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로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은 사람이 떠나는 것, 죽는 것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고 우리가 같은 길에 있다면 영원 안에서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잠시의 이별이 슬픈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있고 한 사람과의 이별 앞에서 슬픔을 느끼게 되지요. 설령 그 이별이 잠시라 할지라도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은 그 잠시의 떨어져 있음이 아닙니다. 참된 슬픔은 한 영혼이 갈 길을 잃고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할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 영혼은 비로 한 지붕 안에 같이 산다고 할지라도 같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외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지극히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참된 세상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집중을 하면 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처럼 남아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 안에서 삶을 영위할 뿐입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마음은 서로 갈라져 있고, 탐욕과 시기와 증오와 이기심으로 인해 산산 조각이 나 있습니다. 그저 한 지붕 안에 함께 산다는 것이 일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요. 우리는 같은 길, 하느님을 향한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흘리는 눈물보다도 그의 길이 하느님에게서 어긋나 있음에 더욱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그는 육신은 비록 살아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죽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기심과 탐욕을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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