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우리가 미사에 나오도록 의무 지우신 적이 없습니다. 교회가 그런 의무규정을 만든 것이지요. 모든 의무규정은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미사가 처음부터 주일미사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일미사는 더더욱 아니었지요. 역사 안에서 주일미사에 대한 의무규정이 생겨난 셈입니다.
하느님은 ‘주일미사의 의무’를 만드신 게 아니라 우리가 주일을 거룩히 보내길 바라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낸다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것을 기려 우리도 ‘안식’을 취하고 나아가 주님 부활의 기쁨의 의미를 더해서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기쁨’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주일의 의미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쾌락’에 굶주리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주일만 되면 ‘안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쾌락거리를 찾아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주일의 기쁨은 ‘의무’로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그 전략은 잘 먹혀든 셈입니다.
사람들은 주일에 쉬지 않습니다. 아니, 반대로 그 어느 다른 날보다 더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락을 즐긴다는 핑계로 주일을 그 어느 날보다 피곤한 날로 전락시켜 버렸지요.
사람들은 주일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미사에 나오고 미사만 끝나면 도망가기 바쁩니다. 주님의 거룩한 수난 만찬은 ‘의무규정’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해야 하는 허례허식으로 그치고 말았고 그런 힘없는 주일미사는 사제들에게서도 힘을 빼어 주일 강론을 더욱 힘없게 준비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먹이는 게 아니라 꾸중하기 바쁘지요. 하지만 정작 꾸중해야 할 사람은 교회 밖에 있고 그나마 교회에 나오는 이들은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인데 교회에 나오면 오히려 더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맙니다. 그러니 미사를 마치고 얼른 다시 나가서 ‘쾌락’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욕구가 더욱 강해지고 마는 것이지요.
주일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고 ‘의무’만이 남은 오늘날, 우리는 주일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은 ‘안식’의 날이고 ‘기쁨’의 날이어야 합니다. 그 참된 의미의 ‘안식’과 ‘기쁨’을 나는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주일미사의 의무’를 만드신 게 아니라 우리가 주일을 거룩히 보내길 바라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낸다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신 것을 기려 우리도 ‘안식’을 취하고 나아가 주님 부활의 기쁨의 의미를 더해서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기쁨’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주일의 의미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람들을 ‘쾌락’에 굶주리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주일만 되면 ‘안식’을 취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쾌락거리를 찾아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주일의 기쁨은 ‘의무’로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그 전략은 잘 먹혀든 셈입니다.
사람들은 주일에 쉬지 않습니다. 아니, 반대로 그 어느 다른 날보다 더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락을 즐긴다는 핑계로 주일을 그 어느 날보다 피곤한 날로 전락시켜 버렸지요.
사람들은 주일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미사에 나오고 미사만 끝나면 도망가기 바쁩니다. 주님의 거룩한 수난 만찬은 ‘의무규정’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해야 하는 허례허식으로 그치고 말았고 그런 힘없는 주일미사는 사제들에게서도 힘을 빼어 주일 강론을 더욱 힘없게 준비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먹이는 게 아니라 꾸중하기 바쁘지요. 하지만 정작 꾸중해야 할 사람은 교회 밖에 있고 그나마 교회에 나오는 이들은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인데 교회에 나오면 오히려 더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맙니다. 그러니 미사를 마치고 얼른 다시 나가서 ‘쾌락’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욕구가 더욱 강해지고 마는 것이지요.
주일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고 ‘의무’만이 남은 오늘날, 우리는 주일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주일은 ‘안식’의 날이고 ‘기쁨’의 날이어야 합니다. 그 참된 의미의 ‘안식’과 ‘기쁨’을 나는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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