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를 정당화 시키는 것은 허망한 일입니다. 증오는 증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당한 증오라는 것은 세상에 합당한 말이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무력한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당한 증오를 발휘했더라면 2000년 전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전에 세상은 종말했더라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죽인 세상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의 주님은 증오의 신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와 자비의 신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신의 증오를 정당화 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봐라. 저들이 이러이러이러한 짓을 했으니 마땅히 우리가 증오하고 미워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논리적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를 따르면 상대는 잘못을 했고 그 잘못에는 합당한 처벌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차원에서 말하는 것과 세상적 차원에서 말하는 개념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먼저 세상에서 용서라는 것은 합당한 거래를 의미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내가 받은 손해를 마땅히 다 기워 갚아야 비로소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래’이지 용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손해를 하나도 남긴없이 다시 다 되돌려 받았는데도 용서하지 않으면 도리어 용서하지 않는 그가 잘못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손해는 다 갚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식지 않았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그 주관적인 마음은 아무리 열과 성을 다 해도 성이 차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증오는 영원히 지속되는 셈이지요.
반면 그리스도교 차원에서 용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용서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는 증오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용서,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들이미는 용서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이런 용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아내를 때리는데 그 아내가 이혼을 준비하기는 커녕 더 하느님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두고 세상은 그녀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나를 두고 중상을 하고 험담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대항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 견디는 주임 신부를 두고 세상은 그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서로 싸운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저마다 상처 받았다고 하고 저마다 힘들다고 하면서 서로를 향해 칼날을 세웁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당한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호구’를 좋아하니까요. 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나면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는 커녕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 영리한 세상에 착한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모두 죽어 가겠지요. 심지어 의인의 죽음은 더욱 허망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토록 하느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하면서도 세상 안에서 그 어떤 낙도 누리지 못한 채로 허망하게 죽어가니 말입니다. 심지어 악독한 부자들이 호화스러운 관에 담겨 땅에 묻히는 동안 선한 그리스도인은 제 몸 누일 곳 하나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죽는 일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지닌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다 더 선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찌기 세상을 떠난 모든 선한 양심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세상에 남아있는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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