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 4,7)
어제는 구역미사를 하면서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말로 시작을 했지요.
“여러분은 누구를 만났을 때에 편안함을 느낍니까? 그가 돈이 많으면 편안함을 느끼나요? 그렇지 않지요. 돈이 많고 적고, 학식이 많고 적고는 언제나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가 다른 이를 품어 안을 줄 아는 사람인가? 그가 인내심이 있고 사랑이 있고 포용성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편안한 부자도 있고 불편한 부자도 있는 법입니다. 그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가가 그에게 다가서는 느낌을 규정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평화의 주님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제인 저에게 다가오는 것도 섣불리 하지 못합니다. 제가 가진 사제로서의 본당 주임신부로서의 권위가 도리어 여러분을 밀쳐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지극히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말이지요. 누구든지 다가와서 바라보고 미소짓고 쓰다듬게 할 수 있도록 지극히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을 가득히 품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우리의 주님은 진정한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필리피서는 이런 평화를 한층 더 격상시킵니다.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라는 표현으로 말이지요. 하느님의 참된 평화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깊은 사랑이고 가장 겸손된 표현이며 가장 온유한 만남이지요. 누구든지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의 내면에는 참된 평화가 넘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로움, 그 참된 안식의 상태는 우리를 지켜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느끼게 되면 그것을 더 찾고 얻으려고 하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를 맛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더욱 얻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다가오셔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갈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하느님에게서 그 자양분을 얻도록 도와주시는 것이지요.
제가 하는 말마디가 너무 추상적이라서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미 평화를 추구하고 있는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고, 여전히 세상의 환락을 찾는 이들에게는 이 모든 말들이 수수께끼로 남을 뿐일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의 입에는 알콜이, 그들의 귀에는 맛깔스런 대중가요가 그들의 감각적 욕구를 채우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을 테지요. 침묵은 그들에게 나약함의 상징일 뿐이며, 겸손이라는 것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가치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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