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설명하는 것들은 ‘신앙’, ’믿음’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요. 만일 삼국시대 사람에게 아이폰을 보여 주면서 이것으로 이역만리에 떨어진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에게는 ‘현대화된 지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전기라는 것도 없이 등불을 켜고 사는 사람에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개념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교회의 모든 핵심적인 활동과 가르침은 공허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교회의 모든 유산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핵심 관건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내는 삶이 없으면 이 또한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어둠의 영들은 모두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악한 영들이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 받아들인 신적 지식을 바탕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한가지 더 덧붙여서 ‘이성’이라는 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할 때에 가진 믿음을 보완해주는 튼튼한 구조물을 구축하게 됩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기 전에 철학을 먼저 배우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인간의 논리성과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믿음 위에 튼튼한 구조물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소리만 자꾸 하게 될 테니까 말이지요. 맹목적으로 막연히 믿으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믿음의 삶에 대한 가치와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한 결과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믿음에로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초대를 하는 사람이 실천으로 단련이 되어 있어야 하기도 하겠지요. 본인 스스로 엉망인 삶을 살면서 다른 이에게 믿음의 초대를 하면 그 초대가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하니까요.
이 부분에서 또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회개한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하지 않았고 수많은 오류와 더불어 성장했으며 실질적인 죄스런 행위들도 많이 저지르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초대를 받았고 그 받은 초대를 바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완벽한 사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순결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어린 양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이끌어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방향지워주고 그분을 만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믿음, 실천, 이성, 회개… 이상의 4가지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각각의 주제들은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뒤섞여서 일어나기도 하고, 순차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올바른 사고를 바탕으로 믿음에 다가서기도 하고, 또 누구는 믿어서 이성이 밝아지기도 합니다. 누구는 열심히 살던 중에 믿음을 얻어서 더욱 열심히 살기도 하고, 누구는 먼저 믿고 실천을 채워 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는 제 각각의 순간에 ‘회개’의 기회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회개는 정말 극적인 대반전이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일상적인 회개가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제가 추상적으로 설명을 해서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회개’의 삶 속에서,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제 ‘믿음’을 표현하고 ‘실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경향이 맘에 들 수도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경로, 수단을 통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일치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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