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예수와 우리들


흐르는 강의 가운데에 말뚝을 박으면 거센 물살을 견디어 내어야 하는 법입니다. 세상이 제 살 길을 찾아 나가는 중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뚝을 박으면 그 말뚝은 사람들의 거센 반대를 견디어 내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래가 그런 운명인 것을 막상 그 일이 닥치기 시작하면 힘들고 괴로워 죽겠다고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맞부딪치게 될 일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억울함’입니다. 즉, 우리가 선한 의지로 행한 일에 반대의 반응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억울함의 최고봉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는 억울함의 상징이자, 그것에 맞서는 최고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 사악함으로 자신들에게 전해진 구원의 손길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세상의 사악함에 대해서 하느님은 당신의 가장 소중한 이를 산 제물로 쓰신 것이지요.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제물로 선택된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 선택에 감사할 줄 알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방방 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억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구요?! 천만에요. 나서서 싸우고 투쟁하고 쟁취해야지요!’ 사실 그러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서서 투쟁하고 맞서기 시작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투쟁하고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지요. 예수님을 악을 향한 투쟁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의 실천과 온유, 겸손, 그리고 기도로써 맞서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하고 말았지요. 그 대표주자가 바로 유다 이스가리옷이었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을 원했습니다. 지금 당장의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파워풀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 방식들,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착한 마음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불어넣는 작업은 너무나도 나약해 보였고 너무나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습니다. 결국 유다는 당시 몸종을 거래하는 값인 은전 30냥에 구세주를 팔아 치우고 맙니다.

비슷한 일이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질에 접근해 가면서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자신들은 뭔가 실제적이고 지금 당장의 고난에서 자신들을 구해 줄 무언가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그런 자신들의 이상에 너무나 무력한 존재로 내비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저버리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의 방식, 스스로 생각하기에 현명하고 일리 있는 방식을 따르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껏 증오하고 표독스런 표현을 하는 것을 삼가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전사’들이 많습니다. 키보드만 붙들면 정의의 투사로 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 안에서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요? 과연 사랑하는 아내의 설거지를 한 번이라도 도울까요?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의 노동을 소중히 여기고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일상 생활 안에서는 아주 작은 시련 하나도 견디지 못하면서 온라인 상에서는 모든 시련을 과감히 견디고 이겨 내겠다는 정의의 사도가 되는 것일까요? 세상이 바뀌는 것은 윗대가리가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윗대가리들은 그 아래 토양에서 자라나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의 우리 세대에 합당한 수장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윗선이 부정 부패에 만연해 있다고 비난하기 전에 과연 우리는 소소한 부정으로 세금을 피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도 그 세금을 충실히 낼 만큼 도덕적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거룩한 전례에서 휘황 찬란한 예복을 입고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과연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있을까요? 아니면 고위 성직자들 옆에서 노는 걸 즐기면서 정작 가난한 이들을 보면 무시하고 천시하고 그들과 나는 급이 다르다고 은근히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위선자들아! 먼저 너희의 마음을 닦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