전히 넘겨버린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미리 건네신 말씀을 상기하고 뉘우쳐 울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 두 인물의 극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이어지는 장에서 예수님의 수난은 극대화되기 시작합니다.




마르코 복음 15장

빌라도의 신문
예수님의 죽음에 결정권을 가진 인물, 빌라도입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심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내면의 울림과 이성을 마주한 느낌입니다. 가난한 한 사람을 두고 우리의 내면은 그를 도와야 한다고 부르짖고 우리의 이성은 온갖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 내면의 소리를 의심하고 추궁합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을 하게 되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앞에 둔 빌라도도 자신의 이성적인 면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분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이상하게'는 생각해도 그분에게서 그 어떤 범죄의 혐의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빌라도와 군중
이에 빌라도는 군중의 힘을 빌고자 합니다. 군중은 이미 이성도 잃어버린 존재임에도 빌라도로서는 다른 데에 힘을 얻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 보다 내밀한 신비적인 면을 앞에 두고 자꾸 세상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합당한 의견을 도출해 내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거룩한 일'을 앞에 두고는 끊임없이 의심합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과연 저것이 진정 예수님의 몸과 피일까 의심을 하고, 기도를 드리면서 과연 이 기도가 정말 어떤 역할을 할까 의심을 하고, 사제를 대하면서도 과연 이 인간에게 정말 신적인 권능이 부여되어 있는 걸까 의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이루신 하느님 앞에 가서 겸손되이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에 전혀 무지한 '군중'들, 즉 세상으로 돌아가 의견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선동하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는 것입니다.

바라빠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이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의 죄는 명백한 것이었고 빌라도로서는 그를 잡아 두는 것이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그냥 풀어주게 될 것이라는 결과를 예상하고 군중 앞에 예수와 바라빠를 내어 놓습니다. 빌라도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석 사제들의 '시기심'의 결과로 붙잡혀 온 것을 말이지요. 하지만 군중들은 미친듯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는 이 우매하고 절도없는 '군중'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영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나갈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 그 의견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앞에 절실히 매달리거나 합당한 영적 지도자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이혼하려는 두 사람의 의견을 들고 세상 법정에 가면 '갈라섬'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올바른 양심을 지닌 사제 앞에 가면 '둘 다 사는 법'을 도와줍니다. 과연 우리는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 어디에 조언을 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멀쩡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빠를 살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군사들의 조롱
군사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경배'의 행위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에 이미 예고되어 있던 바이지요. 세상의 진정한 왕 앞에서 모든 존재들은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경배 행위는 지독히도 모독스런 것이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조롱과 모욕을 꿋꿋하게 참아 견디십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당하는 수모에 더욱 튼튼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하신 한 분의 뜻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우리는 수난 당하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을 얻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
군사들은 시골에서 올라오는 한 남성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웁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로 십자가를 걸머쥐게 된 그는 주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면서도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이들이지요.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선행에 대한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동족 유다인이면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던 이들이 그분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한 편,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던 이는 그분을 도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종교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주를 공경하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수난을 기꺼이 받아 쥐는 이들은 바로 이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수난 길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 상급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입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
일종의 마취제로 쓰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혼미한 정신으로 비껴가게 하기를 바라지 않고 온전히 모두 감싸 안으시기를 바라십니다. 아주 작은 고통이라도 피하려고만 하는 우리들이 잘 성찰해 보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에 우리에게 마땅히 다가올 수난의 시간을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게 될까요?

십자가
당시의 가장 처참한 사형도구인 십자가는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만 쓰여졌던 것이었습니다. 가장 사랑 가득하신 분이 가장 최악의 살인도구에 매달리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군사들은 그분의 마지막 소유물이었던 옷가지들마저 제비뽑기를 해서 가져갑니다. 한 마디로 탈탈 털어간 셈이지요. 예수님은 온전히 발가벗겨져서 매달려 계십니다. 온갖 수치와 조롱과 고통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죽기 직전의 그 순간도 조롱의 시간은 그치질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가와 '너 자신이나 구하라'며 조롱을 합니다. 심지어는 그분 곁에 같이 못박힌 이들도 조롱을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버지의 알수 없는 뜻에 따르긴 하지만 성자이신 예수님 마저도 그분의 위대하신 뜻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부와 온전히 일치해 있었지만 그분은 아니었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오묘한 신비는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이 순간 분명히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에 안심할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예수님에게 일어난 완전한 절망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적셔 주며 예언의 말씀을 완성하고(아마 이 끔찍한 순간 - 인간의 마지막 애정이 신 포도주로 다가오는 순간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시금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숨을 거둡니다.

- 잠시 묵상 -

이때에 성전 휘장은 갈라집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던 유일한 막이 제거된 셈이지요. 우리들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은 '영원'에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정복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영원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여인들
멀리서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의 여인들의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사랑은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제자들은 모조리 도망가고 정작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특권은 여인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곧잘 직분의 차이를 두고 남성과 여성을 차별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대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은 여전히 상존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직분에 있어서 남성들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여성들의 직분이 있고, 남성들에게만 부여된 직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자면 여성들은 예수님을 시중들수 있는 특권과, 그분의 가장 큰 고난 가운데 그분 곁에 머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는 셈입니다. 보는 시야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겠지만 이는 분명한 여성들의 특권입니다.

