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통상적으로 우리 스스로를 지극히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분노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화내는 게 아니라 화를 내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분석적으로 사고한다면 화낼 일이 엄청나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화를 내고 나서 그 뒤에 다가오는 것들을 우리의 두뇌로 면밀히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들을 다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영리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지혜로운’ 행위이지만 세상적으로는 멍청한 행위에 불과하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뺨을 세게 맞으면 반드시 당한 수치와 모욕과 더불어 상대의 뺨을 때려야 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인데 사랑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니 말입니다. 이는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멍청함이 진정 우리를 살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지금 당장 당한 것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더욱 논리적이고 사고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그 논리와 사고는 상대를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짜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그의 말 하나하나를 면밀히 분석하고 그에 대응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런 예수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만일 누군가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분석적으로 사고한다면 화낼 일이 엄청나게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화를 내고 나서 그 뒤에 다가오는 것들을 우리의 두뇌로 면밀히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들을 다시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영리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지혜로운’ 행위이지만 세상적으로는 멍청한 행위에 불과하게 드러나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게 이유 없이 뺨을 세게 맞으면 반드시 당한 수치와 모욕과 더불어 상대의 뺨을 때려야 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인데 사랑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니 말입니다. 이는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멍청함이 진정 우리를 살리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지금 당장 당한 것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더욱 논리적이고 사고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그 논리와 사고는 상대를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짜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그의 말 하나하나를 면밀히 분석하고 그에 대응하신 게 아니라 오히려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런 예수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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