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공동체를 키우는 방식


한 공동체를 아이로 비유했을 때에 이 아이는 무엇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성장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면 아이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반대로 세상의 탐욕을 가르치면 아이는 탐욕스런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지요.

훌륭한 가르침은 어떻게 전해질까요? 바로 모범으로 전해집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훌륭한 스승이셨지요.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는 바, 즉 사랑을 그대로 살아내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는 사제들이 예수님의 그 모범을 이어받아 살아가도록 보냄, 파견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교리교사들을 파견하고, 또 주일의 메세지를 통해서 각 가정과 사회마다 그리스도인을 파견하는 것이지요. 결국 훌륭한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아 구석구석에 전하는 공동체, 한 몸을 이루어 하느님의 성령을 그 혈관 속에 흐르게 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럼 공동체 안의 탐욕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교회의 장상이 주님과의 연계를 끊고 자신만을 생각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목자는 오직 자신의 영달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을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에 흔히 보이는 것이 물량을 통한 사목, 숫자에 신경쓰는 사목이 되는 것이지요. 선교지의 사제가 사람들을 복음화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공소 건물을 쌓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본당 신부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전하는 것에 열중하기 보다 본당의 규모를 키워서 봉헌금을 늘리는 데에만 신경쓰기 시작한다면 그는 외적으로는 무언가 엄청난 것을 세우고 키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탐욕’이 본당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건물을 짓는 사제 주위에는 건축업자들이 드나들게 되고 거기에서 콩고물을 얻어 먹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또 신자 수를 늘리려는 사제 주변에는 그런 주임신부의 욕구를 채워 인기를 얻어 보려는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아들인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 신앙적 생명력이 약할 수 밖에 없고, 숫자를 키우는 자신의 쓰임새가 다하고 나면 사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쉬는 교우가 되기 십상입니다. 애초부터 가르칠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라 숫자를 늘릴 생각에만 집중했기 때문이지요.

교리교사들을 데리고 맛있는 걸 사주고 회식을 자주 하면 당연 그에 관심을 두는 교리교사들의 수가 늘게 됩니다. 반면 교리교사들을 데리고 신앙 교육에 헌신하고 이런 저런 도전거리를 통해서 실제적인 삶 안에서 신앙을 적용하는 법을 키워주면 그런 교리교사들이 늘게 됩니다. 썩은 음식이 있는 곳에는 파리가 꼬이게 마련이고, 향긋한 꽃이 있는 곳에는 벌과 나비가 모여들게 마련이지요.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만드는 걸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주임 신부 주변에는 그런 것을 즐기는 신자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골프를 즐기는 사제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같은 취미를 지닌 신자들이 모여들게 마련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거기에서 얻은 것을 나누려는 사제 주변에는 거기에 관심을 가진 신자들이 모이게 마련이고, 전례를 소중히 여기고 거룩하게 집전하려는 사제 주변에는 마찬가지로 그런 거룩함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양들은 목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게 됩니다. 헌데 목자가 아니라 제 몫에만 관심 있는 삯꾼이라면 양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목이 말라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리떼의 공격에도 취약하게 되지요. 세상의 유혹이 다가오고 시련이 밀려들면 절망하고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제들을 보내 주십시오.
하느님, 많은 사제들을 보내 주십시오.
하느님, 많은 거룩한 사제들을 보내 주십시오.

아멘.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