묻히시다
명망있는 의회 의원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 용기를 냅니다. 빌라도에게 다가가서 그분의 시신을 청하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본 후에 시신을 내어 줍니다. 빌라도의 마지막 역할이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지성은 거룩한 것의 '죽음'의 모습 외에는 다른 것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신비'를 파악할 능력이 없고 그저 일어난 일의 사정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지닌 '믿음'은 용기를 내게 하고 자신의 명망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믿음은 이성을 앞서는 셈입니다. 믿음이 있던 아리마태아 출신의 요셉은 그 거룩한 시신을 고이 싸서 새로 만든 무덤에 안치합니다. 그러는 동안 두 여인, 또 다른 믿음을 지녔던 이들이 그 광경을 지켜봅니다. 믿음은 거룩함의 존재를 알아보는 셈입니다. 이 예수님 시신의 안치로 그분의 죽음의 장면들이 마감됩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부활
앞서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것도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부활의 장면을 최초로 목격하는 것도 바로 '여인들'의 몫이 됩니다. 여인들, 여성들은 이처럼 예수님 보다 더욱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의 일거수 일투족의 증거자가 됩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이미 계시지 않았고, 그분은 갈릴레아로 먼저 가실 것이니 거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앞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부재를 경험한 마리아에게 최초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체험은 주어진 직분의 중대함 순서가 아니라 바로 '가장 많이 사랑을 드린 사람'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설정해 놓은 모든 것들이 바로 이 부활을 통해서 무산되는 셈입니다. 사제라서 하느님 더 가까이 있는 보장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직분과 위치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이들만이 하느님 가까이 머물 수 있게 됩니다. 마리아는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지만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두 제자
이번에는 시골로 가는 다른 두 제자에게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

열한 제자
결국 예수님은 열한 제자 앞에 직접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기까지 합니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으니 교회의 교권은 마땅히 많은 것을 분별해야 하는 신중한 위치에 있지만 때로는 이 신중함이 보다 소중한 믿음을 눌러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은 온 세상 만방에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라고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인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피조물'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사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함께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버리는 온갖 쓰레기로 피해를 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죄없는 피조물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돌이키고 선을 향할 때에 이 복음은 온갖 피조물에게도 선포되게 됩니다.

믿음
믿음은 선택사항이지만 달리 말하면 선택사항이 아니게 됩니다. 진리의 말을 듣고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는 분명한 자신의 결과를 되받게 됩니다. 믿는 이에게는 '구원'이, 반대로 믿지 않는 이에게는 '단죄'가 주어집니다. 믿지 않는다고 그저 제 갈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에게는 분명한 '단죄'가 주어 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믿는 이의 표징
- 마귀를 쫓아냄
- 새로운 언어
- 해로운 것들로부터 보호
- 치유

마귀를 쫓아냄
믿는 이들은 위의 사항들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어둠의 영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나 다른 이를 향해서나 이루어집니다. 물론 주로는 자기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어둠의 영들이 실존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오직 '믿음'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자신의 직분 속에서 이런 일을 수행합니다. 사제의 축복식과 구마행위는 실제로도 이루어지며 특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모든 사제들은 진정한 구마예식을 이루고 있습니다.

새로운 언어
믿는 이들은 전에 말하지 않던 새로운 언어를 말을 합니다. 이는 바로 '사랑의 언어'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좀 착해 보이고 선해 보이면 다 사랑인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한 번도 이야기하거나 실천해 본 적이 없습니다. 믿는 이들의 특징은 이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해로운 것들로부터 보호
믿는 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온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다가서는 것도 서슴지 않도록 합니다. 육적으로도 보호를 받겠지만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육이 나약해지기 시작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은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이 영혼의 보호는 위대한 것이라서 우리의 육이 스러지는 날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보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주변의 해로움도 우리를 공략하지 못할 것입니다.

치유
우리는 치유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육적인 치유만을 떠올리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지력을 주셔서 많은 의료기술을 발전시키셨고 필요한 치료 행위는 반드시 병원과 의사를 통해서 이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할 때에도 이 거룩한 치유는 실제로 분명하게 이루어집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치유의 힘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치유의 근본 목적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치유를 하신 이유는 '영혼을 살리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육신도 치유를 덩달아 하신 셈이지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현대에 보다 많이 필요한 것은 육신의 치유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치유된 육신으로 더 많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현대에 진실로 필요한 것은 바로 '영혼의 치유'입니다.

승천
하늘로 올랐다는 이 표현은 단순히 수직 방향으로 위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 즉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신 곳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 곳에서 우리 모두를 똑같이 보살피십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부활한 육신과 더불어 이 땅에 머무르셨다면 최악의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지금 교황님을 마주하려는 1000배의 열심으로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곳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우리 모든 이에게 똑같이 다가오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실제로 이 일은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는 매번의 미사 중에 사제의 인격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주하고 그분의 거룩한 몸,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제자들은 승천하신 예수님, 하지만 그들 모두와 똑같이 머물러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또 다른 예수님이 되어 그분이 하신 일을 반복했습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고, 표징으로 그것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마무리
예수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여인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서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나가게 하셨다."

아멘
마르코 복음서는 이 모든 것들이 진실되다는 짧은 구절로 끝을 맺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아멘, 아멘!


댓글

Unknown님의 메시지…
감사ㅘㅂ니다. ㅁㄹ씀을 통하여 전달해 주시는 그분의 가르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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