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위로를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제 맘에 와 닿지 않습니다.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힘든 일을 겪은 이 곁에 머무르면서 따스한 말을 건네거나 급작스럽고 괴로운 일을 겪은 이에게 다가가 다정함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행동이 위로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실제로 우리 곁에 와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우리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헌데 하느님께서 이런 위로를 건네신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우리가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위로를 건네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파헤칠 필요가 있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사람이 있습니다.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가서 그와 술을 들이킵니다. 그러면 어느정도 일시적인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근본적인 위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의 괴로움을 중화시켜 줄 수는 있지만 소주 한 병과 그의 방문에 여자친구를 돌아오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헌데 만일 누군가가 인생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여자 친구가 떠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친구를 떠나게 한 요인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준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위로를 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 슬퍼하는 사람은 멀어진 여자친구의 마음을 돌이키고 다시 여자친구와 하나가 될 가능성도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겪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원하는 것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원하는 것이 지상의 것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본적으로 모두 성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슬퍼합니다. 어릴 때는 선물이 갖고 싶어 울고, 젊어서는 연인이 사귀고 싶어 울고, 커서는 직장을 구하고 싶어 울고, 늙어서는 자녀들 때문에 울고, 그러다가 죽음을 앞두고는 생이 허망해서 우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극히 소수의 사람의 경우에는 원하는 것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천상적인 바람이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두 경우에 모두 위로가 됩니다.
먼저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따르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세상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이전까지 슬퍼하던 일들에서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더는 돈 때문에 걱정을 하지 않게 되고,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시달리지도 않게 됩니다. 즉, 자신의 ‘옛 인간’이 겪던 모든 슬픔에서 차츰 차츰 해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첫 단계의 위로를 충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이유가 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를 모두 곁들여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눈을 들어 천상을 바라보게 도와 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렇게 일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참된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부던히 하느님의 참 모습에 대해서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이 첫번 과정만으로도 평생을 보내고도 부족할지 모릅니다.
일단 사람이 그렇게 속적인 인간의 모든 걱정 거리에서 해방되었다고 간주한다면 남은 슬픔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슬픔이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느님은 위로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당신 외아들의 길을 걷는 사람은 모두 참된 구원에 이르게 되고 진정한 해방을 얻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 알고 있지요.
하느님의 위로는 안타깝게도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위로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위로는 한 인간의 신앙에 깊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굳건히 지닌 이는 이 위로를 실제적으로 체험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는 아무리 노력하고 찾아보려해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닌 이에게 죽음이 위협이 되겠습니까? 만일 한 사람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무엇이 그를 슬프게 만들 수 있을까요? 또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약속에 충실한 분이 약속된 영원한 상급을 주신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서 잠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될까요? 그러나 이는 오직 ‘신앙’으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신앙의 신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 위로를 실제적인 것으로 구체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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