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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혼인

혼배를 하면서 때로 만나게 되는 케이스는 자신들이 마음먹고 그 직후에 결혼하고 싶어하는 부부들입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문 것이 가톨릭 신자라면 혼배 준비를 교회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미리 시간을 두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정보를 전혀 알지 못하기에 자기들끼리 마음먹고 심지어는 한 측이 세례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와서는 당장 다다음주에 결혼을 하겠다고 본당 신부 앞에서 소위 ‘선언’을 하고는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혼배에 대한 벽이 다른 교회보다 높은 이유는 그만큼 혼배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지 단순히 사람을 성가시게 해서 성질이 머리 끝까지 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일 대학이 공중화장실처럼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는 거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대학에 대한 의미를 크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수능을 치고, 좀 더 좋은 대학은 그 밖의 준비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는 두 인격의 결합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그 약속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혼인 준비 과정을 보살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를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단순히 교회는 지독히 독선적이고 행정적이라고만 생각하기 일쑤이지요. 자기들 마음대로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하고 싶은데 생각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 번 자유의지로 동의한 혼인에 대해서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본한 규율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혼인이 다수성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이미 그 결과물은 여기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한 남자가 이 여자와, 또 저 여자와 가정을 꾸린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고통받는 것은 그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은 자신의 아빠가 또 다른 엄마와 이복형제들을 두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적지 않은 실망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 충격은 본인의 혼배 결정에 있어서도 작용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혼인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와 놀아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만일 혼인이 가해소라면 이 또한 비슷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혼인을 맺었다가 풀었다가 이 여자와 만났다가 저 여자와 만났다가 하면서 우리들의 내면에는 결국 ‘성실’과 ‘신뢰’라는 가치들이 산산조각나고 말 것입니다. 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의 관계는 속고 속이는 관계가 되고 말겠지요. 필요에 의해서만 서로를 찾고 그 필요가 다하면 헤어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욕구가 극에 달해서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하기 싫어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냥 원하면 당장 붙어서 살기를 바라고, 반대로 싫으면 당장 헤어지기를 바라는 이들이지요. 서로 분위기가 좋을 때는 알콩달콩 살아가다가 시간이 흘러 서로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여지없이 갈라서기를 바라는 다 큰 어린애들이 너무나도 많은 요즘입니다.

하느님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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